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태상의 자녀들
나와 너무나 닮은 눈을 하고 있는 사람.
생면부지의 사이. 하지만 신부님과 승우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나는 장은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쪽에선 내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눈동자 속에서 나의 시선만을 콕 집어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장은우의 정확한 나이까지는 모르지만 40대 초반 정도로 알고 있다.
과연 그녀가 30대 여성들의 우상이라는 말이 괜한 것 아닌 듯싶었다.
자기관리에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지 피부가 20대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입은 옷은 또 어떤가.
오직 정은우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원피스에 상아색의 심플한 구두.
원피스는 언뜻 보기에도 탄탄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체형을 훌륭하게 잘 살려주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수행원에게 넘기고, 장은우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지점장님. 왜 나와계시지요? 손님들 쇼핑하시는 데 방해되게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안녕하세요. 혹은 고생하십니다.
으레 할 법한 말 대신 장은우의 입에서는 ‘손님’이라는 단어가 가장 앞서 나왔다.
장은우의 웃는 얼굴, 그리고 여유로운 태도와 상반되게 지점장은 새빨개진 얼굴을 하곤 그녀 앞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리에 직원들이 인사를 올리고 싶어 했습니다.”
“인사야 사무실에서 해도 되는걸요. 손님들께서 보시면 오해하시겠습니다. 불필요한 의전은 생략하자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매장들 영업에 지장 없도록 어서 이동하시죠.”
그녀의 말 한마디에 모였던 직원들이 개미 떼 흩어지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셈이 빠른걸.”
장은우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경호원들의 제지에도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장은우를 찍고 있었다.
누군가의 셔터질이 전염병처럼 번져 이제 장은우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덩달아 카메라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SNS로 단 10분이면 수천 개의 ‘좋아요’가 찍히는 시대.
누군가의 액정 화면을 두들기는 짧은 손가락 운동이 모여 여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그 현장 속에서 장은우는 불과 말 몇 마디로 과는 지점장에게 넘기고 공은 자신이 가져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회사의 오너가 자신의 영업장을 방문하는데 나와보지 않을 간 큰 부하직원이 있을까?
진심으로 그녀가 손님들의 사정을 염려했을까?
그랬다면 굳이 일주일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오늘 같은 날, 이런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았겠지.
조용히 말해도 되는 것을 굳이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다분히 작위적인 행동이다.
또각또각━
장은우가 지나가는 길 앞은 홍해처럼 사람들이 갈리고, 그녀는 구두 굽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나와 피로 이어져 있는 자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지나갔다.
*
여기는 청담의 한 라운지 바.
고윤아와 만나기로 한 장소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았고, 지금 이곳이 사람들의 평도 훌륭하기에 예약해두었다.
“손님. 예약하셨습니까?”
“예. 한영수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한영수 님··· 네, 확인되셨습니다. 일행분께서는 먼저 와 계십니다.”
“먼저 와 있다구요?”
시간을 확인해보니 약속 시간보다 15분이나 일렀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로 가자 고윤아의 모습이 보였다.
고윤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일찍 오셨네요.”
“제가 영수 님이 계신 곳으로 갔어야 하는데 멀리까지 나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남색 가디건에 하얀 블라우스.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그녀의 단정한 옷매무새를 보자 봄날의 햇볕에 잘 말렸다가 이쁘게 개어놓은 이불이 떠올랐다.
“식사하시죠. 여기 음식이 술보다 훌륭하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차 가지고 와서 안 마시지만, 변호사님은 괜찮으시면 술도 한잔하셔도 되고요.”
“예.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입니다. 저도 술은 괜찮습니다.”
“그럼 식사는 어떤 거로···”
“저는 리코타 샐러드로 하겠습니다.”
고윤아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먹을 메뉴를 내게 말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지금 먹으면 저녁 식사인데.”
“요즘 체중 조절이 좀 필요한 시기입니다.”
고윤아는 자신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종업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하곤 잠시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보았을 때는 차가운 느낌이 강했던 그녀다.
하지만 오늘 은은한 조명 아래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오늘의 그녀는 단아해 보였다.
물론 일자(一)로 앙다문 입술은 여전했지만.
“일단 이거 받으세요.”
나는 아까 백화점에서 산 선물을 무심하게 내밀었다.
“예? 이게 뭔가요.”
“뇌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돈 문제도 빨리 처리해주셔서 고맙기도 했구요.”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저, 실례가 아니라면 지금 풀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고윤아의 가는 손이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목걸이를 바라보는 그녀가 말이 없는 게, 맘에 드는지 아닌지 영 알 수가 없었다.
“태산 백화점 압구정점에서 샀어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거기서 교환을···”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고윤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에요.”
“요즘 좀 바쁘다고 신경을 못 썼더니 군살이 붙었습니다.”
“따로 운동은 하시고요?”
“시간 날 때마다 필라테스를 하고 있습니다. 테니스도 배우고 있는데 시간이 여의찮아 자주는 못 갑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준비했던 식사가 나왔다.
“영수 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변호사님도요.”
음식과 분위기 모두 만족스러웠다.
차만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와인이라도 한잔 기울여보고 싶을 정도로.
문득, 아까 장은우 회장과의 조우가 떠올랐다.
“아까 백화점에서 장은우 회장을 만났습니다. 시찰이라도 나온 것 같더군요.”
“그렇습니까? 혹시 대화라도 나눠보셨나요?”
“아니요.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변호사님, 물어볼 게 있어요. 제 이복 남매들은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분들은 장 회장님의 유서가 공개되고 나서야 영수 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회장님께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유언을 집행한 이후론 태상과 연이 끊겨 더 이상의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친부, 장 회장의 자식 관계는 이렇다.
오늘 보았던 장은우는 차치하고,
장남 장은수.
태상 그룹의 가장 굵직한 계열사인 태상건설, 태상전자, 태상물산의 회장.
태상의 상징적인 사업인 태상 건설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이다.
차남 장은호.
태상자동차의 회장.
젊어서부터 재벌가의 자제답지 않게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지금도 기업인을 넘어 대중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세계 1위 전기차 브랜드인 테슬*를 5년 내 따라잡겠다는 강한 포부를 숨기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상에 알려진 정보들일 뿐이고, 개인적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고윤아가 입을 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사견임을 감안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장 회장님의 자제분들이라면··· 장은우 회장님은 아마 영수 님에 대해 철저하게 무시하셨을 것 같습니다.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안 하셨을 거예요. 반대로 장은수 회장님은 영수 님의 모든 것을 알아내라고 철저히 지시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장은호 회장님 같은 경우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 태상과는 얽히지 말거라.
나에게 남겼던 편지에 장 회장이 신신당부했던 말이다.
하지만 오늘 장은우와의 조우 때문일까.
무시하기에는 가볍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운명이 결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다는.
“영수 님.”
“예?”
“혹시··· 노파심에 여쭙겠습니다. 신변에 무슨 위협이 있으셨다는지,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셨나요?”
날 바라보는 고윤아의 두 눈동자.
이미 한번 겪어보았다.
내 손을 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라고 말하던 바로 그 눈.
어쩌면 그때 내가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고윤아가 알려준 호흡 덕분이 아니라 그녀의 맑은 눈동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있으면 제게 꼭, 반드시 알려주세요.”
나는 양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것 참 정말 든든합니다. 그나저나 음식은 입에 맞아요?”
“네. 맛있습니다. 영수 님은 괜찮으신지요.”
“확실히 좋네요. 괜히 유명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소고기 먹을 일이 많네요.”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며 말했다.
“변호사님은 훨씬 더 좋은 곳 많이 알고 있고, 자주 다니실 텐데 제가 그런 곳을 잘 몰라서. 그래도 나름 신경 좀 써봤습니다.”
“예?”
고윤아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포크를 다시 내려놓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내 말이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쳐다보았다.
고윤아가 어쩐 일인지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영수 님이 저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통 직장인들에 비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남들보다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기··· 제 앞에서 그런 말은 좀··· 다 아시는 분이.”
“아··· 앗!”
고윤아는 몇 번이고 내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농담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 변호사님을 보면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되는데요.”
“지금이야 생활이 안정되기도 했고, 남들에게 보이는 것도 중요한 직업인지라 나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요? 궁금해지네요. 변호사님의 이야기가.”
고윤아는 대답 없이 샐러드를 좀 더 집어먹었다.
“제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예. 따지고 보면 변호사님은 저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계시잖아요.”
“연락처도, 집 주소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문득 우리의 첫 만남이 생각나 웃음이 쿡 나왔다.
“그러니까요. 그건 반칙이죠. 우리 앞으로도 계속 파트너 관계로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럼 공평해야죠.”
“알겠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지만 영수 님이 듣고 싶으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윤아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저는···”
고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