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5화 (15/200)

15. 52,046,200,000원

[Web 발신 한신 은행]

고객님의 계좌 [110-***-942413]로 52,046,2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대리님. 무슨 일 있으세요?”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고 돌처럼 굳어 멍하니 서 있자, 나와 임 차장 뒤를 따르던 최예리가 다가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 아니야.”

돈이 어디 세상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겠냐마는 분명히 차이는 만들어준다.

그 차이를 만들어줄 황금열쇠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나에게 올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렇게 명백히 숫자로 보이니 느낌이 다르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급체하신 거 아닐까요? 저 가방에 약 있는데···”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우웅―

휴대전화가 또 한 번 울려댔다.

액정화면이 고윤아 변호사라는 글씨를 내보이며 전화의 상대방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 전화 왔네. 예리 씨는 먼저 사무실 들어가.”

나는 휴대전화를 최예리에게 흔들어 보이고선 자리를 피했다. 황급히 발길을 돌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외진 구석에 도착했을 땐 고윤아가 걸어온 전화는 진작에 끊겨 있었다.

통화목록 제일 상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수화음이 채 한 번도 다 울리기 전에 고윤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영수 님. 저 고윤아 변호사입니다. 바쁘십니까? 통화 괜찮으신지요.”

“예.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고윤아.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잠시 그려보았다.

지금도 꼿꼿한 자세와 진중한 얼굴을 하고선 전화를 받고 있겠지.

“입금 확인하셨는지요. 압구정 문산 아파트의 보증금도 같이 갔을 겁니다. 월세 분은 다음 달부터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예. 그렇지 않아도 문자가 와서 혼자 놀라던 중이었습니다. 이거, 기분이 참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요. 빨리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월요일 오전이 막 지났을 뿐인데요.”

“돈의 액수가 워낙 큽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져서 버려지게 되는 이자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수 님에게 손해가 조금이라도 덜 가도록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고윤아의 말은 명료하고 단단했으며, 사리에 맞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과연 옆에 두면 큰 힘이 될 거라는 장 회장의 장담이 괜한 소리는 아니군.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이제야 겨우 마음이 놓입니다. ··· 아, 제가 부동산 관련해서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

“예. 이야기하세요.”

“문산 아파트의 관리 문제입니다. 회장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따로 관리해주시는 공인중개사분이 있으십니다. 매달 월세에서 30만 원은 고정으로 그분께 떼어드렸었습니다. 아파트의 임대와 시설 관리, 관리비 정산 같은 잡무를 도맡으십니다. 만약 영수 님이 원치 않으시면 새로 사람을 구하겠습니다. 아니면 직접 관리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공인중개사법으로 자격이 규정되어 있어 제가 대신해드리긴 어렵습니다.”

와.

잡무처리는 단어 그대로 큰 수고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시설 관리라고 해봐야 세입자가 무언갈 요구하는 건 1년에 두 세 번이 기껏일 것이다.

30만 원이면 거의 내가 예전에 살던 고시원의 한달 치 월세와 거의 맞먹는다.

하기야 빌 게이츠는 길 가다가 100달러짜리 지폐를 줍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엄청난 재산의 부자들에게는 몇십만 원 정도야 그냥 던져주고 시간을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이다.

내 친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하던 대로 두겠습니다. 직접 월세를 받는 건 주변 정리가 좀 된 뒤에 생각해볼게요.”

“예. 공인중개사분 연락처는 통화가 끝나면 바로 문자메시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엄청난 돈이 내 통장에 꽂혔다.

520억.

도대체 0이 몇 개란 말인가.

내 통장에 가장 많은 돈이 모였을 때라고 해봐야 5천만 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전세방을 구하는데 모두 털어 넣었고.

5천만 원은 지금 내가 가진 돈의 1,00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

늘 기아에 시달리던 내 통장이 갑작스러운 폭식으로 배가 터져버릴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큰돈이 한번에 이체가 가능한가요?”

“VIP 전용 계좌는 이체 한도가 없습니다.”

고윤아는 마치 1과 1을 더하면 2가 된다는 간단한 사실을 알려주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언제 한번 뵈어야죠. 식사 한번 하시죠.”

“식사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 응? 뭘 기다려.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그녀가 거기 아직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길 몇 분.

“죄송하지만, 제가 이달 10일에는 재판이 있어 그때까지는 재판 준비로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12일에는 모교에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잠깐, 잠깐만요. 급한 일 아니니 고 변호사님이 바쁘시면 나중에 봐도 됩니다. 시간 나실 때.”

언제 식사 한번 하자.

으레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라도 알겠다고 대답하면 끝인 그 말에 고윤아가 자기의 일정을 나에게 줄줄 욀 줄은 몰랐다.

역시나 엉뚱한 구석이 있는 사람.

“말씀드린 날짜 빼고는 괜찮습니다. 저녁 식사만 하신다면요. 언제가 좋으십니까.”

“···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저녁은 어때요.”

“토요일 좋습니다.”

“그래요. 그럼 토요일 7시쯤에 뵙는 걸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제가 영수 님이 계신 쪽으로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강남 어떠세요. 겸사겸사 압구정에 아파트도 한번 둘러보고 싶어서요.“

“서울 안쪽까지 와 주시면 저야 감사합니다. 그럼 그때···”

“예. 그때 뵙죠.”

*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넷 뱅킹에 접속을 해보았다.

틀림없는 그 액수의 돈이 계좌에 들어차 있었다.

비현실적인 금액.

이게 진짜 돈인지 게임머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수필 은전 한 닢.

여섯 달을 애써 모아 만든 은전 한 닢이 진짜 쓸 수 있는 돈인지 확인을 받으러 다니는 걸인.

그이의 심정이 딱 지금의 내 기분이랄까.

그래. 어디 한번 써보자.

두 눈으로 이게 게임머니 따위가 아니라는 걸 확인해보자.

우선은 내 앞에 남아있는 대출금부터 건드려보았다.

전세자금 대출 원금 전부와 상환 회차가 거의 끝나가고 있던 학자금대출.

둘을 합치면 총액이 2,300만 원가량 되었다.

기존의 내 생활을 기준으로 할 때 절대 작지 않은 돈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한 달에 100만 원씩 적금이라도 붓는다면 이등병이 전역하고 다시 사회 적응을 끝낼 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만질 수 있는 액수다.

그리고 말이 매달 100만 원이지 평범한 직장인이 그만큼 여유를 내기는 어디 쉽던가.

“허.”

하지만 우습게도 이 빚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데는 채 5분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2300이라는 돈을 flex 했건만, 넓은 바다에서 물 한 컵을 뜬 것처럼 통장의 잔고는 여전했다.

그 돈이 빠져나갔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내친김에 이달 치 카드값과 남아있는 할부금까지 싹 다 밀어버렸다.

속 시원한 쾌감과 약간의 허탈함이 섞인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 좋다. 확실히 제대로 된 은전이 맞구나.

당분간 거액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아파트에서 나오는 월세 수익으로만 생활하자.

사고 싶은 것 몇 개쯤은 질러보는 것도 좋겠지.

명품? 아니면 하차감이 기가 막히는 수입차?

그런데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던가?

가지고 있는 명품이라고 해봐야 50만 원 주고 산 구찌 지갑 달랑 하나고, 중고로 구매한 17년식 아반떼도 잘 타고 다니고 있다.

아니야.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들이고 나와 어울리지 않는 세계라고 지레 겁먹고 눈도 안 돌린 거지.

돈도 고이면 죽는다고 했다.

졸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앞으로는 돈을 쓰는 방법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재산세 같은 세금은 어떻게 되는 건가.

나중에 세무사 사무소라도 한 번 찾아가 봐야 하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불쑥불쑥 자기 잘났다고 머리들을 내밀어댔다.

“한 대리 무슨 일 있어?”

이런.

오 과장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휴대폰으로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에는 나도 모르게 땀이 축축하게 고여있었다.

영수야. 너무 들뜨지 말자.

“김 주임.”

“예. 대리님. 저 부르셨어요?”

“지금 바빠?”

“아니요. 황해 실업 납품 건 엑셀 정리하고 있었어요. 30분 안에 끝납니다.”

“그래. 그럼 정실 전자 기업 정보 좀 정리해줄 수 있겠어? 비상장이라 Dart(금감원 전자 공시 시스템)에서는 확인 안 될 거야. SMINFO(중소기업 현황정보 시스템)랑 사설 사이트들 통해서 확인해봐. 한군데서만 파지 말고 교차로 대조해보고.”

“알겠습니다.”

“모레까지 괜찮겠어?”

모니터 옆으로 얼굴을 내민 김영하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알겠어. 나는 LED 램프 수입업체들 단가를 얼마 치고 있는지 확인해볼게.”

차라리 이럴 땐 일이 고맙다.

기계적으로 타자를 치고,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자니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럽던 머릿속이 생각들이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업무에 몰입한 결과 시간은 분과 초를 가르지 않았고, 퇴근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몇 시간을 거북이처럼 목을 내밀고 모니터를 들여다본 탓에 등이 뻐근히 배겨왔다.

우선 중국 쪽 물건은 배제하고 수입업체들의 대략적인 가격과 정실 산업이 구두로 말했던 단가를 비교해보았다.

확실히 정실 산업 쪽이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당장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없더라도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되는 사업이었다.

어깨를 돌려 몸을 풀고 기지개를 쭉 폈다.

내 눈에 휴대전화가 들어왔다.

책상 위의 그 물건은 아까 내가 뒤집어 놓은 채 그대로였다.

별 생각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잠금화면을 풀기도 전에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전화번호.

이런 경우 태반이 쓸모없는 전화지만 영업맨으로서, 또 최근에 큰 사건이 있었던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손가락으로 액정의 초록색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전화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한영수 고객님이 맞으시죠.“

“예. 제가 한영수가 맞습니다만. 어디시죠?”

“저는 한신 은행 동천 지점장 황기욱이라고 합니다. 잠시만 귀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는지요. 통화 괜찮으십니까?”

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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