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모를 줄 알았나 (4)
“…….”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물갈이로 배탈이라니. 어이없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데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곧 리허설 하러 이동해야 하는데 괜찮을까?”
당장 시간이 많지 않았다. 건강상의 문제로 규민을 빼고 팬 미팅을 진행하려거든 동선을 지금부터 수정해서 맞춰 봐야 하는데.
안무는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앉아서 노래 부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화장실 급해져서 뛰쳐나갈 수는 없으니 안 되나?
나도 마음 같아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푹 쉬게 해 주고 싶은데 일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한 시간만 더 재우자. 자고 일어나서도 많이 아프면 오늘 공연은 우선 일곱 명이서 진행하는 걸로 하고.”
“…….”
다들 선뜻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고 있었으나 심란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딱히 어디 크게 아팠던 적이 없구나, 다들.
각자 알아서 잘 관리한 덕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다들 건강 체질이었다. 겨울에 그 고생을 하고 그 추운 데서 달달 떨어 가면서 대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흔한 감기 한번 유행한 적 없으니까.
‘기관지 쪽은 또 보컬이랑 연결되어있으니까 다들 알아서 몸을 잘 사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
한 명이 감기라도 어디서 잘못 걸려 와 가지고 유행시키면 다 같이 전멸할 수도 있는 숙소 생활이어서 그런가. 내가 팀에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들 유별날 정도로 신경 쓰는 듯했다.
‘그 마음가짐으로 물도 좀 조심하지.’
이제 와서 규민을 탓한들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일단은 좀 기다려 보자.’
그리고 한 시간 후. 다시 조심스럽게 규민이 자고 있는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색색, 이마 위로 식은땀을 흘려 가며 잠들어 있는 규민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른 것 같네.’
깨울 필요도 없겠네. 이 상태로 어떻게 무대 위로 올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도 이런 상태의 멤버에게 무대를 강행하게 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일단 혈색이 이렇게 안 좋아서야 무대 위에 올라 팬들과 마주하는 순간, ‘규민이 괜찮은 거 맞아?’ 하고 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날 테니까.
나는 체념한 채 다른 멤버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깨우기도 미안할 정도로 잠들어 있어서 오늘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어느새 방으로 돌아온 매니저도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죠? 공연 취소 공지를 올리기엔 너무 늦었는데….”
매니저가 난감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곧장 대답했다.
“취소는 아니죠. 일단 공식 SNS랑 벌룬에 공지부터 올려요. 규민이가 컨디션 난조로 공연 참여가 어려워졌다고. 다음 회차부터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중국에서 멀쩡히 넘어간 멤버가 동남아시아 국가에 도착해서 곧바로 컨디션 난조라.
대부분 물갈이 문제일 것을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일이라도 정신 차리면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하다고 멤버 공지라도 올리게 하면 다들 이해해 주실 테니까.
여기까지 와서 배탈이 나서 공연을 못 한다는 게 간접적으로라도 공개하기에 영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꾀병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괜찮겠어요? 동선 수정해야 할 게 많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우리가 일곱 명이나 돼서 한 명 정도 빠진다고 무대가 그렇게 비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더불어 오늘 공연이 토크 쇼나 게임 없이 순수 퍼포먼스로만 구성된 게 아닌 팬 미팅이라는 점도 천만다행이었다.
“지금부터 해 봐야죠. 저희 미리 대기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동선 맞춰 볼 수 있도록 공간이 넓으면 좋겠는데….”
“한번 연락해 볼게요!”
동선 변경 준비를 위해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바람에 혼돈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뭐 어떡해. 이 먼 땅에서 외국인인 우리를 보겠다고 와 주신 분들인데, 규민이 빠져 이미 속상할 팬들에게 그 이상의 아쉬움을 드린 채 돌아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봐야지. 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부터 먹고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다들 짐 챙겼지? 얼른 이동하자.”
멤버들을 인솔하여 곧바로 공연장으로 향하자 예정보다 길어진 리허설에 시설 관계자분께서 감사하게도 관객 입장 시간을 뒤로 늦춰주시겠다고 했다. 그래 봤자 30분 정도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여기서 형이 이쪽으로 오시고요, 자리가 비어 보이지 않도록 여기 간격을 확 줄여서….”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는 부분은 빠르게 버리고,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자.
파트는 각자 한 소절씩 담당하기로 했다. 다행히 규민의 파트가 그렇게 고음역대도, 저음역대도 아니라서 다들 무난하게 부를 수 있었다.
“그래도 뭔가 어색하다, 그지?”
잘 불러 놓고 뭔가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라도 든 것일까. 지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쁘지 않아. 그 느낌으로 부르면 돼.”
“응!”
확실히 나도 계속 규민의 목소리로 들었던 파트여서 그런가. 다른 멤버가 부르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들 잘 부르는데 뭐가 문제지.’
스스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입만 산 것 아니냐며 과소평가하곤 하는 녀석이지만. 다른 멤버로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내일은 자빠져 있으면 안 된다.’
혹시라도 우리가 한창 공연 중일 때 규민이 일어나 기겁하기라도 할까 봐 문자도 남겨 주었다.
[나] 너 못 일어나길래 동선 바꿔서 공연 진행하기로 했어. 걱정 말고 푹 쉬어. 내일 공연은 꼭 너도 같이해야 한다. 오후 4:11
옆에서 보고 있던 영인이 한마디 토를 달았다.
“형 그렇게 보내면 내일 공연도 빠지면 넌 더 이상 엔카운터가 아니다,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보내고 나서야 그런가? 잠깐 고민이 되었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그런 의도로 보낸 건 아니지만 본인도 긴장하고 열심히 하려 하는 효과를 낸다면 나쁠 건 없지 않나… 까지 생각하고 있으려니 영인이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우우, 피도 눈물도 없는 보컬 살육 머신 우우!”
“뭐라는 거야. 너 또 어디서 이상한 인터넷 밈 보고 왔지.”
저거 진짜 몰래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바꿔 버리든가 해야지.
쯧. 혀를 차고 공연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는 내내 규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뭐… 우리가 끝나고 돌아갈 때까지 푹 자고 있으면 그것대로 다행이지만.’
정말 자고 있는 게 맞나 뒤늦은 걱정이 되기 시작할 즈음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인수 씨! 잠깐만 이쪽으로 와 주실래요?”
예정되어 있는 솔로 무대 때문에 잠깐 연출상 상의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확인을 마치고 나니 객석에 하나둘 팬분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오늘도 파이팅 해야지!”
규민의 빈자리가 생긴 만큼 허전함을 느끼시지 않도록 우리가 더 열심히 무대를 채워야 했다.
괜찮아, 다 잘할 수 있어. 짧은 구호와 함께 시작된 무대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끝났다.
***
“어우, 내내 에어컨만 쐬려니까 춥다.”
마침내 길었던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는 조명을 쬐느라 추운 것도 모르고 땀을 뻘뻘 흘렸는데 백스테이지로 이동하고 나니 그제야 오한이 들었다.
“얼른 땀 닦고 호텔로 이동하실 게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겨우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안도하는 매니저를 보고 있으려니 나도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아무튼 오늘 공연은 잘 마무리됐고… 내일도 여차하면 오늘처럼 넘기면 되겠지만 그럼 팬분들이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려나.’
공연이 끝나고 공연 중에 찍은 팬 계정의 사진을 기다리고 있을 팬들도 상당할 터였다. 다른 멤버들은 이번 공연에 맞춰 특별히 제작한 컨셉 의상과 메이크업으로 멋진 사진들이 쭉쭉 올라오는데 규민만 없으면 아무래도 아쉬워하는 분들이 계시겠지.
내일은 좀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어차피 우리도 잠은 규민과 같은 방에서 자야 하기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 안색을 살피자 규민은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어째 이렇게까지 태평하게 자고 있는 걸 보니 조금은 열받는데.’
아파서 숨넘어가길 바란 건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드르렁 입까지 벌려 가며 자고 있는 걸 보니 조금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기만 해 봐라 잔소리를 아주 3시간은 해 줘야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고개를 돌린 그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규민의 핸드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뭐지?’
무심코 화면을 들여다보자 누군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발신인이 어디 보자….
[그러니까머리카락이도망가지]
뭐냐 이 저장명. 어이가 없다 못해 기묘한 집요함까지 엿보이는 긴 저장명이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감도 안 왔다.
‘자는 데 방해될 테니까 잠깐 뒤집어 놔 주자.’
슥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 두려던 그때.
“앗.”
이게 분실 무서운 줄 모르나. 잠금도 안 걸어 놨는지 그대로 조금 전 도착한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말았다.
‘뭔데 이렇게 길어?’
수상한 제목에 수상하리만치 긴 문자. 별로 좋은 짓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민감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산.’
‘배은망덕.’
‘염치.’
뭐야? 아무리 봐도 좋은 분위기에서 오갈 만한 단어들은 아니었다. 누구길래 이런 험악한 단어를 쓰는데.
남의 문자를 함부로 보는 게 무례라는 자각은 있어 우선 시선을 돌렸으나 더는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너 그 방송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게 얼마인데 이제 와서 그러는 거 아니다. 우리가 부모 자식처럼 믿고 맡기는 관계였지 언제부터 그렇게 따지고 드는 사이가 된 건지 굉장히 속이 상하는구나. 지금은 네가 큰 주목을 받고 있으니 주위에서 널 시기해 흔들어 놓기 위해 유혹이 많을 때다. 널 진짜 위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뭔 혀가 이렇게 길어? 쓸데없이 알고 지낸 세월과 의리를 강조하는 게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입발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