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족 같은 회사
“커피 왔습니다.”
최예리.
27살의 그녀는 이제 막 2년 차에 접어든 신입 사원이다.
듣기로는 대학 졸업하고 2년 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데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공부를 접고 들어온 게 바로 우리 회사.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와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녀였다.
타고난 성격과 더불어 자신의 첫 직장인만큼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하는 최예리다.
하지만 반대로 사회생활 경험의 부족으로 가끔 실수도 있어 되는대로 옆에서 챙겨주려고 하고 있다.
“김 주임님은 자몽 블랙 티 맞으시죠?”
“어라, 예리 씨 어디 갔나 했더니 카페 갔다 왔어요? 이야.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기억을 다 했어요?“
최예리는 직원들의 책상 위에 각자 입맛에 맞춘 음료를 올려놓았다.
“한 대리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시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커피를 건넸다.
“예리 씨. 왜 직원들 걸 예리 씨가 다 사와.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은 고맙게 잘 먹을게.”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의 웃음이 어색하다.
그리고 그 억지웃음의 이유는 일부러 묻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최 사원. 난 그냥 한 말인데 진짜로 사 왔네. 이야! 내가 젊은 아가씨가 사다 주는 커피도 다 마셔보고. 그런데 이거 샷 하나 추가한 건 맞지? 난 진하게 먹는 게 좋아서.“
”네. 말씀하신 대로 샷 한 번 더 추가했습니다.“
허! 최예리로부터 음료를 받은 임 차장의 말이었다.
저 인간의 심부름이었나?
돈은 주고 시킨 거야?
글쎄.
메뉴는 제 맘대로 고를지언정 새파랗게 어린 직원들에게도 칼 같은 더치페이를 주장하는 사람.
가만히 말하는 꼬락서니를 듣자니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꾸며 최예리에게 나가서 커피를 사 오라고 했을 것이다.
신입 사원인 최예리는 차마 그 말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을 거고.
임 차장 것만 챙기려니 그것도 민망한 일이라 팀원들 것 전부를 사 왔을 것이다.
“차장님, 탕비실에 커피 머신 새로 들어와 있던데요. 마셔보니 먹을 만하던데.“
이 추잡한 인간아.
보다 못한 나는 목구멍에 가득 찬 말은 숨기고 최대한 돌리고 돌려서 한마디를 했다.
”야, 한대리야. 사람이 직접 내려주는 거랑 캡슐로 뽑아먹는 거랑 같냐.“
”저는 커피 맛을 몰라서 그런가, 별 차이를 모르겠던데요.“
”네 입이랑 내 입이 같아? 그나저나 말에 가시가 있는 거 같다? 일 잘한다고 오냐오냐해주니까 대드는 거야? 이래서 애들한테 잘해주면 안 된다니까.“
”...“
우와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지.
내가 만약 사장이라면, 당장 당신 같은 사람부터 내쫓을 거야.
욱하는 마음에 한마디 더 칠까 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괜히 사무실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최예리는 자기 자리로 가면서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기 편을 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일까.
*
아인슈타인이 말하길,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은 확실히 옳다.
물론 이 위대한 물리학자가 제창한 상대성 이론의 심오함이야 내가 제대로 알 턱이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시간이 결코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 것을 완벽하게 체감하고 있다.
오후 두 시.
아마도 모든 직장인이라면 공감을 하지 않을까.
이때쯤이 유난하게도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것을.
김영하와 나는 장난처럼 두 시부터 네 시 사이의 사무실을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공기마저 나른하다.
사무실에 타닥타닥 울려 퍼지는 키보드 소리가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 같이 들린다.
임 차장은 체내에서 카페인을 자연 배출하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는 샷까지 추가한 커피를 마시고도 팔짱을 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띠 링- 띠 링-
잔뜩 늘어지는 사무실의 분위기를 깨운 건 오명식 과장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였다.
“예. 중식 모터스 오명식입니다. 아, 박 대리님. 잘 지내셨어요.”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환하게 웃던 오 과장의 보름달 같은 얼굴.
그런데 왜인지 통화가 길어질수록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 그렇습니까. 저희는 100프로 양품 보내드리려고 노력하는데··· 아, 그럴 리가요. 예. 예. 박 대리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오 과장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임홍빈 차장에게 다가갔다.
“저, 차장님.”
“...”
“차장님, 보고드릴 게 있어요.”
“어! 어! 어, 오 과장님. 왜? 뭔 일이에요.”
“그게···”
오 과장의 말을 듣는 임 차장의 얼굴이 그라데이션으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어이, 이번에 대한 차 납품 담당 누구야? 김 주임 너야?“
”아뇨. 저는 지금 전조등 센서 업체 선정하고 있어서···”
김영하의 눈길이 최예리를 향했다.
“그럼 누구야. 누구길래 일을 이렇게 하나!”
임 차장의 호통에 최예리는 손을 들고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불길하다. 불길해.
“저··· 차장님, 이번에 그 건은 제가···”
임 차장의 표정과 말투에서 이미 최예리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녀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 최 사원. 선배들한테 일 제대로 안 배웠어?”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임 차장은 책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한 차에서 컴플레인 들어왔잖아. 불량품 들어왔다고. 출하하기 전에 QC 확인 안 했어?”
“품질관리팀에게 검수 꼼꼼히 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고, 이 답답한 사람아. 그 사람들 말만 믿고 있을 거야?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지. 일을 그렇게 허술하게 해.“
졸다가 악몽이라도 꾼 건가.
아니면 반대로 단꿈을 젖어있던 차에 오 과장이 깨워서 분통이라도 난 건가.
벌세우듯 직원 하나를 세워놓고 임홍빈 차장은 억까를 시작했다.
최예리를 쏘아보는 그의 눈알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바닥을 구를 것 같다.
대한 차는 우리로부터 전조등을 납품받는 태상 자동차의 1차벤더.
새로 바뀐 담당이 깐깐하게 곤조를 부리는 게 가끔 골치 아프지만, 워낙에 탈 없이 오랫동안 거래해 온 업체라 최예리에게 이번 납품을 일임했었다.
원래라면 사수 한 명에 최예리를 붙이는 식으로 갔겠지만, 팀에 인원이 펑크가 나 있는 상태에서 도저히 그럴 여력이 나지 않았다.
뭣보다 일은 부딪쳐가며 배우는 거라고 최예리에게 직접 지시했던 것이 다름 아닌 임 차장.
내가 기억하기로 이번에 우리 쪽에서 보낸 물건이 2,000개다.
애초에 불량은 품질관리 쪽에서 걸러줘야 하는 것이고, 영업사원에게 눈으로 확인 안 했냐며 호통을 치는 건 정말 생트집이 따로 없다.
”저, 차장님. 미작동 불량이 10개랍니다. 로스가 큰 것도 아니고···“
”오 과장님도 왜 이래요. 1개든 1,000개든, 사업은 신뢰로 하는 거 아니야? 원래 그 신뢰라는 건 작은 금부터 시작해서 박살이 나는 거라고.“
그래. 말이야 맞는 말이지.
그런데 방금까지 졸다 일어난 양반 입에서 나오니 그 힘주어 말하는 신뢰가 바닥을 넘어서 지하실까지 떨어진단 말이야.
”이것 봐 다들. 회사에 주인의식을 가집시다. 내 장사, 내 사업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하겠어? 특히나 이제 겨우 입사한 직원이 말이야. 젊은 사람이 그렇게 허술해서 어디 쓰겠어!“
꿈속에서 대본을 준비하기라도 했나.
임 차장의 혓바닥은 기름이라도 바른 듯 청산유수였다.
”··· 죄송합니다.“
안쓰러운 건 최예리였다.
임 차장의 사악한 입에서 정규직 전환을 운운하는 말까지 나오자 고개를 푹 숙인 최예리의 얼굴은 온통 달군 쇠처럼 붉어졌다.
”차장님. 제가 공장 가서 물건 받고 대한 차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불량 교환해주면 될 일인 걸요.“
”잘못한 사람이 가야지, 오 과장님이 왜 가요. 최 사원이 다녀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에 신입 사원을 보내는 건··· 오히려 그쪽에서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반박할 수 없는 오 과장의 말에 마침내 임 차장의 입이 조용해졌다.
그 대신 임 차장은 매의 눈으로 나와 김 주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서 자리를 찾았다.
”한 대리야, 네가 같이 갔다 와.“
”차장님. 왕복으로 두세 시간은 걸릴 텐데요.“
”뭐? 어디까지 가는 데 그렇게 시간이 걸려.“
”대한 차 공장이 광명에 있지 않습니까.“
답답할 노릇이다.
이 사람 주거래 업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단 말이야?
이 정도면 낯이 두꺼운 걸로 위인전에 실려도 될 판이다.
”··· 그래? 그럼 일단 다녀오고, 오가는 길에서 최예리, 쟤 교육 단단히 시켜.”
그래, 차라리 잘됐다.
이런 부조리와 블랙코미디로 점철된 현장에 계속 앉아있는 것보다 나가서 남한테 머리 한번 숙이고 오는 게 차라리 낫다.
“예리 씨, 일단 챙길 거 챙겨. 다녀오자.”
사무실을 나가는 나를 향해 김영하는 한 손으로 술잔을 꺾는 모양새를, 다른 한 손은 전화기 모양을 하고 흔들어 대었다.
*
최예리와 함께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광명으로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그녀는 창밖을 바라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예리 씨. 가는 길이 가깝지 않아. 피곤하면 눈 좀 붙여.”
“··· 아니에요. 대리님,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늘 씩씩하던 최예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도 굳이 더 뭐라고 말을 붙이지 않았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 비해 과하다 싶은 정도의 비난을 들은 최예리다.
마음이야 안타깝지만, 내가 위로한답시고 몇 마디 꺼내면 마음 추스르고 있을 최예리에게 오히려 아까 일을 더 상기시킬지도 모른다.
임 차장 탓에 직장을 그만둔 사람도 내가 본 것만 세 명이다.
지금 공석인 우리 팀의 자리 중 하나도 임홍빈 차장과 마찰을 겪다가 퇴사한 것이고.
나보다 몇 년 선배였던 홍 대리.
이혼남이었던 그는 회식 자리에서 그의 처지를 비아냥대는 임 차장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멱살을 잡아 밀쳤다.
다음날 바로 사직서를 제출한 홍 대리는 우리 회사와 임 차장을 노동청에 고발하겠다고 씩씩대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사건은 직원들 사이에 며칠간 입방아에 오른 것으로 끝이었다.
회사도, 임 차장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홍 대리가 폭행으로 고소를 당해 곤란을 겪었다는 뜬소문도 있었다.
’일이 힘든 게 아니고 사람이 힘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밥벌이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이 아닐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임 차장은 정말로 유난한 구석이 있다.
외곽도로를 타자 운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운전에 몰입한 나는 옆자리에 최예리가 타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계속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래. 이 망할 놈의 회사를 하루라도 먼저 탈출한 사람이 승자지.
사실 나 역시도 회사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한 채, 기업들의 공채 일정을 체크하고 있는 참.
경력직 이직이 쉬운 것은 아니고 애초에 중식 모터스에서 일한 경력을 어디서 인정해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건이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생각이다.
“저... 한 대리님.”
그때, 정적을 깨고 최예리가 입을 열었다.
“대리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퇴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