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차호영 신부님 (2)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자애 보육원.
새천년을 코앞에 두고 낙관적인 기대와 뜬소문 같은 두려움이 뒤섞여 세상이 뒤숭숭하던 때였다.
“영수야. 너 또 여기 있었구나. 좀 있으면 식사 시간이다. 밥 먹어야지.”
“신부님.”
차호영 신부는 어린 영수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수가 고개를 들어 맑은 눈으로 차 신부를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 지어진 자애 보육원.
영수는 보육원의 입구 앞에 서서 낮은 언덕의 저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었니?”
일부로 묻지 않아도 뻔히 영수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알고 있는 차호영 신부였다.
오늘도 나타나지 않을 자신의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는 가여운 영수.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냥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제 발 앞에 있던 돌멩이를 발끝으로 툭 쳤다.
돌멩이는 영수가 찬 방향을 따라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얼마간 굴러떨어졌다.
영수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이제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녀석이 속이 깊긴 참 깊었다.
한창 떼를 써도 모자랄 나이에 제 슬픔을 어설프게나마 감출 줄 알았다.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차호영 신부에게 있어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소중한 존재였다. 누구 하나 사랑으로 아끼지 않는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차 신부에게 있어 영수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특별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보통 보육원에 오는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야 5살 내외였다. 하지만 이 아이 한영수는 갓난아이 때 신부의 품 안으로 찾아왔다.
처음 보육원 입구에서 영수를 발견했을 때 차호영 신부는 많은 고민을 했다.
여기서 이제 갓 유치가 2개 올라오기 시작한 이 어린 것을 맡을 수 있을까.
다른 시설로 보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이곳저곳 전화를 돌려보아도 부모의 이름조차 모르는 영아를 선뜻 받아들이겠다는 시설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리라.’
차호영 신부는 결국 자신이 영수를 책임지기로 다짐을 했다.
분유를 타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밤을 새우고.
아이들을 돌보는 데야 이력이 난 차호영 신부였지만,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를 육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영수가 두 발로 처음 걸음을 떼던 날, 신부는 벅찬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자식을 키운다는 게 이런 기분이겠구나.’
차호영 신부는 영수를 만나게 된 것을, 원래라면 자신이 알 수 없었을 것을 알게 해 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차 신부가 노력해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종종 영수의 얼굴에 지곤 하던 그늘.
6살 때인가 딱 한 번 왜 자기는 아빠, 엄마가 없냐고 물었을 뿐이다.
차 신부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이자 그 이후로 영수는 단 한 번도 신부 앞에서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숨어 우는 아이를 몇 번이나 보곤 했다.
속 깊은 차호영 신부가 영수의 마음속 아픔을 모를 리 없었다.
“영수야. 해가 지는 게 참 보기 좋지?”
“네. 색깔이 예뻐요.”
“그래. 이 언덕 위가 해가 지는 게 참 보기 좋지. 신부님이 여기에 보육원을 지은 이유가 뭔지 아니?”
“아니요.”
“보육원을 세우려고 전국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었단다. 그러다 여기에 오게 되었어. 이 언덕 위에서 지는 해를 봤단다. 그때도 지금처럼 정말 아름다웠지. 하느님이 신부님에게 말을 거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 바로 여기로구나.”
“맞아요. 사실은 저 여기서 해지는 것 보고 있었어요. 저녁 먹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었어요.”
영수의 하얀 거짓말.
신부는 마음이 아파왔다.
“영수야.”
차 신부는 무릎을 굽히고 영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이 비밀 하나만 만들까?”
“비밀요?”
갑작스러운 차호영 신부의 제안에 영수의 잘생긴 눈이 온 세상을 모두 담기라도 할 듯이 커졌다.
“그래. 우리 둘만의 비밀.”
영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수야. 너만 세상에서 부모님이 없다고 생각하지?”
“...”
“영수야.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이 신부님이 영수 너의 아빠라고 생각하거라.“
신부로서는 해서는 안 될 불경스러운 말.
하지만 차 신부는 하느님도 이 정도는 눈감아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예? 하지만 신부님이 항상 저한테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이건 하느님께도 비밀로 하자꾸나.”
*
“그래서 부모님은 만나봤느냐?”
“아니요.”
“왜? 그분들이 널 만나길 거부하던? 아니면 네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냐.”
“두 분 모두···”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두 분 다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요.“
내 말을 들은 신부님은 다시 한번 성호를 그으셨다.
“그랬구나. 그랬어.”
신부님은 두 손을 깍지 껴 모으곤 눈을 감으셨다.
내 부모님의 영면을 비는 기도를 올리고 있으시리라.
기도를 마친 신부님은 내 걱정이 먼저였다.
“두렵구나. 네 마음에 있던 상처를 괜히 들쑤시는 일이 되었을까 봐.”
“어제 알게 된 일이에요.”
“그래? 나랑 전화 통화 할 때 누가 찾아왔다더니, 그 사람이···”
“예. 사실 많이 혼란스러워요. 신부님이 하신 말씀처럼 이젠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뭐라고 말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분 중 누구라도 살아계실 때 너와 만나 그 앙금을 조금이라도 풀었다면 좋았을 것을···”
신부님. 제가 장영복 회장의 자식이랍니다.
저희 어머니는 절 낳자마자 돌아가셨고요.
고민 끝에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신부님께 털어놓지 않기로 했다.
신부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을 꼽는다면 그건 바로 신부님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나를 걱정하시는 분.
만약 신부님이 이 충격적인 진실에 대해 알게 되면 며칠 밤이고 잠을 이루지 못하실 것이 눈에 선했다.
신부님에게 더 이상의 번뇌를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도, 몰랐어도 저에겐 한이 되었을 일이에요. 그럴 거면 차라리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신부님.”
신부님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곤, 힘을 주어 잡았다.
“영수야.”
“예. 신부님 말씀하세요.”
“우리같이 해 지는 것을 보러 가지 않으련?”
*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신나게 공을 차던 아이들이 그새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부님과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나이를 드신 만큼 신부님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어때요. 속 썩이는 녀석은 없어요?”
“애들이야 원래 말썽 피우는 게 저들의 할 일 아니더냐. 다 착한 아이들이야.”
“신부님.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
“허허, 아직도 내 눈엔 네가 꼬맹이이던 그때로 보여. 너에게 부탁할 일 없다. 너만 잘 살면 그만이래도.”
“이제 몇 년 있으면 일흔이세요. 이제는 원로시라고요. 슬슬 은퇴 준비를 하셔야죠.”
“아직은 더 할 수 있다. 아니, 할 수 있는 만큼은 버티고 싶어. 하느님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신부님과 함께 보육원 입구에 섰다.
“영수야. 기억나니? 언젠가 여기서 같이 지는 해를 보며 이 신부님이 너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했지.”
“그럼요.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지금도 그때처럼 해가 지고 있구나. 녀석, 난 네가 둘이 있을 때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응석이라도 부리면 다 받아줄 생각이었는데 넌 한 번도 그러지 않았지.”
“다른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질투하겠어요. 그래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우리 둘은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 네가 사제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예? 신부님이 되라고요? 그런 말씀 한 번도 저에게 하신 적이 없잖아요.”
“그냥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바램이었으니까. 어찌 내가 마음대로 네 장래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
“이야기하시지 그랬어요. 신부님 말씀이었으면 저도 한 번쯤은 고민해봤을 텐데.”
“실없는 농담은.”
장난스러운 내 말에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네가 신부가 되었어 봐라. 세상의 여자들이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겠느냐. 우리 영수가 좀 잘생겼니.“
”아이고, 신부님 그런 불경스러운 말씀을 또.“
”네 말마따나 나는 이제 은퇴 사제관에 들어갈 나이 아니냐. 이 정도쯤은 하느님도 용서해주셔야지.“
친구처럼 장난을 치던 신부님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까 봐 늘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어쩌면 사제의 길을 걷는 것이 너에게 있어 하나의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신부님···”
“그래도 이제 한편으론 마음이 놓인다. 어찌 되었건 너의 뿌리를 알게 된 것 아니냐. 내가 왜 너의 이름을 영수라고 지었는지 아느냐?”
내 이름 영수.
정말로 촌스러운 이름.
“말씀 해 주신 적이 없으니 모르죠. 사실 왜 하필이면 이런 이름인가 속으로 신부님 원망한 적도 있었거든요.”
“녀석···”
“그럼 말해주세요. 왜 제 이름을 영수라고 지어주신 건가요.”
“많은 이름을 고민했었지.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불릴 것이니까. 그런데 영수 널 보육원 앞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가 생각나더구나. 남들과 다르게 인생을 시작하는 네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게 되길 바랐다. 그래서 영수라고 지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이름으로.“
“...“
나는 신부님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신부님. 이제 저 진짜 시간이 아주 많이 생길 것 같거든요. 자주 올게요. 정말로···”
“그래. 그래. 우리 자주 보자꾸나.”
내 친부는 나에게 물질을 남겼고 신부님은 정신을 주셨다.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꼭 잡아두겠다고.
그래서 반드시 행복해지겠다고.
내 인생은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늦었다. 영수야, 저녁 먹고 가라.”
“반찬이 뭔지 들어보고요. 고기 없으면 안 먹을래요.”
하하하━
신부님의 파안대소.
“생전 안 하던 반찬 투정을 서른 넘어서 하는구나. 오냐, 너 온다고 해서 아주 잔칫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놨다. 가서 동생들이랑 같이 먹자. 우리 아이들 배곯는다.”
사무실의 빌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