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9화 (9/200)

9. 당신의 아버지는··· (3)

자기를 나에게 남겼다니.

듣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오해가 가능한 대범한 발언이었다.

나는 고윤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철이 들기 전부터 눈치 하나는 빠른 편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난 기질이 그런 것인지, 자라난 환경 때문인지 그 이유를 나도 정확히 말하긴 어렵다.

어쨌든 분위기를 읽는 데는 제법 재주가 있었고, 낯선 사람과 몇 마디만 나눠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쉽게 감이 왔다.

그 감은 대부분 맞아떨어졌고.

하지만 이 여자, 고윤아는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기계처럼 차가워 보이다가도, 따스한 체온을 가지고 있는 인간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공적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다가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

그녀는 마치 능숙한 솜씨의 지휘자가 연주하는 변주곡 같았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봄에는 고윤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문득, 술자리에서의 최예리가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최예리는 나와 눈이 3초만 제대로 마주쳐도 불에 댄 듯 얼굴이 붉어졌었다.

“영수 님. 왜 그렇게 저를 보십니까?”

“글쎄요. 장영복 회장이 저에게 고 변호사님을 남겼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

고윤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군요.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장영복 회장님은 저와의 고용관계를 한영수 님에게 그대로 승계하셨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알고 있어요. 유언장에서 봤습니다. 저에게 상속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는 상속인의 자격이 없다고 하셨죠? 혼인외 출생자? 유증, 그래. 유증이 마무리될 때까지 고 변호사님이 저의 대리인 자격으로 모든 처리를 일임하신다고요.”

나는 서류 한 장을 고윤아 쪽으로 쓱 내밀었다.

“그래서 여기 대리인 위임장에도 내 이름으로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었지 않습니까.“

“오늘 이후로, 그러니까··· 유증이 끝나고 나서도 저를 한영수 님의 수임 변호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 변호사 자격증이 유효할 때까지요.“

“예?”

한영수 너, 정말 헛똑똑이구나.

나 자신이 오늘처럼 바보같이 생각된 날이 없다.

온종일 되묻고, 질문만 하고 있다.

“장 회장님께선 제가 한영수 님의 고문변호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비용은 이미 충분히 내셨습니다. 해서 앞으로 민사, 형사를 비롯해 모든 법률적인 문제의 소송과 자문은 저에게 의뢰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고 변호사님이 제 전속 변호사가 되신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저는 법률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으니 전속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습니다. 하지만, 편의상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영수 님께서 저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언제든 자유롭게 해고하실 수 있습니다.”

살면서 변호사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히 한 번쯤은 온다.

사실 일상적으로 의식하지 못할 뿐 세상의 모든 일에는 직간접적으로 법이 얽혀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부탁을 하고 싶은 지경이다.

그나저나 장영복 회장.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두었단 말인가?

태상 정도의 거대 그룹이라면 분명 사내에 으리으리한 이력의 변호사단이 꾸려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영복 회장이 기껏해야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고윤아를 곁에 두었다는 것.

그건 두말할 필요 없이 그녀가 굉장히 뛰어난 변호사라는 방증이다.

내가 미디어를 통해 본 장영복 회장은 굉장한 합리주의자로 보였다.

단순히 그녀가 미모가 출중하다거나, 명문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고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죠.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이 부분도 동의하신 걸로 알고, 그럼 제 약력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92년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땄습니다. 제5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며, 사법연수원을 나온 뒤에는 미국 코넬 대학의···”

“잠깐만요.”

역시 엉뚱한 구석이 있는 여자.

“이력 같은 것은 괜찮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를 제가 검증할 게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장영복 회장 옆에서 일하셨다면서요.”

“장영복 회장이라··· 역시 아무래도 아버지라는 호칭은 입에 안 붙으시나 보군요.”

“그분이 제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불과 몇 시간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분명 존재하구요. 솔직히 말하자면 앞으로도 장영복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이 없네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편이 어쩌면 영수 님에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한마디만 드리자면, 장영복 회장님은··· 그분은 세평처럼 냉혹하기만 한 분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회장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쳐두고도 고인은 인간적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셨습니다.“

“변호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두 분 사이가 각별해 보이네요. 받았다는 도움. 혹시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죄송합니다. 제 개인사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하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건 회장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 역시 없었을 거란 것입니다.”

*

“그럼, 다음 주 중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놓도록 하겠습니다. 확답은 못 드리지만 가능하면 다가오는 월요일 안에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와 고윤아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카페 안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느새 서쪽 끝으로 몸을 눕히고 있었다.

“제가 따로 챙겨야 할 건 없을까요.”

“챙겨야 하실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저는 이런 법적인 문제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알려주세요.”

“마음입니다.”

“··· 마음?”

생각지도 못했던, 재밌는 대답이다.

”네. 영수 님은 마음만 잘 다스리고 계세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가 여기 있는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일이 진행될 때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 명함 뒤에 연락처가 있으니 영수 님도 제가 필요하시면 무엇이든,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든든하네요. 그나저나 31살의 나이로 변호사님은 대단한 성공을 이뤄내셨군요.”

고윤아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영수 님이야말로 이제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성공의 발판 위에 올라서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저는 아직 29살입니다. 미국 나이로 말씀입니다.”

하하하━

고윤아를 만난 후로 처음이다.

그럴듯한 웃음이 나온 것은.

슬쩍 보니 고윤아 역시 입꼬리 양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영수 님.”

“네?”

“내일 오후 2시에 장 회장님의 발인이 있습니다.”

“...”

“말씀드려야 하나 생각만 하다가 역시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가족장입니다. 가족을 제외하면 소수의 측근만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영수 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고문변호사로서 조언을 드리자면··· 찾아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제 친부와 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장 회장님의 직계혈족인 자녀분들, 그리고 비밀증서를 봉인할 때 자리에 있었던 저와 다른 변호사 한 명입니다. 장례식장을 가보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장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

덜컹-

고윤아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위 말하는 헬창으로서, 아무리 무거운 무게를 올리고 열심히 쇠질을 해도 지치는 법이 없는 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수가 있나 싶게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늘어진 빨래처럼 소파에 내 몸을 의탁했다.

이름조차 몰랐던 내 친부라는 사람은 사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월급을 쪼개고 쪼개며 살뜰하게 살아오던 내가 상상조차 못 해본 거액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세만으로도 이게 어디냐 뿌듯했는데,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도 떡하니 생겼다.

심지어 30, 40억을 호가하는 강남의 아파트.

천지가 개벽해도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이젠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경제적 자유!

김영하가 코인으로 한참 재미를 보고 있을 때 여자친구와 1박에 50만 원이 넘는 호텔을 다녀왔다고 자랑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무리 그래도 50만 원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혀를 내둘렀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매일 그런 호텔에서 잠을 잔다고 해도 가진 재산의 3할을 채 쓰지 못한다.

아니지.

뭐하러 호텔을.

청담동에 있는 170억짜리 아파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공동주택이라던데, 원한다면 까짓것 못 살 이유가 없다.

미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인 이 땅에서 일등 시민으로서의 삶을 죽을 때까지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큰 원에서 변두리만을 맴돌던 나.

그런 나를 장 회장이 멱살을 잡아 원의 중심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이걸 믿지 못할 행운이라고 기뻐해야 할까?

그래.

설령 내가 너무나 기뻐 공중제비를 돌며 춤을 춘다고 해도 누가 나를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나를 아비의 죽음에 슬퍼할 줄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고 욕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엄연히 상처받은 피해자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또한 내가 잘못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다.

장 회장의 유산은 어떤가.

나는 그에게 그걸 요구한 적도, 바란 적도 없다.

장 회장의 편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말없이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편지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편지와 이길 수 없는 눈싸움을 하느라 눈알이 시큰해질 때쯤, 얼굴을 소파에 파묻었다.

눈을 감으니 고윤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1분만 천천히 숨을 쉬세요. 호흡에만 집중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말을 아주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고윤아의 목소리를 따라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뇌를 털어내기에 1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나의 생각을 지우면, 두 개의 생각이 새롭게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을 때는 붉은 물들어 있던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불 꺼진 집 안에는 태양의 빛을 대신해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

불을 켜고 편지 봉투의 봉인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와 한 여자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진 속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처음보는 사람이지만, 이 여자가 낯설지 않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내 얼굴을 쏙 빼닮아 있었다.

아니, 내가 그녀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지만 나는 우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 네가 이 편지를 받았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것이다.

편지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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