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당신의 아버지는··· (2)
“한영수 님의 아버님이 바로 장영복 회장님이십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몸에 붙어있는 터럭 하나하나가 모두 빳빳하게 서는 느낌이었다.
오늘 고윤아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농담처럼 들린다.
태상의 그 장영복 회장이 내 아버지라고?
“변호사님 지금··· 저한테 장난치시는 겁니까.”
“저는 유머 감각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 상황에서 제가 존경하는 분의 이름을 두고 허튼소리를 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막힌 사연이 있을까.
적어도 나에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분명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시겠죠. 하지만 여기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으며, 명백한 사실입니다.”
근래 가장 뜨거운 감자인 장영복 회장의 부고.
그의 죽음 앞에서 평범한 소시민인 나는 애도의 마음보단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만 떠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죽음이 깜빡이도 없이 내 인생에 이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오게 될 줄은.
“그래···서요.”
그래서.
기껏해야 내가 겨우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난 그거였나?
재벌총수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사생아.
태생부터 환영도 축복도 받을 수 없는 아이.
그렇다면,
인제 와서 장영복 회장은 왜 내가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는 걸 알려주는 걸까.
30년을 넘도록 모른척하다가 지금에 와서야 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제 친부라는 사람··· 그러니까 장영복 회장에게는 나란 존재는 영원히 숨기고 싶은 종류 아닙니까? 충분히 그럴 힘도 있을 거고요.”
미디어는 장영복 회장을 위대한 거인이자 냉혹한 승부사라고 불렀다.
철저한 계산 속에 이기는 게임에만 뛰어드는 사람.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 장 회장이 생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자신이 버린 고아에게 작은 동정심이라도 생겼다?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세상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장영복 회장의 죽음과 더불어 드러난 추문을 미친 듯이 물어뜯을 것이다.
태상 그룹은 또 어떤 곳인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나라는 불순물이 회사를 흔들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그 대단하다는 장영복 회장이 설마하니 이 정도도 예상 못 했을까.
자기 죽음 뒤에 한바탕 요란한 소동이라도 벌어지길 바라는 건가.
“제가 답할 수 있는 것만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방금 질문은 저로서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과 영수 님, 두 분 모두를 위해서요.”
고윤아는 그렇게 나에게 물음표만 남겼다.
그녀는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한 대신이라는 듯,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에 작성하신 편지입니다. 그 안의 내용은 당연히 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이라도 하신 듯, 사후에 이 편지를 한영수 님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편지 봉투는 실링 왁스로 밀봉이 되어있었다.
받아든 편지를 손에 들고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고윤아가 내게 물었다.
“안 열어보시나요?”
“이 편지 안에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열어보겠습니다. 32년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더 늦어진대도 상관없습니다.”
고윤아는 잠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 확실히 회장님을 닮으셨군요.”
나는 그녀의 작은 혼잣말을 일부러 못 들은 체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그럼 고 변호사님은 이 편지를 전하기 위해 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본론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자 제법 뭉툭한 종이 뭉치들이 들어있었다.
“지금부터 장영복 회장님의 지정유언집행자로서 민법 제1,060조에 따른 고인의 비밀증서를 집행합니다. 증서의 효력은 고인의 사망 후, 수증자의 인지 시 바로 발생합니다. 따라서 수증자 한영수는 이 자리에서 본인의 권리를 승낙하거나 포기하셔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법률적 단어들로 도배된 딱딱한 말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없었기에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증자 장영복과 수증자 한영수는 법률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으로···”
고윤아는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 죄송합니다. 부디 불쾌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증자는 인지된 혼인외의 출생자로서 민법 제 1,000조에 따라 상속회복청구권이 용인되기 전까지는 고인의 유산에 대한 권리가 일절 없습니다. 다만 고인은 비밀증서를 통해 본인의 재산 일부를 수증자에게 유증의 형태로 전달할 것을 의사로 표했습니다. 첫째, 유증자 장영복은 본인의 사망 후 수일 내에 수증자 한영수에게 현금 일천억 원을 지급합니다.”
“잠깐만요. 뭐라고요?”
고윤아는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따라서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유산에 일체 손을 댈 자격이 없다는 앞의 말과 현금 일천억을 지급한다는 뒷말의 간극이 너무나 컸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현금 일천억 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이 돈을 전액 받으실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깨끗한 돈이 한영수 님에게 일시금으로 전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세금 문제가 해결되고 실제 받으실 금액은 504억 6천만 원입니다.”
“...”
미친 날이다.
오늘은 정말 미친 날이야.
나도 모르게 상스러운 욕설이 터져 나올 뻔했다.
“더하자면 3개월 이내에 자진신고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납부된 증여세 중 3%, 그러니까 14억 8천만 원가량을 돌려받습니다. 한영수 님께서 동의하시면, 제가 모든 부분을 처리하고 520억에 조금 못 미칠 수령액을 원하시는 계좌로 이체하겠습니다.”
머릿속에 파리 한 마리라도 숨어든 것 같다.
귓가에는 윙윙 소리만 맴돌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마저 검게 흐려진다.
공허한 우주를 홀로 표류하는 기분이다.
“··· 님.”
나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불러세운 것은 고윤아의 목소리였다.
“영수 님. 괜찮으십니까.”
“...”
주문을 한 뒤 손도 대지 않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벌컥 들이켜고 얼음까지 아작 씹어먹었다.
장 회장에게 나는 혼자 묻어두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존재.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라지만, 이런 사생아에게 천억을 남긴다고?
그것도 오백억에 가까운 돈을 세금으로 태우면서까지?
장 회장은 죽었어도 그의 자식들은 시퍼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과연 이걸 눈 뜨고 가만 보고 있을까?
“정신 차리자. 영수야, 정신을 차려.”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심장이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펄떡펄떡 뛴다.
그때, 고윤아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듯한 온기가 손을 타고 몸으로 퍼졌다.
“눈을 감고 일 분만 천천히 호흡해보세요.”
“네?”
“어서.”
고윤아의 말대로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깐만이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렇게 몇 번의 호흡이 지나갔을까, 고윤아의 온기가 빠져나갔다.
눈을 뜨자 머리를 쓸어넘기는 고윤아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영수 님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복잡한 감상은 모든 일이 마무리된 뒤로 미루셔야 합니다. 재판 중에 때때로 피고인이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지나치게 흥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손을 잡아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영수 님께 드렸던 말과 같은 말을 합니다. 대부분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
고윤아의 말이 맞다.
내 양 볼을 두 손으로 찰싹 때렸다.
“계속하시죠.”
“··· 알겠습니다. 두 번째로 유증자는 수증자에게 강남구 압구정동 소재의 부동산을 증여합니다. 대상물은 강남구 압구정동의 문산 아파트 15차 4동 1006호입니다.”
압구정의 문산 아파트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 MC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어진 지 40년은 족히 지난 오래된 아파트임에도 매매가가 30억을 넘나든다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아파트의 경우에는 증여에 소요될 비용을 회장님께서 미리 마련해두셨습니다. 즉시 명의변경이 가능하십니다. 이 역시도 영수 님이 위임에 동의하시면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 집은 지금 비어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현재는 월세 계약자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내년 8월까지 계약이 되어있으니 그때까지 입주는 어렵습니다. 대신 매매를 원하신다면 증여가 끝난 후엔 자유롭게 가능하십니다.”
“월세라··· 월세를 얼마나 받고 있습니까?”
“보증금 1억에 55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허.
이제 난 가만히만 있어도 매달 550만 원이란 돈을 연금처럼 받을 수 있게 된 건가.
하하━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계산해도 지금 내 월급에 2배에 가까운 금액.
520억. 압구정 문산 아파트.
이런 아득하게 느껴지는 말들보다 오히려 550만 원이라는 돈이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여기, 장영복 회장님이 수기로 작성하신 유언장입니다. 유언장의 절차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고, 효력 역시 같습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유언장의 내용은 고윤아가 내게 말한 것과 빠짐없이 같았다.
필체에서 호방한 자신감과 힘이 느껴졌다.
이게 장영복 회장의 글씨인가.
“그럼 한영수 님은 자유로운 의사로 수증자의 권리를 승낙하시겠습니까?”
세상을 하나의 큰 원이라고 생각한다면 늘 그 원의 주변을 맴돌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평생 원의 중심에 들어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원 밖으로 영영 튕겨 나가지 않은 게 어디냐 자위했었다.
하지만,
고개를 한 번만 끄덕이기만 하면 내 삶은 예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좋다.
설령 장 회장이 생의 마지막에 적선 같은 호의를 베푼 것이라고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
“모두 이해했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고윤아는 내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곤, 만년필과 인주를 내밀었다.
“서명하실 것이 많습니다.”
만년필을 받아들고 미리 받았던 서류들을 찬찬히 넘겨보았다.
고윤아는 서류들의 문구와 효력에 대해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 가며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바꿔 줄 종이들에 이름을 써놓아 가고 있을 때,
“사실, 장 회장님께서 한영수 님에게 남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건 재화나 자산은 아닙니다만···”
“뭐가 더 있습니까?”
나는 의아한 눈으로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건 바로··· 저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