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무실의 빌런 (2)
“부장님. 오셨습니까.”
나를 포함한 영업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보통 다른 회사들은 부장급이 중간 관리자의 꼭대기에 있다면, 우리 회사는 상무이사가 없어 부장들이 그 자리까지 대행하고 있으니 영업부장은 실무자라기보단 임원에 더 가까웠다.
“응. 우리 영업팀 고생들 많아. 앉아, 다들 앉아요.”
영업부장은 인심 좋은 미소를 띈 채로 우리를 쭉 돌아보고선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표정이 좋은 것은 임홍빈 차장뿐만 아니라 영업부장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사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임 차장이 사무실에서 나가기 전과 들어와서의 분위기가 천지 차이다.
사장 앞에서 마법 같은 묘수라도 부렸던 말인가?
임홍빈 차장에게서 그런 순발력을 기대하기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데···
“영업팀. 없는 살림으로 고생들 많은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뭐 이번 분기 실적이 참 아쉽단 말이야. 오 과장 어떻게 생각해?”
“부장님. 죄송합니다.”
“그래. 일이란 게 그렇단 말이야. 참 열심히 해도 내 마음대로 안 풀릴 때가 있지. 분발하자고. 애들은 잘 크고? 사내 둘이던가?”
“예. 6살이랑 4살 둘입니다.”
영업부장은 안부 인사를 팀원 한 명, 한 명에게 건넸다.
“한영수 대리. 언제봐도 정말 잘 생겼단 말이야. 외모가 좋은 것도 영업사원한테는 큰 장점이야.”
“감사합니다.”
“얼굴뿐이야? 일 잘하는 걸로도 소문이 자자하잖아. 영업팀을 넘어서 우리 회사의 에이스라니까.”
이 양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싶었다.
당연히 그가 못 올 곳을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 세 평짜리 본인의 사무실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성향상 인사치레나 다를 것 없는 안부를 묻자고 영업팀을 찾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아직은 예상할 수 없는.
?
그리고···
우리 팀 모두와 인사를 나눈 영업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업팀은 우리 임 차장 서포팅 좀 열심히 해주자고. 팀장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게 꼭 위에서 당기는 것만 있는 게 아니야. 아래에서도 받쳐주고, 밀어줘야지. 오늘 임 차장이 사장님 앞에서 당차게 새 사업하자고 말하는데 그 열정에 깜짝 놀랐어.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니까.”
“별말씀을요. 다 부장님이 지지해주시는 덕분이죠.”
“임 차장이 착안한 그 LED 라인 증설, 한번 해보자고. 사장님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니까. 괜찮은 업체 미리 봐뒀다고? 아까 거기 업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신 전자요. 전국의 업체를 거의 다 뒤지다시피 해서 찾아냈습니다. 제가 직접 한 대리를 업체에 보내서 간은 한번 찍어 먹어봤습니다.”
“훌륭해. 훌륭하구먼.”
이런 미친···
사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자기 팀원 아이템을 입 싹 닦고 해 먹었구나.
뻔히 내 이름으로 올린 보고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저런 짓을 하다니 간땡이가 큰 건지, 제정신이 아닌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회사도 참 우습다.
보고서 고작 몇 분 읽고 떠든 소리에 혹해 이렇게 손을 들어주다니.
“정실 전자입니다. 정신 전자가 아니고.”
내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임 차장은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헛기침을 큼큼해댔다.
“자, 영업팀 잘 들으세요. 아까 임 차장이 말하길 우리 회사도 남들에게 먹음직스러운 먹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군. 그러려면 남들보다 두세 발은 앞서 나가야 한다고 말이야. 이거 회사원으로서 귀감이 되는 아주 멋진 말 아냐?”
영업부장은 자기가 한 수 배웠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와··· 진짜 대박.”
아이템을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앵무새처럼 대사까지도 그대로 복사해 붙여버리는 임 차장의 뻔뻔함에 기겁한 김영하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김 주임. 지금 뭐라고 했지?”
“아, 아닙니다.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 부장님.”
아차 싶었던 김영하가 얼른 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부장님. 요즘 젊은 친구들이 저렇게 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습니다. 저도 팀장 계급장은 내려놓은지 오래입니다. 우리 팀원들이랑 호형호제만 안 할 뿐이지 하나같이 격의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사장실에서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는지 임홍빈 차장의 혀에는 구리스가 잔뜩 발라져 있었다.
“그래. 그래야 또 서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지. 자, 그럼 나는 이만 나가볼까? 다 같이 파이팅 한 번 하자고. 영업팀 파이팅!”
영업부장의 파이팅 구호에 따라 팀원들은 힘없이 주먹을 흔들었다.
영업부장이 나간 뒤, 사무실에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냉랭한 분위기에 돌을 던진 것은 의자를 잔뜩 뒤로 젖히고 앉아있던 임 차장의 입이었다.
“자, 다들 부장님 말씀 들었지? LED건 한 대리가 맡아서 한번 해봐. 알겠지? 일단 업체 만나서 분기별로 수량 얼마나 뽑을 수 있는지, 단가는 얼마 쳐줄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
“이봐, 한 대리. 내 말 못 들었어?”
“차장님. 저 말고 김 주임에게 한번 맡겨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김 주임이 지금 하는 잡무는 제가 받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감정 없이 메마른 얼굴의 나와 달리 임 차장의 입술이 사정없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이봐, 한 대리. 지금 내가 자기 것 아이템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심술내는 거냐고. 인마, 같은 팀 안에서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다 우리 일이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임 차장은 멋대로 내 생각을 부풀려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이 짜증 나지 않을 수가.
임 차장의 뻔뻔한 낯짝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미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지금 내가 사업 아이템에 미련이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나 대신 김영하를 추천한 건 단순히 김 주임의 대리 승진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사장이 직접 관심을 드러냈다고 하니까.
그리고 뭣보다 언제 회사를 나갈지도 모르는데 새 사업을 맡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일하면서 네 것, 내 것 따진 적 없습니다. 이제 김 주임한테도 힘을 실어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야. 이제 한 팀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 진짜 대단하세요. 그걸 네가 왜 결정하세요. 니가 팀장이야? 네가 맡아서 해. 김 주임은 한 대리 서포트하고.”
저 새끼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욕설이 치고 올라왔다.
저거 지금 당장 들이 받아버려?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당분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루틴을 유지하겠다는 내 결심을 불과 반나절 만에 흔들리게 만들다니.
나는 '참을 인' 자를 계속해서 마음에 새기며 화를 억눌렀다.
영수야. 나가더라도 모양새 좋게 그만두자.
어차피 얼마 뒤면 볼 일 없는 인간이다.
그때 컴퓨터의 메신저 창이 깜빡거렸다.
- 와, 오늘 꼰대력 미터기 폭발하네요. 선배님, 임 차장 진짜 양심에 털이 수북하게 났나 봐요. 아니, 우리가 다 들었는데 어떻게 저러지?
김영하였다.
- 내버려 둬. 그나저나 LED 램프 이거 괜찮아. 내가 정실 전자 사장 만나봤는데 앉아서 사인만 하는 스타일 아니더라고. 오히려 기술자에 가깝더라. 임 차장 말은 신경 쓰지 말고 나는 옆에서 도울 테니까 맘껏 한번 휘둘러봐. 공은 네가 다 가져가고.
- 선배님··· 아니, 영수 형.
- 왜.
- 저 대리 달라고 지금 밀어주시는 거죠? 진짜로 형한테는 영원히 충성입니다.
임 차장이 괘씸해서 새 사업을 맡아만 두었다가 다 던져버리고 나갈까 잠시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은 사람들은 뭐가 되겠는가.
김 주임을 앞에 세우고 옆에서 돕는 모양새라면 내 자리가 비더라도 그 공백이 크지 않을 것이다.
- 고마울 것 없어. 너도 이제 잘하잖아. 앞으론 오 과장님이랑 네가 중심이 되어서 일해야지.
- 에? 뭐야. 선배님 꼭 어디 갈 사람처럼 말하네요.
아차. 나도 모르게 그만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 가긴 어딜. 너도 이제 전면에 나서서 일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
김영하는 컴퓨터 밖으로 고개를 삐쭉 내밀더니 잠시 내 얼굴을 살폈다.
- 선배님 혹시 이직 준비하는 거 아니죠? 넘어갈 거면 같이 가요. 저도 정보 좀 주세요.
- 그런 거 아냐. 너 잡고 있는 일, 마무리하는데 일주일 주면 되겠어? 다음 주쯤에 업체 다녀오자. 밑그림은 내가 그려놓을게.
- 알겠습니다.
*
이래저래 정신없었던 오전 일과가 끝나고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야, 한 대리야.”
이쑤시개를 입으로 우물대면서 나에게 다가온 임 차장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어휴, 몸 딴딴한 거 봐. 아주 돌덩이네 돌덩이야.”
“왜 그러세요.”
“이런 무뚝뚝한 자식. 야, 아까 형이 한 소리 했다고 섭섭한 거 아니지?”
“그런 거 없습니다.”
“야. 내가 너 멕일라고 이름 빼고 말한 거 아니야. 생각해봐라. 나랑 사장님이랑 가까운 사이인 거 알고 있잖아. 내 이름 달고 들어가는 게 먹히겠냐, 너 이름이 먹히겠냐.”
“괜찮습니다. 저 아무 생각 없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번 일만 잘되어봐라. 너 과장 안달 거야? 설마 형이 모른 척할까. 그리고 말이야···”
임 차장은 내 대꾸가 있건 없건 혼자 구구절절한 변명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 사연의 애절함이 울고 넘는 박달재 못지않았다.
그가 나를 붙잡고 이러는 이유는 뻔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게 미안해서도 아니고 마음을 풀어주기 위함도 아니다.
요컨대 절대 나를 생각해주는 게 아니라는거다.
그저 본인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지금 영업팀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모두 내고 있으니까.
제 딴에는 지금 뭐 당근과 채찍으로 사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 그래서 그런 거야. 형도 다 생각이 있지. 혹시나 서운한 마음 가지지 말고.”
“차장님.”
”응?“
”잇몸에서 피납니다.“
열심히 입을 터는 동안 이쑤시개를 계속해서 질겅질겅 씹어대더니 임 차장의 커다란 앞니에는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뭐야, 에이. 아무튼 한 대리, 이번 건 잘해보라고. 업체 만나면 사정 봐주지 말고 쥐어짜.”
임 차장은 이 말을 남기고 때마침 눈앞에 있던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때였다.
우웅━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가 힘차게 진동을 토해냈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있었다.
[Web 발신 한신 은행]
고객님의 계좌 [110-***-942413]로 52,046,2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아아.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임 차장 따위는 완전히 잊혀졌다.
52,046,2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