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모를 줄 알았나 (3)
“감사합니다! 엔카운터였습니다!”
“유어 뉴 유니버스!”
“엔카운터!”
“감사합니다!”
공연은 스타트부터 순조로웠다. 남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섰을 때처럼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고 다들 간만에 선 단독 콘서트에 흥분한 듯 보였다.
‘앞으로 일정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너무 날뛸까 봐 오히려 걱정이었지.’
2시간 동안 온갖 토크와 게임, 무대 등으로 떠들어 대야 하는 자리인지라 중간에 방전이라도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자 은찬 씨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도 대기 부탁드립니다!]
기본적으로 멤버가 여덟 명이나 되다 보니 서로 부담이 덜어진다고 해야 하나. 다른 멤버가 주목을 받고 있을 때 표정 정도만 신경 쓰면서 기력을 비축해 둘 수 있어서 걱정한 것만큼 힘이 들진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팬 미팅을 마치고 마지막 순서인 퇴근 인사까지 마무리.
내일 서에서 동쪽으로 상공을 가로질러 이동해야 하는 스케줄만을 남겨 두고 호텔로 돌아오니 다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 오늘 진짜 재밌었다!”
출발하기 전 우당탕탕 온갖 소란을 일으켰던 지원도 활짝 웃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잠깐 사장님한테 연락해 볼 시간이 되려나….’
국제 전화는 좀 그렇지만 메신저 보이스 톡은 따로 돈이 나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무심코 시간을 한번 확인해 봤다가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전화하는 게 민폐인 시간이어서 얌전히 그만두었다.
‘일단 최소한 일본 일정만이라도 끝나고 생각하자.’
이틀 후 도쿄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상해로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또 시차가 있는 지역을 쭉 돌 예정이어서 기회는 내일뿐이었다.
‘내일 이동 중에 로밍 신호 잘 잡히거나 와이파이 잘 터지면 그때 연락드려 볼까.’
아무래도 단체 이동을 하다 보니 나 혼자만 따로 빠져나갈 타이밍이 안 될 것 같긴 하다만.
그리고 예상한 대로. 다음 날 나는 단 한 순간도 멤버들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날씨 왜 이래요? 우리 이래서 비행기 뜰 수 있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우리나라보다 따뜻해야 할 관서 지역까지도 때늦은 한파에 얼어붙어서는 비행 편이 줄줄이 지연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공항 와이파이도 먹통, 로밍도 문자 메시지만 겨우 드문드문 발송되는 수준으로 엉망이 되어서는 비상사태가 되었다.
“지금 떨어지면 연락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개인행동 하지 마시고 여기서 다 같이 기다려 주세요!”
매니저가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그래서 대체 언제쯤에나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는 건지 문의를 해 보았지만 기상 문제로 줄줄 난리가 난 상황인지라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눈이 빨리 그치고 기온이 올라가기만을 바라야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활주로가 얼어붙거나 블랙 아이스가 쌓여서 위험해지기 딱 좋았다.
언제까지 공항이 폐쇄되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동행한 회사 쪽 담당자분들도 분주해졌다.
“와… 눈 진짜 많이 온다.”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는 현지 사람들도 이 시기에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건 처음 본다고.
자칫하면 꼼짝 내일까지 공항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매니저가 다급히 공지했다.
“저희 다행히 표를 구해서 기차 타고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다시 주차장으로 가야 하니까 얼른 짐 다시 챙겨 주세요!”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정신이 열 개라도 모자란 듯 보였다.
“얼른 일어나자. 차 더 몰리면 주차장에서 나가는 데도 한참 걸릴 테니까.”
“응!”
슬슬 비행 편을 포기한 탑승객들이 하나둘 집으로든 숙소로든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리고 있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최소한 우리들 때문에 더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불안불안한 동생 라인들을 챙겨 렌터카에 다시 올라타자 바깥에서 불어닥치는 눈보라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설마 기차도 안 가고 그런 건 아니겠죠?”
“기차는 괜찮다는 것 같아요. 조금 지연은 되는 것 같지만.”
출발 시간을 겨우 10분 앞두고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해 좌석에 착석하자 어느새 객실이 만석이 되었다.
“우와… 다들 난리네. 비행기 안 떠서 다 기차 편으로 돌렸나 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지기 시작하자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나왔다.
“음….”
“저기 저쪽, 사진 찍고 계신 거 맞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 시점에서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눈보라를 뚫고 이동하느라 다들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사진을 찍히는 것이 썩 내키진 않았다.
“아…. 지금 안 봐도 얼굴 장난 아니겠지.”
규민이 반쯤 시체가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자나 눌러써. 괜히 어색하게 고개 돌리거나 이상한 자세로 피해 봤자 사진만 웃기게 나와.”
피할 수 없다면 의연한 척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가시방석 같은 3시간이 끝나고 겨우 열차에서 풀려났을 때는 다들 기진맥진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다들 피곤하시겠지만 내일 무대 동선 체크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요.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점검하고 들어갈게요.”
“엑.”
다들 드디어 푹신한 침대 위에서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나 기대하고 있던 참에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요청에 표정들이 가관이 아니었다.
“내일은 어쨌거나 날이 개서 정상적으로 공연 가능할 것 같다고 하니까. 오사카에서 잘해 놓고 도쿄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할 순 없잖아.”
“아니 뭐 못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도 못 하고 있어서 놀라서 그렇지.”
다들 해이해지려 했던 마음을 다잡고 기지개를 켰다. 사전 점검도 마치고 정말 호텔로 돌아갈 일정만 남은 그때.
“응?”
계속 실시간으로 위치가 찍히는 구글 맵을 보고 있었던 하연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저… 저희 호텔로 가는 게 아닌가요?”
하연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자 웬일인지 차가 호텔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반대편으로 이동 중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불쑥 웃으며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곧 도착해요.”
“……?”
방향이 전혀 그쪽이 아닌데? 다 같이 의아해하기도 잠시. 차가 도착한 곳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고깃집이었다.
“우와!”
“저희 여기서 저녁 먹고 들어가나요?”
다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자 매니저가 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오늘 대표님한테 금액 제한 없다고 승인받았으니까요! 다들 고생 너무 많으셨고 비용은 생각하지 마시고 드시고 싶으신 대로 마음껏 드세요!”
그리고 그 순간 매니저의 뒤통수 뒤로 한줄기 후광이라도 비치는 것처럼 상황이 반전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애써 메뉴판의 가격대를 이건 나는 모르는 숫자다, 최면을 걸듯 무시하며 오늘만큼은 체력을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든든히 입에 넣었다.
“아 진짜 맛있다. 소스가 되게 달달한데 맛있네.”
“으음… 우물우물…”
너 나 할 것 없이 평소에 많이 안 먹는 편인 은찬까지도 보통 먹는 양의 두 배는 먹어 치우자 쌓여 가는 접시가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진짜 세 자릿수 넘어가는 거 아니야?’
문득 뒤통수가 서늘해져서 슬쩍 계산서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는 훨씬 적은 금액이 찍혀 있었다.
‘그래도 회사 입장에서 꽤 큰 지출일 텐데 고맙네.’
슬슬 이러다 정말 사람 잡는다고 엄살이 나오기 좋은 타이밍에 최적의 처방이었다.
모두 언제 불만을 품었냐는 듯 행복하고 반질반질한 얼굴로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내일 공연을 위해서라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이래서야 사장님한테 전화하는 건 일정 다 끝나기 전에는 턱도 없는 희망 사항이겠는데.’
그리고 그 예상 그대로 상해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까지 개인 시간은 1분 1초도 주어지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갔을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버리니까 진짜 답이 없네.’
중국에서는 또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와 화보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은 쉴 수 있겠지만 하필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나와 하연이 앰배서더로 활동 중인 브랜드의 패션 행사가 우리 일정과 겹쳐서 대외적인 입장상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가 놓고 행사는 무시하고 돌아온다면 그것대로 브랜드에 무례한 일일 테니까.
상해 다음으로 향할 도시는 필리핀의 마닐라.
‘필리핀에서는 일정이 좀 넉넉하니까 그때는 꼭 시간을 내야지.’
그러나 한번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기만 하는지 또 다른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
“…….”
“몸은 좀 괜찮아?”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규민이 입술까지 새파래진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상태로는 대답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여서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규민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탁, 내가 호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기 무섭게 우당탕 안에서 다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상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재빨리 방금 닫고 온 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다른 방문을 두드렸다.
“나야. 문 좀 열어 줘.”
그러자 철컥. 안에서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원이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규민 형은? 좀 괜찮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상태가 말이 아닌가 봐.”
“어떡해, 정말….”
그러니까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면… 사건의 발단은 어젯밤으로 돌아가야 했다.
상해에서 마닐라까지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비행시간도 길지 않고 무난하게 이동하나 했더니만.
내리자마자 성질이 뭐가 그렇게 급한지 규민이 무심코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식수대에서 물을 마셨다.
‘너네는 안 마셔도 돼?’
목을 축인 규민이 상쾌해 보이는 얼굴로 권하기에 다들 마음이 약간은 동했으나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다들 기분 내기용으로 음료수를 한 잔씩 마시고 내린 덕에 규민 말고는 그리 물 한 모금이 간절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우린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다들 거절하고 일단 짐을 풀기 위해 호텔로 향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각자 넷씩 쪼개져서 침대를 정하던 그때. 매니저가 어디선가 생수 수십 병들이 묶음을 들고 나타났다.
‘여기서는 석회질 물 때문에 물갈이하는 사람 많으니까 꼭 생수만 드셔야 해요. 혹시라도 상태가 좀 안 좋다 하면 말씀하시고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새벽부터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