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4화 (4/200)

4. 퇴근

“저, 한 대리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응. 말해.“

”···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계속해서 풀이 죽어 있는 최예리.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니 나까지 마음이 불편하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사무실에서 답답했는데 차라리 외근 나오니까 좋은걸.”

“업체에 가면 저 때문에 아쉬운 소리 들어야 하시잖아요. 제가 잘못한 건데.”

“예리 씨”

“네, 대리님.”

“예리 씨 잘못한 거 없어. 그 정도 불량은 항상 나와. 오히려 평소보다 적게 나온 축이고. 몇 번이나 예리 씨가 공장이랑 사무실 오가면서 꼼꼼히 확인하는 거 내가 봤어.”

“...”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예리 씨 잘못이 있다고 해도 기죽을 필요 없어. 어깨 펴. 절대 회사 일 때문에 지나치게 낙담하거나 자책하지 말라고.“

최예리에게 좋은 선배로 보이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이건 평소 내가 생각하는 지론이자 개똥철학이랄까.

인간이란 누구나 무언가를 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 일이라는 것에 내 자존감까지도 도맷값에 같이 팔려나간다면 정말 서글픈 일 아닌가.

내 말에 마음이 조금은 풀린걸까.

최예리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 철없는 대학생이었어요. 부모님께 용돈 타 쓰면서. 막연히 졸업하면 뭐든 되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사회에 나오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난 예리 씨가 부럽네. 난 성인이 되고 나선 뭐든 혼자서 감당했어야 했는데 의지할 수 있는 부모님이 있는 게 어디야.“

”죄송해요. 대리님. 전 그런 의미로 말씀드리려던 건 아닌데···“

”알아. 말이 그렇다는 거야.“

”대리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뭐든지 척척 잘 해내시고. 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왜 이리 실수가 많을까요.“

“나도 처음엔 예리 씨랑 똑같았었어. 실수하고, 깨지고.”

아무리 이런 회사라도 계약직 신분인 최예리에게는 나와 다른 절박함이 있을 것이다.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겠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일이라는 게 결국 잘하는 게 중요하지. 그런데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우리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감사합니다. 역시 한 대리님은 어른이세요.”

“뭐야? 늙었다고 놀리는 거야?”

슬쩍 장난스럽게 말하자 최예리가 입을 벌리고 크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뭔가 듬직하시고, 진짜 멋진 어른 같다는 말씀이에요. 얼굴만 보면 대리님은 제 또래보다 더 어려 보이시는걸요!”

“사회생활 잘하네! 예리 씨. 선배한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아부도 할 줄 알고.”

“대리님!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진심이거든요.“

울상이던 최예리의 얼굴이 이제야 평소로 돌아왔다.

말문이 터진 김에 시시콜콜한 몇 마디를 더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대한 차 공장에 도착했다.

”다 왔네. 대한 차 담당이랑은 내가 이야기 할 테니까. 들어가자고.“

*

”한 대리님이 오셨네요. 물건만 보내주시지 뭘 이렇게 직접 오시고.“

대한 차의 박치훈 대리.

우리 회사와 거래를 담당하고 있는 지 2년째로, 나와는 같은 직급이라 동병상련이랄까, 이래저래 안면은 있는 사이다.

불퉁스러운 얼굴의 그는 최예리는 본체만체하고, 나에게만 겨우 고개만 끄덕이는 인사를 건넸다.

“예. 박 대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희가 직접 얼굴 뵙고 사과드리는 게 도리에 맞죠.”

“도리까지야··· 그 박스에 들어 있는 게 물건입니까?“

”네. 나가는 길에 검수팀 쪽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됐어요. 그보다 지금 가져온 건 불량 확실히 없겠죠?“

날이 잔뜩 서 있는 박 대리.

”예. 확실하게 확인하고 가져왔습니다.“

”아니, 한 대리님. 저 개인적으론 대리님 굉장히 좋아합니다. 인물 좋으시고, 일 처리 깔끔하시고. 그런데 이번엔 신입사원분이 저희 납품 담당하셨나 보죠?“

꿀꺽-

최예리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린다.

”저희 회사 이름으로 납품하는 건데, 담당이 누군지가 중요하겠습니까. 모두의 책임이지. 앞으로 대한 차 건은 만사 제쳐놓고 제가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아니···“

박 대리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볼펜으로 톡톡 쳐댔다.

”막말로 중식 모터스나 우리나 다 똑같은 하청업체 아닙니까. 이렇게 문제 생기면 우리도 납품 일정에 지장 생기는 거 잘 아시잖아요. 자꾸 이런 식이면 앞으로 중식 모터스에서 물건 못 받아요.“

당장에 거래라도 끊을 듯이 나와 최예리를 쏘아보는 박치훈 대리.

하지만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물건 10개가 로스가 난 것이 이렇게까지 섭섭한 소리가 오갈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어디 그뿐인가,

박치훈 대리의 자리는 절대 이 두 회사의 오랜 거래관계를 단칼에 끊을 수 있는 위치가 못 된다.

도대체 박 대리는 뭣 때문에 이렇게 뿔이 났을까.

까칠하긴 해도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히 이번 납품 건 말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박 대리를 살펴보았다.

여태껏 박 대리와 미팅이 있을 때마다 그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항상 비즈니스 룩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가.

티셔츠에 청바지.

테이블 아래로 흘낏 신발을 보니, 캐쥬얼 차림에 맞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아하!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오늘 박치훈 대리는 아마도 연차를 쓰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일을 보던 중에, 모종의 이유로 회사에 불려 나왔고 그 불똥이 우리에게까지 튀었을 심산이 크다.

그렇다면 쉬는 날까지 현장에 불려 나온 박 대리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뭘까.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박 대리님 아니면 대한 차도 안 돌아가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하시는 말이니 새겨듣겠습니다.”

포인트는 너 아니면 이 회사 안 돌아간다는 말.

분명히 박치훈 대리는 속으로 씩씩대며 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험악했던 박 대리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뭐. 저야 그냥 일개 회사원이죠. 저 하나 없다고 회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투가 한결 우호적이다.

“앞으로도 저희와 거래에서 애로사항이 있으시면 가감 없이 지금처럼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저도 좀 예민하게 굴었던 거 사과드립니다. 한 대리님도 잘 아시잖아요. 위에서 하도 쪼아대니 저도 힘드네요. 신경 좀 써주세요.”

“예. 저희 직원들에게도 전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박 대리님 아드님이 야구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우리 아들요? 리틀 야구 하고는 있죠. 제가 한 대리님한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요?”

“예. 포지션이 투수라고 했었죠?”

“네, 그걸 다 기억하시네.”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박치훈 대리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 그러잖아도 오늘 아들 경기가 있어서 일부러 연차까지 낸 건데 가보지도 못하고 회사에 끌려왔네요.”

”저런. 한 번 더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중식 모터스 건 말고도 우리 공장에 다른 일이 좀 있어서.“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제가 진작에 드리려던 게 있거든요. 아드님에게 이거 가져다드리세요.“

”예? 우리 아들에게 뭘···“

나는 가방에서 미리 챙겨두었던 야구공 하나를 꺼내 박 대리에게 건넸다.

”뭡니까, 이게?“

”메이저리그 투수 우현수 선수 사인볼입니다.“

”우현수 선수요? 이야, 그 선수 사인 해주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저는 야구 잘 모르는데, 친한 친구 놈이 야구 광팬이거든요. 우현수 선수가 한국에서 뛸 때 받아둔 거라고 하더라구요.”

“아이고, 이 귀한걸. 이거 정말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박 대리는 야구공을 받아들고 싱글벙글.

“관심도 없는 저보다는 야구 꿈나무에게 더 가치가 있는 물건이겠죠. 진작에 아드님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고마워서 어쩌죠. 오늘은 좀 그렇고, 제가 다음에 뵙게 되면 꼭 식사 대접 한번 하겠습니다.”

박치훈 대리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

“예. 차장님, 불량품 회수했고요. 이야기는 잘 되었습니다.”

- 그래, 그렇지 않아도 대한 차 쪽에서 연락받았어. 역시, 한 대리. 거, 내가 한 대리가 가면 잘 처리할 거라고 딱 생각하고 있었지. 잘했어.

“지금 회사 들어가도 시간이 늦을 것 같은데 바로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 아니, 오늘 고생했는데 넘어와서 소주 한잔할까?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습니다.”

- 선약? 무슨 선약.

“...”

- 아이고, MZ세대라 그런가? 아주 칼 같네. 칼 같아. 나 때는 선배가 술 한잔하자 그러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뛰어나왔는데. 그래, 어쩌겠어.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우리 한 대리 고생 많았고, 바로 퇴근해.

평소 같으면 늦더라도 들어와서 얼굴도장 찍으라고 말하고도 남을 임 차장.

대관절 대한 차 박 대리가 얼마나 좋게 말을 했는지 우리 한 대리까지 운운해가며 퇴근을 허락했다.

“대리님, 감사합니다.”

조수석에 앉은 최예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실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그저 말 한마디를 툭 던진 것.

그리고 나한테는 별 의미도 없는 야구공 하나를 준 것.

“그나저나 대리님은 거래처 직원 대소사도 다 기억을 하시나 봐요. 박치훈 대리 아들 이야기 말이에요. 정작 본인은 자기가 말한 것도 기억 못 하던데.”

글쎄, 일부러 기억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어려서부터 기억력 하나는 비상한 편이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바인더와 같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머릿속에 잘 저장해두었다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빼서 쓰는 셈.

걸러야 할 말을 듣고 흘리는 것도 사실 타고 태어난 성품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정보의 값어치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

”처음 우리 회사 담당이 되었을 때 본인 소개하면서 곁다리로 말했었어. 그나저나 오늘 예리 씨 이래저래 욕봤다.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오늘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저한테 해주신 말씀들도 감사했구요.“

”배우긴 뭘.“

그때, 블루투스로 연결된 내비게이션에 통화 알림이 떴다.

김영하 주임.

”어, 김 주임.“

- 선배님, 어디쯤이세요.

흘낏 시간을 보니 6시 15분.

”퇴근했구나. 난 대한 차랑 미팅 끝나고 들어가고 있지.”

- 아까 한잔하기로 하셨잖아요. 7시쯤까지는 떨어지시죠?

“먹겠다고는 안 했는데. 생각해보겠다고만 했지.”

- 에이, 선배님 진짜.

“아무튼 7시 언저리면 될 것 같은데?”

- 그럼 이따 동표포차에서 보실까요?

“알겠어. 혹시라도 길 막히면 연락할게.”

-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충성!

“오늘 김 주임님이랑 한잔하시기로 했나 봐요.”

통화가 끊어지자 최예리가 나에게 말했다.

“응, 아까 사무실에서부터 일 끝나면 한잔하자고 난리더라고.”

“두 분이 드시는 건가요?”

“그렇지. 예리 씨는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다 내려줄게. 어디가 편하지?”

“저··· 대리님.“

”응?“

”··· 혹시 저도 오늘 같이 한잔하면 안 되나요?“

소주는 무엇으로 마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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