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편지
네가 이 편지를 받았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것이다.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래.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
네가 동의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으나 아들이라고 부르겠다.
올해로 네가 벌써 32살이겠구나.
시간은 유수와 같다더니 무력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면 그저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질 뿐이다.
날 증오하느냐?
네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을 느낄지는 나로서는 이젠 영영 알 수 없게 되었겠구나.
나는 요즘 내 앞이 임박해온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시대와 환경의 도움을 받아 한 개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감히 모두 이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높은 성을 쌓았고, 그 성을 굳건히 지켰다고 자부한다.
설령 오늘 잠들어 내일 눈 뜨지 못한다고 해도 미련은 없다.
다만,
나의 역사에 단 하나 마음의 큰 점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의 어머니이다.
우선 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네 어머니의 이름은 강은미.
89년도의 여름에 나와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재일교포 2세로 오사카 출신의 27살 대학원생이었다.
나는 당시에 출장차 일본을 방문했었다. 내가 공을 들여 시작하려던 자동차 사업의 기술 협약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지 사업가들의 만남에서 통역을 해주기로 했던 자가 무슨 연유인지 나타나지 않았고, 급하게 대타로 찾은 것이 네 어머니였다.
운명이 있다고 믿느냐?
나는 있다고 믿는다.
내가 모두가 반대했던 새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날 그 통역 담당자가 펑크를 내지 않았다면.
하필이면 네 어머니가 미팅 장소 인근의 대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마치 모든 것이 네 어머니와 나를 만나게 하도록 짜인 각본 같다고 생각했다.
너도 성인이니 알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예측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것인지를.
우연한 만남이 불씨가 되어 나와 네 어머니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직원을 수만 명 거느린 거대기업의 총수였고, 무엇보다도 한 가족의 가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네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40대의 나는 그 어떤 시기보다 정력적으로 일했지만, 동시에 고독했다.
겨우 이것인가.
이게 인생의 정점인가.
허무가 서서히 내 인생을 좀먹고 있었다.
그런 내 인생을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네 어머니다.
네 어머니는 이 외로운 인간을 거대한 기업의 회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남자로 바라봐주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구나.
네 어머니의 환한 미소.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날 사랑한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만 세상이 제 색깔을 되찾았었다.
고백하건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네 어머니와 함께 보낸 순간만이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네 어머니의 뱃속에 네가 자리 잡게 되었다.
네 어머니의 의사는 강력했다.
아이를 낳을 거라고.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키울지언정 반드시 낳아 키울 거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돈으로 그녀를 회유해보려고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차마 네 어머니에게 그런 더러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자, 내 인생의 소중한 한 토막에 스스로 침을 뱉는 행동이었으니까.
네 어머니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단 한 번만 태어날 아이를 안아달라고.
배 속의 아이가 아버지의 고향에서 태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면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어쩌겠느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가 태어나던 날.
나와 너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0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너를 낳은 네 어머니는 마치 생의 소명을 다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갓 태어난 너를 안고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그저 멍하게 서 있었다.
아들아.
네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너는 결코 실수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했고, 그 결실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럼 이제 너는 묻고 싶겠지.
그 사랑이 남긴 흔적을, 너를 왜 버렸냐고.
너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버려야 할 수많은 이유가 많았다.
대부분은 세상의 시선에서 기인한 이유지만 사실 그까짓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제 진짜 이유를 고백하려고 한다.
이 고백은 누구도 들은 적이 없으며 오직 내 마음속에만 숨겨두었던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고 부끄러운 결정이었다.
나는 네가 미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양수가 덜 닦인 축축한 손을 꼼지락거리는 네가 미웠다.
나에게 있어 겨우 발견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앗아가게 만든 네가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였다.
그래서 그랬다.
나는 항상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자리에 있었다.
널 외면하겠다는 결정이 죄악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했다.
도저히 네 얼굴을 옆에 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아들아, 너에게 용서를 구걸하진 않겠다.
만약 내가 죽고 난 뒤에 누군가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큰 벌을 받을 각오도 되어있다.
난 이제 내 삶에서 두 번째로 비겁한 결정을 하려고 한다.
너에게 부탁을 하나만 하마.
오직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죽고 난 후에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태상은 수많은 톱니바퀴에 의해 여전히 잘 돌아갈 것이며,
나는 매년 명절마다 가장 화려한 제사상을 받게 되겠지.
하지만 단 하나.
내가 죽고 나면 이제 세상에는 더는 네 어머니를 기억할 사람이 없어진다.
그래서는 안된다.
너에게 내 기억을 유산으로 남긴다.
네가 태어난 날은 2월 13일이다.
그리고 그날은 동시에 네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하다.
부디 1년에 한 번이라도 네 어머니를 기억해다오.
사진 한 장을 동봉해 보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네 어머니의 사진이다.
소중히 간직하리라 믿는다.
멀리서 네게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한다.
아래는 사족이라도 생각해도 좋다.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조금만 찾아보면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너도 쉽게 알 수 있겠지.
내가 너에게 남기는 것이 그것에 비하면 너무 하찮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으냐?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
분명 너는 용인을 받게 되겠지. 네가 내 아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걸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태상의 변호사들은 한결같이 유능하며, 또 간교하다.
네가 그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것보다 더 염려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랴?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너에게 떼어주어야 할 유산보다 훨씬, 아주 작은 비용과 수고로도 네 입을 다물 수 있게 만들 수백 가지 방법이 있다.
내 나름대로 오랜 고민 끝에 남기는 돈이다.
차라리 그쯤 떼어주고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 들게 할 딱 그만큼의.
이것이 너에 대한 사죄의 의미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네 한 많았을 세월을 어찌 돈으로 보상할 수 있겠느냐.
다만,
앞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살기에는 부족한 액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거라.
태상과는 네가 얽히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자식들이자, 너와는 배다른 형제들은 모두 제각기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너는 여린 양과 다를 것이 없어서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큰아이는 젊은 시절 나의 비정함만을 쏙 빼다 닮았다.
욕심이 많고, 그 욕심을 다스릴 만큼의 역량도 갖추고 있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접근하지 말거라.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아파트는 오래전에 너와 네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두었다.
비록 남들 앞에서 당당히 가족이라고 말하지 못하더라도, 너와 네 어머니를 내 손이 닿는 곳에 두고 돌보고 싶었다.
원래 네 어머니의 것이니 늦게나마 가졌어야 할 사람에게 올바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고윤아 변호사는 영민하고 능력 있는 아이다.
말년의 나에겐 말벗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진 내 안목에 기대볼 때, 믿어도 좋은 사람이다.
네게 큰 힘이 될 터이니 옆에 두거라.
이 정도면 내가 너에게 해야 할 말은 모두 했을까?
아니, 꼭 해야 할 말을 잊었구나.
아들아.
미안하다.
한순간의 치기가 너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하고 싶다.
이 비겁한 아비는 잊어도 좋다.
아니, 무슨 염치로 네게 아버지라 불리기를 바라겠느냐.
네 어머니는 아무 죄가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잘못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부디 어머니를 잊지 말아다오.
*
날 닮은 여자.
그래, 사실 어머니의 사진을 볼 때부터 이미 눈시울이 시큰했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나자,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 사람이었구나.
자신의 생명으로 내게 세상을 열어준 사람.
누구에게나 고향과 같은 어머니라는 이름. 드디어 나도 그 이름을 가지게 되어서 기뻤다.
지금 이 순간만은 머릿속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큰돈이 잊혀질 정도였다.
이제 더는 나를 낳아준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 너는 실수가 아니다.
장 회장이 힘주어 쓴 이 문장.
32년간 내 심장에 박혀있던 못이 쑥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고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여보세요.”
통화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 전에 고윤아는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저 한영수입니다.”
“··· 목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잠깐동안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고윤아 쪽이었다.
“원하시던 답은 찾으셨습니까?”
“예. 제가 꼭 받아야 했을 것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진심으로요.”
“고 변호사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해주세요.”
“내일 장 회장님의 발인에 참석하십니까.”
“예.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죠.”
꿀꺽━
나는 마른침을 목으로 넘겼다.
내 아버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
그가 나에게 편지로써 길을 열었고, 나는 고 변호사를 통해 답을 보내려고 한다.
“불청객인 제가 갈 수 없는 곳이니, 변호사님이 대신 영정사진 앞에서 제 말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장 회장··· 제 친부에게요.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다고. 앞으로의 인생은 모르겠지만,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해보겠다고.”
“...”
“용서란 아직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그분께 전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남긴 마지막 부탁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말도.”
차호영 신부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