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무실의 빌런 (1)
“한 대리!”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인사팀의 김정인 대리.
내 입사 동기이자 4살 터울의 형. 얼마 전 김영하 주임이 술자리에서 말했던, 과장 진급을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그다.
“형. 출근했어요?”
“응. 주말 잘 보냈냐? 난 공 좀 치고 왔다고 허리가 뻐근하다 야.”
김정인 대리는 빈손으로 골프 스윙 동작을 흉내 내며 말했다.
“형, 요즘 골프도 쳐요?”
“응. 연습장 다니다가 머리 올린 지 얼마 안 됐어. 이번 주말에는 경영지원 차 부장님 모시고 필드 다녀왔지. 우리 팀장님이랑 재무팀장님도 계셨고.”
김 대리는 내가 묻지도 않은 일을 속사포처럼 재잘거렸다.
김정인 대리는 회사에서 항상 일보다는 정치 게임에 관심이 많은 부류였다.
누가 누구 줄을 잡고 있고, 이번 승진은 누가 되고···
조금 우스운 것은 그렇게 회사의 권력관계에 빠삭하다는 그가 정작 본인의 승진은 나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뻔했다.
잠재적으로 과장 승진에 있어 경쟁자가 될 나에게 자기는 이만큼 앞서나가고 있다고 위력을 과시하는 것.
근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중식 모터스의 과장 자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만큼이나 나의 관심 밖인걸.
지금 내 눈에는 김 대리가 소중한 주말을 그저 상사들의 뒷수발로 낭비해 버린 걸로만 보였다.
“정인이 형. 이번에 과장 꼭 달아요. 응원할게요. 파이팅.”
“어···? 그, 그래. 고맙다.”
내가 오히려 여유롭게 응원을 해주자 머쓱해지기라도 한 건지 김 대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팀 인원 언제 충원해줄 거예요?”
“아, 그거.”
김정인 대리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곤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우리 팀장이 너희 팀장, 임 차장을 엄청나게 씹잖아.”
“아니, 둘이 사이 안 좋은 건 그거고. 밑에 우리는 무슨 죕니까.”
“팀장 잘못 만난 죄지 뭐. 이건 비밀인데, 임 차장이 협력업체한테 뒷돈 받고 수익률 높게 잡아준다는 소문도 있어. 뭐, 사장 빽 아니었으면 진작 잘렸어도 안 이상하다고 하더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소리가 괜히 나올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라도 새는 법이다.
“그게 진짜면 감사실에서 나와서 임 차장 한 번 뒤집어 까던지.”
“감사실 그거 뭐 퇴직 앞둔 노인네 하나 앉아있는 데 의미가 있나. 아무튼 오늘 우리 회의하면 너희 팀 인원 충원은 내가 한 번 더 이야기할게. 형만 믿고 있어라. 나 먼저 간다.”
김 대리는 공수표를 남발하곤 나를 앞서 회사안으로 들어갔다.
*
“예리 씨. 일찍 왔네?”
“대리님 오셨어요?”
사무실로 들어서자 최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응. 다른 사람들은?”
“주임님은 방금 담배 피운다고 나가셨고, 과장님이랑 차장님은 아직 출근 전이셔요.”
“그렇구나. 주말 잘 보냈어?”
“네. 푹 쉬었죠. 대리님은 다녀오신다는 곳은 잘 다녀오셨어요?”
“응. 그랬지.”
나는 내 책상으로 가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저··· 대리님.”
“응? 예리 씨, 왜?”
“혹시 그 영화 보셨어요? 협동 수사 2편요.”
“아, 그 영화 재밌다고 하던데. 난 아직 안 봤어. 개봉한 지 한 달 되지 않았나?”
“저 그럼 혹시···”
그때였다.
“넌 담배 좀 끊어라.”
“과장님도 참. 저 그렇지 않아도 이제 연초 안 피려고 아이코스 새로 샀어요.”
“야, 그건 담배 아니냐?”
사무실 문을 열고 오 과장과 김영하가 들어왔다.
“과장님, 오셨어요?”
“어. 한 대리 왔어?”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 안에서까지 시답잖은 이야기로 잠시 툭탁대던 오명식 과장과 김영하는 의자를 끌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예리 씨, 나한테 뭐 할 말 있었던 거 아니야?”
“앗. 아···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월요일.
주말의 나른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회의들로 오전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는 날.
그런데 곧 있을 팀장급 회의에 참석해야 할 임홍빈 차장이 어쩐 일인지 8시 40분이 지나도록 사무실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예리 씨. 차장님한테 연락 없었어?”
“예. 과장님, 연락 없으셨어요.”
“아니, 월요일에 회의 있는 거 잘 아시면서··· 전화 한번 해봐.”
“예.”
- 내가 최 사원한테 어딘지 보고를 해야 해? 됐고, 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최 사원이 소회의실로 회의서류 챙겨서 나와 있어.
최예리가 전화를 걸자 임 차장은 뭘 잘했다고 큰 소리로 짜증부터 내었다.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서 사무실에 울려 퍼지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예리는 혹여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더 떨어질까 얼른 이것저것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 꼴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조만간이 될 것이다. 내가 회사를 나가는 날은.
다만 당분간은 일상의 리듬을 깨지 않기로 했다.
급할 것 없다.
로또라든지,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고 나서 인생이 오히려 망가졌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직 남은 삶은 길다.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미래를 준비하리라.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자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30대에 파이어족. 얼마가 필요할까?’
예전이었다면 파이어 ‘족’같은 소리 하네 하며 지나쳤겠지만,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기사로 마우스 커서가 향했다.
기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30대 말에서 40대 초에 퇴사해서 남은 생을 여유롭게 살려면 대략 30억 정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선배님. 뭐 봐요?”
모니터에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보니 김영하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응. 그냥.”
“뭐야, 파이어족? 에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은퇴하려면 코인 말고는 답 있나.”
“그러게. 기사보니, 인터뷰한 사람들도 죄다 코인으로 떼돈 벌은 사람들이네.”
“어디 봐요. 30억? 이걸로 되겠어. 요거 가지고 평생 놀기에는 모자라죠.”
“그럼 네 생각에는 얼마 정도 있어야 할 거 같아?”
“음··· 100억쯤?”
“왜 하필 100억인데.”
“뭐, 집도 사고 차도 한 대 사고··· 나중에 결혼하고 애들 교육도 시키고··· 하고 싶은 대로 살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몰라요. 그냥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큰돈이야.”
나는 빙그레 웃으며 김영하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김 주임, 코인으로 꼭 100억 벌어라.”
“으. 코인 이제 진짜 지긋지긋합니다. 100억은 됐고, 전 진짜 원금만 찾으면 다 뺍니다.”
잠깐의 잡담을 끝내고 업무 준비를 위해 손을 풀고 있을 때였다.
쾅━
사무실 문을 걷어차다시피 하며 임홍빈 차장이 들어섰다.
“차장님 오셨어요.”
그는 팀원들의 인사를 들은 체 만 체였다.
“유 차장, 개새끼··· 어디서 건방을 떨어.”
팀장 회의에서 뭔 문제라도 있었는지 임 차장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오늘도 사무실 분위기 참 가족 같겠군.
“오 과장님.”
“예. 차장님.”
“우리 팀 4/4분기 성과 가지고 말들이 참 많네. 사장님이 직접 대책 보고 들으시겠대. 부장님이랑 같이 올라가 봐야 하니까, 빨리 쓸만한 아이템 묻어놨던 거 있으면 좀 찾아봐요.”
“아··· 예.”
“다들 잘 좀 합시다. 제발 좀! 이래서야 내가 사장님 뵐 면목이 없어.”
임 차장은 계속 혼자 씨부렁거리며 제 책상에 높게 쌓여있는 서류철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펄럭대더니 뭘 발견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는 서류 한 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 대리.”
“예?”
왜 또 날 부르는지.
“너 이리로 와봐.”
내가 다가가자 임 차장은 자신이 열심히 보던 페이퍼를 쓱 내밀었다.
“이거 되는 거 맞아?”
뭔가 해서 살펴보니 내가 올렸던 기획안이었다.
그것도 무려 네달 전에.
앞으로 자동차 전조등으로 LED 램프가 많이 사용될 것으로 예상되니 라인 증설과 협력업체 확보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당시 임 차장은 나중에 한번 보겠다는 미온적인 반응이었는데, 그게 지금이 된 것이다.
“LED 램프는 단가도 세잖아. 할로겐이나 HID 쓰지 아직 LED는 수요가 적은데, 이게 수익이 있겠어?”
“앞으로 전기차가 늘어나면서 헤드램프에 전기효율이 좋은 LED가 대세가 될 겁니다. 보고서에 예상 수치도 적어놨고요.”
“··· 그래?”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뭔데.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
“나라에서 이 사업을 대기업이 건들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놨습니다. 해서 램프가 중소업체에서만 나오는데, 오히려 외국 기업의 자본과 물량에 밀려서 생산 기업들이 고사 될 수준입니다. 전국에 업체가 많지도 않은데, 심지어 몇 년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임 차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뭔데. 된다는 거야, 안된다는 거야.”
“기획안 만들 때 여러 업체에 연락을 돌려봤습니다. 그러다가 정실 전기라는 곳과 미팅을 해봤었는데 회사 규모는 작지만 구력은 있습니다.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겠지만, 본인들이 일본 쪽만큼 기술력이 있다고 자신하더라고요. 단가는 중국 물건만큼은 나오지 않겠지만 합리적인 수준으로 보였구요.”
“너 뭐 거기서 받아먹은 거 있는 거 아니지?”
말문이 막힌다.
제발 너나 잘하세요.
쪽팔리게 남의 집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나 말고.
“··· 비단 전기차뿐만 아니라, 자동차 시장이 이제 중저가 차량도 고급화 전략을 쓰고 있는데, LED 램프 수요가 느는 것은 쉽게 예측 가능합니다. 남들보다 앞서 준비해야죠. 원청업체에 우리 회사가 먹음직스럽게 보여야 할 것 아닙니까.”
임 차장의 쓸데없는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난 내 할 말만 했다.
“그래? 일단 알았어. 오 과장님. 나 사장실 다녀올 테니까, 애들 데리고 우리 회의 좀 준비하고 계세요.”
임 차장은 서류철을 챙기더니 사무실 밖으로 헐레벌떡 나가버렸다.
“살벌하다. 살벌해. 오늘 하루도 쉽지 않겠네.”
임홍빈 차장이 나가자 김영하가 작게 한마디 했다.
“자, 소나기는 피해가야지. 이따 회의 때 말할 아이템 하나씩 생각해봐. 한 대리는 차장님이 그 LED 건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으니까 그거 더 파보고. 예리 씨는 작년이랑 올해 영업팀 실적 좀 뽑아놔 줘요.”
오 과장의 업무지시에 따라 우리는 각자 준비를 시작했다.
키보드 치는 소리와 프린트를 출력하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말이 대책 회의지, 사실 사장은 그냥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무슨 회의네 하며 이름을 붙이곤 했다.
회사의 체계는 형편없는데 사장은 아직도 대기업 임원이던 시절의 습성만 그대로 남아있었다.
백날 회의를 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회사의 기조는 언제나 도전보다는 안정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왠 걸?
내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사무실로 임 차장이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직속 상사인 영업부장도 함께였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임홍빈 차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사무실의 빌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