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다가오는 그림자 (3)
이게 지금 당장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나.
나는 발라당 침대 위에 드러눕고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일단 규민과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를 노려야 하는데.
어느새 다들 씻고 나와서 슬쩍 규민이 누운 침대 쪽을 들여다보자 규민은 이미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피곤하겠지.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됐더라도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을 테니.’
그걸 또 억지로 깨워서 잠깐 얘기하러 나가자고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진심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일은 휴일이고 관광 일정이니까 좀 괜찮으려나.
그러나 생각과 달리 휴일에도 시간은 나지 않았다.
***
“자 차례대로 구명조끼 받으시고 올라오세요.”
둥실둥실. 잔잔한 강가를 떠다니는 작은 나무배에 올라타자 걱정한 만큼 흔들림이 느껴지진 않았다.
“어, 잠깐만 나 손 좀 잡아 주라.”
“헉, 응! 내가 갈게!”
“계단이 미끄럽진 않은데 조금 가파르네.”
그냥 유람선이 아니라 식사를 하는 배라서 그런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따라 갑판으로 올라오자 미리 준비해 둔 뷔페식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와… 맛있겠다….”
“테이블은 편한 자리에 앉아서 드시면 돼요. 저희만 쓰는 거니까 다른 분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우리만 쓰는 거라고 해도 촬영팀까지 우글우글 승선 인원을 다 채워 가며 탑승했기 때문에 그렇게 여유가 있진 않았다.
“아, 좋다. 그래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하루 정도는 푹 쉬어 줘야지.”
개인적으로는 쉴 거라면 이렇게 관광코스를 짜서 여기저기 데리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호텔에서 그냥 하루 종일 틀어박혀서 식사 시간이 되면 내려가서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잠이나 자고 싶은데.
투어 비하인드 영상으로 제공할 분량을 찍어야 하다 보니 나만 관광 일정에서 슥 빠져 버릴 수가 없었다.
‘편집을 잘하면… 좀 웃긴 장면으로 해서 넣어 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그러나 게을러 보인다고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는 의견을 억지로 밀어붙이고 싶진 않아서 얌전히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규민, 적당히 먹어. 아직 배탈 다 안 나았을 거 아냐.”
어느새 접시를 집어 든 채 뷔페 코너로 직진하고 있는 규민에게 한 소리 하자 규민이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씰룩였다.
“아 다 나았어. 오늘은 화장실 한 번밖에 안 갔잖아. 이제 배도 안 아파.”
퍽이나 신경이 안 쓰이겠다. 그러나 모처럼 신이 나 보이는데 이 이상 초를 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닷바람은 선선하고 차양 밖으로는 시원하게 트인 강과 보석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진 풍경.
맛있는 음식이 잔뜩 쌓여 있고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포상으로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들뜨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 역시도 호텔에 있는 게 더 낫기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리 싫지는 않아서 얌전히 접시를 집어 들고 뷔페 앞에 섰다.
“뭐야 또 샐러드?”
조금이라도 건강한 녀석들로 배를 채워 둘 겸 풀떼기 앞에서 훑어보고 있으니 규민이 불쑥 물었다.
“이번엔 고기도 먹을 거거든.”
놀릴 거리 찾느라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다 이거지. 흥,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스테이크와 볶은 고기를 담았다. 접시 전체 면적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긴 하지만.
그렇게 투닥거리며 접시를 채워 테이블로 향하니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든든히 내용물을 채운 접시를 가지고 왔다.
‘평화롭네….’
규민의 핸드폰에서 무시하기 힘든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무척이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게 왜 활동 기간을 1년밖에 계약을 안 해서는.’
출연을 보조하는 소속사나 제작진 입장에서 안 되는 그룹을 투자금을 퍼부어 가며 유지해 봤자 마이너스만 될 뿐이니 망하면 빨리 흩어질 수 있게 위험 부담을 줄이려는 시도였겠지만….
이렇게 히트를 쳐 버리니까 난감해졌잖아. 지금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이 멤버들에게는 가장 좋은 일일 텐데 필연적으로 끝이 정해져 있는 그룹이다 보니 계속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러고 재데뷔했을 때 잘 안되면 어쩌지. 그냥 이대로 쭉 활동하고 싶은데, 같은.
‘지상 낙원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뭔 쓸데없는 청승이람.’
나는 정신을 차리도록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포크를 집어 들었다.
아무튼 이다음 일정이 뭐였지? 무슨 공원도 가고 또 뭐 바다에도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아침에 들었던 브리핑을 회상하기도 잠시. 배를 좀 꺼트리기 위해 웬 식물원 같은 공원을 걷게 하더니 한참 동안 차를 타고 이동했다.
‘대체 어딜 가려고 이렇게 멀리….’
약간의 불안한 마음이 들 즈음 도착한 곳은 작은 선착장이었다. 아까는 강이었으나 이번에는 에메랄드빛 물결이 일렁거리는 바다였다.
“우와 물 색이 엄청 예쁘다…!”
다들 멋있긴 하지만 소리 내어 감탄까지는 하지 않는 와중 지원이 해맑게 외쳤다. 사실 경치가 좋은 건 좋은 거고. 아무리 자외선 차단제를 다들 치덕치덕 발랐다고 한들 머리 위에서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이대로 타 죽기 전에 빨리 물에나 들어가고 싶다. 시들시들하니 말라 가고 있는 와중 신난 목소리에 다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번이 동남아는 처음이라고 했나?”
혜성이 무슨 표정만 보면 자기가 지원을 낳은 것처럼 웃으며 묻자 지원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해외 나가 본 것도, 우리 일정 때문에 나온 게 처음이었으니까….”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지만 굳이 의식할 필요가 있나. 가볍게 어깨를 톡톡 쓰다듬어 주고는 한 명씩 구명조끼를 입고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파도 때문에 좀 출렁이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스노클링 하는 장소로 채 도착도 하기 전부터 아름다운 통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욱… 욱…! 우웩…!”
시작은 예상 가능하다시피 정은찬이었다. 하연도 멀미 때문에 얼굴이 약간 질린 채로 안절부절못하며 은찬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애써 갑판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끔찍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고 있으려니 정면에 앉은 제현호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 아까부터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
원래도 좀 조용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좀 불안하지 않나. 제현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창백하게 혈색이 빠져 있었다.
“괜찮아? 등 두드려 줄까?”
가까이 가서 묻자 제현호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존심 세우지 말고 그냥 토해. 다른 형들도 다 토하고 있잖아.”
여기서 형들이란 은찬과 혜성이었다. 규민도 썩 표정이 밝진 않은데 그 정도로 힘들어하는 것 같진 않고,
출발하기 전에 미리 멀미약을 먹어 두었는데도 뱃멀미가 심한지 절반 가까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나마 막내는 생생해 보이는 게 다행인가.’
스노클링도 태어나 처음이라 잔뜩 기대한 것 같던데. 기껏 배 타고 멀리까지 나와서 멀미 때문에 제대로 못 즐기면 너무 아쉬우니까.
걱정이 무색하게 모터 쪽에서 튀는 물보라를 구경하고 있었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말해. 더럽다고 신경 쓰지 말고. 여기서 토하는 사람 너만 있는 거 아니고 다른 패키지 팀에서도 많이 나와.”
그러자 현호가 거기까지 거절할 기력은 없는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더 먼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을 때는 다들 피로에 찌든 상황이었다.
“어, 하, 한 명씩 천천히 난간 잡고 내려가시면 돼요.”
매니저가 슬쩍 멤버들 눈치를 보며 안내를 전해 주자 제일 먼저 지원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우와, 물 온도 딱 좋다!”
물 온도가 좋다는 걸 보니, 너무 차가운 것도 아니고 미지근한 것도 아니고. 딱 여름 바다 느낌을 느끼기에 적절한 온도인 듯싶었다. 조심스럽게 나도 난간 쪽으로 가서 발을 담그자 적당히 시원한 온도의 바닷물이 기분 좋게 발을 감쌌다.
“형도 얼른 들어와!”
“응.”
은찬은 아무래도 그른 것 같고. 하연이 일대일로 꼭 붙어서 챙겨 주고 있으니 괜찮겠지. 그나마 회복된 멤버들을 추슬러 바다로 뛰어들자 열기라도 좀 식어서 살 만한지 얼굴이 실시간으로 펴졌다,
“아, 살 것 같다.”
“우와, 아래에 물고기 엄청 많아!”
가이드분이 하나씩 나눠 준 고글을 쓰고 내려다본 발아래의 풍경은 물 밖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장관이었다.
“예쁘긴 하네….”
어렸을 때 이미 경험해 보긴 했지만. 가족들과 온 게 아니라 나름대로 친구… 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멤버들과 온 건 또 처음이라 색다른 기분이었다.
“에잇, 에잇-!”
웬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물을 뿌려 대는 녀석도 있고 말이지.
“아 뭐야. 누가 물 뿌려.”
결국 물고기는 뒷전으로 각자 서로에게 한 번이라도 더 물을 먹이기 위한 대난투가 벌어지면서 혼란이 따로 없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될 일인가… 잠시 후 다들 물에 쫄딱 젖은 채로 갑판 위로 다시 올라와 돌아올 준비를 하려니 은찬이 겨우 회복되어 있었다.
“형, 발이라도 담가 봐요.”
여기까지 와서 배 위에서 헤롱헤롱 늘어져 있다만 가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한참 동안 은찬을 돌보다가 마지막이 다 되어서야 물에 뛰어든 하연까지도 웃으며 손짓하자 은찬이 조심조심 난간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아픈 사람한테까지 장난을 치진 않겠지?’
영인이나 규민이 왁, 하고 밀거나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그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나 은찬 혼자 어어, 균형을 잃더니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어푸, 헉, 어푸푸푸.”
“헉, 괜찮아?”
“괜찮아요!?”
다들 놀라 은찬에게로 다가가는 와중 규민과 영인이 황급히 소리쳤다.
“나 아무것도 안 했다!?”
“저도요!”
그래 우리도 봤으니까 알아. 겨우 정신을 차린 은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고개를 든 순간. 다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풋, 푸하하하하, 아 죄송해요.”
“흡….”
나는 이 장면까지도 고스란히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한번 브이 자를 그려 주었다.
뭐 다들 재밌어 보이니까 된 거겠지. 그렇게 또 미션이 하루 뒤로 밀려 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