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엇갈리는 길 (4)
“나, 나도 갈게!”
지원이 용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다만.’
나서준 용기만큼은 무척 가상해서 조금 감동이었다.
“누구 저 방에서도 한 명은 같이 가야 뭐가 문제인지 알려줄 거 아냐.”
옆방으로 갈 준비를 마친 내가 고개를 까딱이며 우리 방으로 쳐들어온 멤버들을 바라보자 제현호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갈게요.”
그걸로 끝. 간결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앞장서는데 약간 경직된 느낌은 들어도 겁에 질려있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실에서 마주쳤을 때도 장소 때문에 기절한 거지 귀신같은 걸 무서워한단 느낌은 아니었지.’
눈에 띄게 동요한 티가 나는 은찬이나 하연과 달리 현호는 꽤 덤덤했다.
‘나도 귀신같은 걸 크게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라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지원이 은근슬쩍 나와 현호 사이에서는 걸 보니 딴에는 의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얼른 다녀오자.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뭔지 확인하고 자야지.”
“응…!”
내 말에 현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순간 영인이 갑작스럽게 연기톤으로 외쳤다.
“다녀오시고 나면 저희 다시 그 방으로 돌려보내려고요…?!”
겠냐. 신경 안 쓰는 사람 둘셋이라도 가서 자고 남는 인원은 이 방 소파 같은 데서 자든가 해야지.
“일단 좀 보고.”
정말 그 누구도 잠을 못 청하겠다 싶을 정도로 이상하다 하면 프런트에 내려가서 방을 바꿔 달라고 해도 되겠고.
결론을 내린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악천후 때문일까 아니면 외관이 너무 흉해서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간 것일까. 복도에는 우리 셋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한 가운데 복도를 밝히는 조명은 어두컴컴하고 몇 개는 깜빡깜빡 곧 수명을 다할 것처럼 흔들려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내일부터라도 숙소 옮기자고 하는 게 나으려나. 이 상태로는 조식도 영 엉망일 것 같은데.’
내부 시설까지야 어떻게든 깨끗하게 유지한다고 해도 조리시설 같은 건 기본적으로 회전율이 좋아야 신선하고 재료도 좋은 걸로 쓸수 있을 텐데. 온종일 공연을 소화하느라 치진 채로 돌아와서 아침까지 부실하게 먹었다가는 누구하나 체력이 뻗어서 탈진하기 딱 좋았다.
‘예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좀 미리미리 알아보지.’
아까 얘기를 들어보니 나름의 사정이 있어 호텔 예약이 늦어져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 같았는데. 문제가 이렇게 주렁주렁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다른 호텔로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 방이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사이 짧은 복도를 가로질러 문제의 방 앞에 도착했다.
“열쇠 좀.”
고개를 끄덕이는 현호를 향해 손을 내밀자 현호가 내 손바닥 위에 카드키를 내려놓았다. 손바닥 반쪽보다 약간 작은 카드키를 도어락에 대자 지지지직, 귀를 찢는 듯한 전자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열렸다.
안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지원과 현호를 줄줄이 달고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 방과 구조만 대칭일 뿐 시설 자체는 다를 게 없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방보다 시설이 열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창문이 더 크게 나 있어서 방 자체는 더 좋아 보였다.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인상을 쓴 채로 제현호가 있는 쪽을 돌아보자 현호가 창가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소리가 난다는데요.”
“너는 못 들었어?”
꼭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하는 듯한 말투에 현호가 가리킨 방향과 현호를 번갈아 바라보자 현호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저는 그냥 긴가민가해서….”
과연 담력이 좋은 쪽일지 아니면 그냥 둔한 쪽일지. 그냥 봐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를 만큼 멀끔해 보이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자 휘이이잉 바람 소리가 울렸다.
설마 이거 가지고 우는 소리 어쩌고 한 건 아니겠지? 내 눈매가 반사적으로 매서워진 순간.
흐흐흑, 흐흑….
내 귀에도 여자가 실성한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
순간 나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지원도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토끼눈이 되어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이게 뭔….”
귀신같은 게 진짜 실존할 리도 없고.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지?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창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헉, 인수 형 괜찮아…!?”
내가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내 뒤로 숨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지 지원이 재빨리 현호 쪽으로 갈아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괜찮지 않을 게 있나.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커튼을 걷었다. 촤악, 묵직한 원단으로 된 낡고 두툼한 암막 커튼을 걷은 순간.
“헉…!”
지원의 숨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벽지를 따라 사람 머리채처럼 흉측하게 드리운 곰팡이였다.
“귀, 귀신이다…!!!”
지원이 비명을 지르며 방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내 눈에는 귀신보다 심각한 것이 먼저 보였다.
“이건 진짜 노답이네….”
천장에서부터 줄줄 빗물이 시커멓게 곰팡이가 핀 벽지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거 아예 창문이 틀이 휘어서 제대로 안 닫히는 것 같은데?”
우는 소리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건가 했더니만. 태풍이 올 때 창문이 한번 떨어져 나가면서 프레임 자체가 휘었는지 윗부분에 심한 이격이 있었다.
“봐 이렇게 하면 소리 안 날걸?”
성큼성큼 창문의 문고리 부분으로 다가가 잠금쇠를 열고 여는 방향대로 밀어젖히자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사라진 대신 엄청난 바람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어, 그러네?”
지원이 무서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두 눈을 반짝 뜨며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것도 귀신은 아니고… 무, 무서운 건 아닌 거지 그러면?”
그야 무서운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누군가에게는 빗물이 새는 상황과 곰팡이 핀 벽지가 더 공포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흐린 눈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귀신은 아니니까.”
하지만 귀신이 아니라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줄줄 비가 새고 있으니 여기서 자는 건 당연히 무리지. 다행히 심하게 새는 건 아니라서 바닥까지 흥건해지진 않았지만 에어컨을 아무리 돌려도 눅눅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는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
‘저 흑흑 거리는 소리가 사람이나 귀신이 내는 게 아니라고 해도 거슬리긴 할 테고.’
나는 한숨과 함께 프런트에 전화를 걸기 위해 인터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732호인데요. 혹시 방을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천장에서 비가 새는데요.>
곧바로 연결된 프런트에 영어로 방 변경을 요청하자 어쩐지 음산한 목소리의 남자가 곧 확인하러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 올라오신다니까 잠깐 기다려보자,”
그러나 그 후로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직원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 외국호텔들은 다 똑같나? 프런트에 가서 책임자 나오라고 난리 치지 않으면 될 때까지 미루는 쪽으로 만국공통 가이드라인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한참을 돌아오지 않자 옆방에서 다른 멤버들이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우르르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나서 결국 프런트로 직접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충격적인 안내를 받았다.
<저 죄송하지만 손님, 전산상 726호에서는 인터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으로 조회됩니다. 혹시 담당자의 직책이나 이름을 확인하셨을까요?>
나는 당황해서 내가 들었던 직책을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객실 서비스 책임 매니저라고 했었는데요….>
<음…. 실례지만 지금 해당 직책은 공석이어서요. 모든 프런트 데스트 인터폰 연락은 데스크 매니저인 제가 수신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 인터폰을 받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건데? 수신인의 정체는 우리가 체크아웃을 하는 순간까지도 알 수 없었다.
***
“아… 피곤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곧바로 호텔을 옮겼다. 위치는 15분쯤 차로 더 멀어지긴 해도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신식건물이라 먼저 호텔처럼 설비가 엉망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말끔하고 넓은 내부에 바깥에 보이는 커다란 수영장까지. 일정 때문에 우리가 한낮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저 으리으리한 수영장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는 없겠지만 야경만큼은 끝내줄 게 분명했다.
“잠은 이따 공연 끝나고 자, 공연 끝나고.”
오늘내일 이어서 저녁에 공연이 있고 그 다음 날 사인회 일정까지 끝내면 이곳에서의 모든 스케줄이 끝날 예정이었다. 그 후 이틀정도는 여기 체류하며 휴식시간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일주일 정도 국내 일정을 소화. 그 다음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서 공연을 하면 이번 해외투어 일정은 끝이 났다.
‘아직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다들 이렇게 지치면….‘
원래 해외 투어 자체가 사람 체력을 갉아먹는 일이긴 하지만.
소속사 측에서 배려를 해주면 이것보다 좀 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즐길 수 있을 텐데.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는 즐겁지만 그 두세 시간짜리 공연을 위해 겪어야 하는 각종 시행착오와 혼선이 각자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절반 이상은 왔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해외 투어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앨범을 내고 국내 활동을 이어가야 하는 살인적인 계획이 남아있긴 했으나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일이고.
당장은 지쳐버린 멤버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게 우선이었다.
“오늘이 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힘내야지!”
어제 결국 새로 바꾼 방에서도 잠을 설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혜성도 힘을 내 정신을 차렸다.
매니저도 호텔 때문에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해왔고. 어쨌든 상황이 나쁜 거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곧바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후회 따윈 없는 걸음 네게로 closer 뛰어들어줘!]
모처럼 음향도 괜찮고, 조명도 현지 스태프분이 센스가 꽤 좋아서 별도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미리 꼼꼼히 사전 연출을 준비한 것처럼 만들어주셨다.
팬들 반응이 뜨거운 건 말해서 뭐해, 한국에서처럼 가사를 따라불러 주시는데 때때로 인이어를 뚫고 들어와 피식 웃음이 날 정도였다.
역시 무대에 있을 때 행복하다. 아무리 피곤해도 계속 이렇게 노래하고 춤출 수만 있으면…. 환히 웃으며 동선을 따라 뒤를 돈 순간.
“어?”
머리 위로 갑자기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
“피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대 위가 아수라장이 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