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22화 (22/200)

22. 오늘이 바로 그날 (1)

“차장님. 정실 전자 관련해서 보고 좀 드릴 게 있습니다.”

지금 임홍빈 차장 앞에서 보고서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은 김영하.

그는 며칠 동안 그 보고서를 쓰는데 애를 먹었다며 내 앞에서 엄살을 부렸었다.

임홍빈 차장은 아침부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손바닥만 한 전화기를 들고 낄낄대기 바빴다.

“저··· 차장님.”

김영하가 한 번 더 부르고 나서야 임 차장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 왜.”

“정실 전자요. 보고 좀 드릴게요.”

임 차장은 고개를 다시 휴대전화로 돌리곤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말을 툭 던졌다.

“아··· 그거. 정실 전자 그냥 접자.”

··· 뭐?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이주 전만 해도 그 난리를 치다가, 인제 와서 갑자기 접자고?

당황한 것은 김영하도 매한가지인 듯했다.

“··· 예?”

“못 들었어? 그냥 철수하자고.”

“차장님. 왜 갑자기··· 정실이랑은 지금 커뮤니케이션도 잘 되고 있는데요. 어지간하면 저희 요구를 다 수용할 것 같습니다.”

“아, 그거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만드네, 정말. 회사에 지금 여유 자금이 없답니다. 김 주임님.”

임 차장은 김형하를 도끼눈으로 째려보았다.

“사장님께서 마음이 바뀌셨다잖아. 회사 오너가 안 하겠다는데, 어? 김 주임님께서 직접 가서 사장님한테 말씀 드리든가요. 아니다, 김 주임이 그냥 사장해라. 네 돈으로 정실 전자한테 납품도 받고. 그럼 되겠다. 그렇지?”

“...”

“오늘 회식 있잖아. 예약은 해놨어?”

“아니요. 아직···”

“오늘 곱창 땡긴다. 곱창집으로 하자.”

김영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자기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시팔.”

치솟는 울화통에 얼굴이 새빨개진 김영하는 제 자리에 앉더니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공들여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접어, 한마디에 빠개졌으니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일이 또 이렇게 어그러지는구나.

머릿속에서 정실 기업 사장의 손에 낀 기름때가, 그의 선한 눈동자가 계속 맴돌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 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 저 정실 전자에 외근 좀 다녀오겠습니다.”

“야, 한 대리. 내가 지금 김 주임이랑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접는다고 그거.”

“예. 잘 들었습니다. 그래도 얼굴 보고 사정 설명은 드려야죠.”

“너도 참 일 답답하게 한다. 그냥 전화로 통보하면 되잖아.”

언젠가 임 차장이 말했었다.

사업은 신의로 하는 것 아니냐고.

이게 네가 말하는 신의냐?

그 신의는 오직 원청을 상대할 때만이고, 하청업체에겐 깡그리 무시되어도 좋은 종류냐고.

“이 바닥 좁은 거 아시지 않습니까.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마무리를 짓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보여야죠.”

“예의는 그쪽에서 보여야지 우리가 왜···”

임 차장은 혼잣말을 구시렁대더니 빨리 사라지라는 듯 나에게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끝나고 회식이나 참석해.”

*

“안녕하세요. 정식 모터스에서 나왔습니다. 사장님은 어디 계시죠?”

정실 전자에 도착해 사무실에 들어가자, 안에는 경리를 보는 직원 한 명뿐이었다.

“아··· 사장님이요? 지금 공장에 계실 텐데.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제가 전화를 드릴게요.”

“아닙니다. 제가 사장님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신재 사장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LED 칩의 수명이야 중국산도 7, 8년은 써. 근데 관건은 컨버터야. 컨버터 수명을 늘리는 게 진짜 램프의 수명을 늘리는 거지. 그래서···”

이신재 사장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물건 하나를 든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사장님.”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직원 중 한명이 나를 가리키고 나서야 이 사장은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한 대리님!”

“안녕하세요.”

“말씀도 없이 어쩐 일로. 미리 전화라도 주시지.”

이 사장은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졌다.

오늘도 그의 손은 틀림없는 일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자, 여기는 정식 모터스의 한영수 대리님. 다들 인사드려요.”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직원들의 인사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다.

“저··· 사장님.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아니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식사는 하셨나? 저녁 시간 다 되어가니까 나가서 밥이라도 한 끼 하시는 게 어때요?”

“아닙니다. 잠깐이면 되니까 앞에서 말씀하시죠.”

공장 밖으로 나온 이 사장은 조심스럽게 나를 살폈다.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내 표정이 좋았을 리가 없다.

마치 거울에 상이 비치듯 이신재 사장의 얼굴도 나를 따라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대리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사장님.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신재 사장의 불안한 눈동자는 오직 내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 윗선에서 이번 납품 계약 건을 철회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

“신규 설비 증설에 들어가는 비용에 부담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많이 기대하셨을 텐데 정말 유감입니다.”

“예··· 저희뿐만 아니라 요즘 다들 경기가 어려우니, 정식 모터스도 힘드시겠죠···”

이 사장은 고개를 푹 떨궜다.

가뜩이나 작은 그의 체구는 더더욱 움츠러들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저기, 내가 정식 모터스 사장님을 한 번 만나 뵐까요? 생각해보니 가만히 앉아서 이러고 있었을 게 아닌데···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나는 이신재 사장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수모만 당할 것이다.

아직도 자기가 대기업 임원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장 눈에 고작 직원 50명의 작은 회사는 동네 문방구보다도 못하게 보일 테니까.

정실 전자는 분명히 괜찮은 회사다.

일시적으로 자금 회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뿐이지, 총알만 뒷받침된다면 스몰 자이언츠까지 성장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차라리 내가 투자금을 좀 대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다.

나의 이성은 재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정실의 가치에 대한 내 판단은 서류상의 숫자, 그리고 직관에 의한 것.

하지만 그 예측을 자신할 수 있는 건, 자기 돈으로 사업을 하지 않는 회사원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내 돈이 수십억 이상 들어가게 된다면 그건 또 다른 소리다.

투자는 자선사업이 아니다.

나는 큰돈을 굴려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다.

정말 확실한 소스가 있다면 모를까 섣불리 덤벼들었다 자칫 땔감을 품에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지금 내가 이신재 사장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허울 좋은 인사치레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회사, 좋은 사장님과 연이 닿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저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니에요.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한 대리님이 애써 주신 거 잘 알고 있는데··· 공연히 한 대리님이 시간만 낭비하게 되었으니 내가 미안하죠.”

이 사장은 오히려 내 걱정을 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한 대리님. 그래도요··· 혹시라도 이쪽 업종 관련해서 다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한 번만 더 잘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래 주실 수 있죠?”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인 이신재 사장을 보며 머릿속으로 신중하게 대답을 골라 보았다.

예의상 알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그에게 희망 고문이 되지 않을까 마음이 쓰였다.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입을 닫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이신재 사장에게 인사를 했다.

*

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곱창집 안으로 들어서자 끈적끈적한 냄새가 코안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가게 안에 손님이라곤 우리 영업팀뿐이었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앞에서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혔습니다.”

“쯧. 그러게 내가 그냥 전화로 말하라니까. 고참 말을 들어야지. 그럼 자다가도 떡이 생겨 인마.”

임 차장은 벌써 혀가 반쯤 풀려 있었다.

“대리님. 오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최예리는 임 차장 옆자리에 앉아 그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최예리에게 머리를 끄덕이곤 오 과장 옆에 자리를 잡았다.

“김 주임은요?”

오 과장이 따라준 술을 받아 마시곤, 김영하를 찾았다.

“응, 거래처에서 전화가 와서 받으러 나갔다. 통화가 좀 길어지는 모양이네.”

불판 위의 곱창은 이미 몇 점 남지 않고 차게 식어 있었다.

“한 대리. 배고프지? 남은 게 없어서 어떡하냐. 더 시키자. 대창? 막창?”

“아니에요. 저 괜찮습니다. 과장님 그냥···”

“시키긴 뭘 더 시켜. 지가 늦게 온걸.”

내 말꼬리를 자르며 임 차장이 소리를 꽥 질렀다.

하도 그 모습이 황당해서 왜 저러냐는 뜻으로 오 과장을 바라보았다. 오 과장은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빈 속을 소주 몇 잔으로 채우고 있을 때였다.

“··· 차장님. 그만 하세요.”

오명식 과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차에 내 귀에 거의 우는 듯한 최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최 사원. 내가 손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본다니까.”

“이러지 마세요.”

“가만있어 봐. 이번에 어디 최예리가 정규직이 될지 안 될지 한번 보자고.”

저런··· 개새끼가.

임 차장은 최예리의 한 손을 빼앗아 거의 주물러대다시피 하고 있었다.

최예리가 잡힌 손을 빼보려고 힘을 쓰고 있었지만, 임 차장의 우악스러운 손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최예리가 나와 카톡을 주고받을 때 보냈던 토끼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연약한 생물의 그것과 똑같았다.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피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네 번, 다섯 번이 된다면?

“한 대리. 참아. 술 많이 취해서 저래. 밥도 다 먹었으니까 우리 그냥 일어나자.”

내 뜨거운 눈빛을 본 오 과장이 옷깃을 잡고 흔들며 작게 속삭였다.

대답 없이 소주를 한 잔 더 따르고 벌컥 들이켰다.

소주의 뜨끈함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 온몸으로 퍼졌다.

이번 정실 전자 건만 얼추 마무리되면 회사를 좋게 나가려고 했다.

그 건은 내가 전혀 원치 않던 방향으로 파투가 나버렸다.

그리고 저 인간, 임홍빈.

임 차장의 역겨운 행동에 토악질이 몇 번이나 올라올 것 같아도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다.

더 이상 회사에 남아야 할 명분도, 참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 오늘이었구나.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이.

술잔을 내려놓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바로 그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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