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낯선 방문자
“음···”
뒤집어쓴 이불을 머리 위로 걷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길어진 술자리가 3차까지 이어졌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였다.
우리는 많이 웃었고, 화를 내기도 했으며, 함께 고민을 나눴다.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소주 세 병, 아니 그 이상을 먹었던가?
망치로 누가 머리를 한 대 친 듯한 숙취에 머리가 띵하다.
오늘이 토요일이기에 망정이지, 평일이었다면 오전 내내 회사에서 고생했을 것이다.
핸드폰은 지금 시간을 오전 9시 32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야, 이건.”
휴대전화 액정에는 모르는 번호가 부재중 통화로 찍혀있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주말 아침부터 누굴까.
일과 관련된 번호라면 한 번 만났던 거래처까지 모두 저장해놓고 있으니 왠지 그건 아닐 듯싶었다.
“급한 전화면 다시 걸겠지.”
누군가 날 보고 영업 뛰는 사람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일침을 놓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도저히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할 기력이 없다.
휴대전화를 침대 머리맡에 던지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 혀엉··· 우리는 진짜 끝까지 같이 가자. 알았죠?
━ 알겠어. 너, 그만 마셔라.
━ 영수랑 영하! 성만 다르지,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다고!
문득, 어제 술자리 막바지에 김영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은 끝내 술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에 몸을 엎더니 귀여운 주정을 부렸다.
그리고, 최예리.
김 주임이 제일 먼저 맛이 가고, 이후에 최예리와 분명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기억 나는 것이라곤 내 말에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려 웃던 최예리의 모습뿐이다.
정작 대화 내용 자체는 통편집으로 날라가 기억이 없다.
뭐, 분명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실수한 건 없겠지.
집에도 잘 들어왔고.
모르겠다.
일단 지금의 선결과제는 기억을 되찾는 것이 아니다.
해장, 해장을 해야 한다.
간만의 과음을 달래느라 잠든 사이 열심히 일한 장기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를 통해 쏟아지는 햇볕이 집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날씨 참 좋네.”
열린 창 사이로 들어오는 선선한 미풍이 코끝을 간질인다.
내가 사는 이 집은 회사까지 차로 30분 거리의 아파트.
1억 2천 전세, 대출 4천에 나머지는 오롯이 내가 직장 생활하면서 모은 돈.
크기라고 해봐야 고작 18평밖에 안 되지만 나 혼자 살기엔 아쉬움은 없다.
예전엔 183cm의 작지 않은 신장인 내가 창도 없는 방에서 간신히 몸을 펴고 자던 날들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을 나와 고시원과 원룸만 10년 가깝게 전전했었다.
처음으로 집이라고 부를만한 이곳에 이사를 온 날 느꼈던 감동은 제법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전세지만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주소가 생긴 것이다.
마침내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출발점부터가 남들과 달랐던 내게는 누가 뭐래도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대견했던, 그런 날이었다.
주방으로 가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올렸다.
냉장고에서 무와 멸치를 꺼내 잘 다듬고 육수를 만들 요량으로 냄비 안에 집어넣었다.
콩나물 해장국.
해장으론 더할 나위 없는 한 끼다.
요리를 좋아한다거나, 혀와 손의 감각이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요리라는 건 오랜 자취 생활을 해왔던 나에겐 생존을 위한 소양이었다.
그렇게 해온 역사가 있다보니 이제 제법 흉내는 낸다.
시켜 먹는 것이 훨씬 더 간편하고 맛도 있겠지만, 역시나 문제는 돈.
1인분 메뉴를 시키려면 최소한 만 원 이상은 주문해야 하는데, 거기에 배달비까지 2천 원, 3천 원 붙는다.
조금의 수고를 감수하면 그 돈을 아낄 수 있다.
금리가 칼춤을 추고 있다.
당장 나만 해도 가지고 있는 대출금의 이자가 2, 3%는 우습게 올라 버렸다.
버는 건 같은데, 나가는 돈은 커졌으니 방법이 있겠는가. 되도록 소비를 줄일 수밖에.
“어디 보자.”
냄비 안에 육수가 팔팔 끓기 시작했다.
무와 멸치를 건져내고 비린내를 잡고자 맛술을 조금 넣은 뒤, 국물을 좀 더 우려냈다.
중간 불로 우리던 육수에 고춧가루, 다진 마늘로 양념한 콩나물과 썬 대파를 넣자 말갛던 육수의 색이 눈으로만 봐도 얼큰함이 느껴지는 빨간색으로 변하였다.
“옳지. 이거면 뚝딱이지.”
해장국의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자,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생각했던 맛이다.
간단하게 밑반찬을 꺼내놓고 콩나물 해장국을 그릇에 담에 식탁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국물에 밥을 말아 한 술 뜨려던 때,
우웅━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대리님! 어젠 잘 들어가셨나요?
최예리의 카톡 메시지였다.
그녀는 잘 들어갔냐는 텍스트와 함께 귀여운 토끼가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 잘 들어왔는지, 못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눈 떠보니 집이더라.
내가 보낸 카톡 메시지 앞에 숫자 1이 바로 사라졌다.
━ 어제 다들 취했죠. 어렴풋이 대리님이 손 흔들면서 택시를 타고 가신 건 기억나요.
━ 예리 씨는? 조심히 잘 들어갔지?
━ 네 :)
━ 그나저나 우리 어제 몇 병이나 먹은 거야? 김 주임은 나중에는 아예 쓰러지던데.
━ 어제 세 병까지는 기억하는데··· 이후로는 잘··· 저도 취해서 막 달리자고 대리님한테 술 계속 따라드리고. 죄송해요 ㅠㅠ
━ 아니야. 먹을 만하니까 받아먹었겠지. 그런데 혹시 내가 어제 실수한 건 없지?
━ 앗! 기억 안 나세요?
깜짝 놀라는 토끼 이모티콘을 마지막으로 최예리는 한동안 메시지가 없었다.
뭐야, 불안하게.
쥐고 있던 숟가락도 내려놓고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최예리로부터 카톡이 왔다.
━ 사실 저도 기억이 안 나서 대리님께 여쭤보려고 했거든요 ㅋㅋㅋ
━ 그래? 그럼 우리 큰 실수 없었으면 서로 나중에 기억나도 그냥 묻어두자고. 알지? 술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거기서 끝인 거.
━ 아니에요. 대리님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던 건 기억이 나요.
━ 다행이네. 알겠어.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봅시다.
━ 저, 대리님.
━ 응?
━ 혹시··· 주말에 뭐 하세요?
최예리의 메시지 밑에 예의 그 토끼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 글쎄. 오늘은 꼼짝없이 집일 것 같은데. 내일은 어디 좀 다녀오려고.
━ 아··· 알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뵈어요!
최예리와 카톡을 마치고 밥을 몇 숟갈 떴다.
“와, 살겠다.”
얼큰한 국물이 위장에 도달하자 뱃속이 찌르르하다.
“장사나 할까. 콩나물 해장국집.”
나는 혼자 실없는 말을 하며, 쿡 웃었다.
쏴아아━
속을 든든히 채우고 샤워를 한번 하고 나오니 숙취가 많이 가셨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몸을 말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통화목록에 부재중 전화가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 전화를 걸 곳이 있다.
차호영 신부님.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란 ‘자애 보육원’의 원장님이자,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이다.
“여보세요.”
언제나처럼 인자한 우리 신부님의 목소리.
“신부님. 저예요. 영수.”
“그래, 영수야. 오늘 눈 떴을 때부터 유난히 기분이 좋더니 너한테 전화가 오려고 그랬나 보다.”
“별일 없으시죠?”
“늙은 신부에게 무슨 별일이 있는 게 이상한 일 아니겠니. 그냥 아이들 보는 낙에 살고 있지.”
“건강은 좀 어떠세요. 저번에 병원 가서 검사받으신 건 이상 없으시고요?”
“그래. 앞으로 20년은 끄떡없을 거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늙은 몸에게 더 열심히 일하시라는가 봐. 허허.”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을 보듬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신부님이셨다.
말이야, 저래 하시지만 일흔을 바라보시는 나이에 몇 해 전부터는 뭘 먹어도 소화가 신통치않고 왼쪽 귀도 잘 들리지 않으신다고 했다.
“신부님. 내일 보육원 좀 찾아가려고요. 12시쯤이면 미사 끝나시죠?“
“영수, 네가 오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만 하필이면 미사 끝나고는 뭐냐. 시간 맞춰와서 동생들이랑 같이 미사 보면 얼마나 좋아.”
“저 냉담한지 10년은 지난 거 아시죠?”
“알겠다. 다만 하느님은 널 항상 사랑하신다는 것만 잊지 말거라. 요즘은 좀 어떠니.”
신부님. 신부님을 정말 존경하지만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하느님이 정말 계신다면 왜 세상에는 이리도 부조리한 일이 많을까요.
왜 하느님은 아빠, 엄마가 나타나서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게 해달라는 어린 꼬마의 눈물 어린 기도를 매번 외면하셨을까요.
차마 신부님께 말씀드릴 수 없는 생각을 속으로 감추고 나는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좋죠. 힘든 게 없는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도 잘하고 있구요.”
“그래. 난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잘 해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넌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애들과 달리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어.”
딩동━
그때, 인터폰으로 초인종이 울렸다.
“계십니까.”
문밖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뭐지?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여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로 흘낏 인터폰 화면을 보니 웬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신부님. 죄송한데 저 지금 누가 집을 찾아왔네요. 일단 내일 출발하면서 전화할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방문 외판원인가? 종교 권유?
코로나 시국에 집을 찾아다니며 벨을 누르는 잡상인들이 싹 없어져 좋다 싶었다.
이제 실외 마스크도 해제한다더니, 기가 막히게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하는구나.
“누구···세요?”
현관문을 열고 여자를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여자···
내 생각처럼 외판원이나 사이비를 전도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몸에 붙는 살구색 H라인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
여자 옷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촤르르 떨어지는 느낌인데 아주 고급스러워 보였다.
외모는 또 어떤가.
목까지 찰랑거리는 단발 머리에 얼굴은 이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녀.
길가를 또각또각 걸으면 꽤나 많은 남자가 그녀의 뒷모습을 훔쳐보려고 고개를 돌릴 것 같았다.
다만, 꾹 다문 작은 입술이 사람을 딱딱하고 차갑게 보이게 했지만.
“안녕하세요.”
여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배어있는 듯한 예의와는 다르게 목소리에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영수 씨가 맞으십니까?”
“예. 제가 한영수가 맞긴 합니다. 그런데 누구시냐고 먼저 물은 것 제 쪽인 것 같습니다만.”
“아, 실례했습니다. 전화를 몇 번 드렸으나 받지 않으셔서, 부득이하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여자는 제 손에 들려있는 브리프케이스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광월 법률사무소
변호사 고윤아
금박이 씌워져 있는 명함에 적혀있는 글씨였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로펌 광월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변호사들의 집단.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모티브가 되는 그곳.
고윤아, 그녀는 나와는 결코 인연이 있을 리 없는 방문자였다.
당신의 아버지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