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212화 (212/224)

#212. 수면 아래에 묻히면 (4)

“어… 저 한국 나이로 올해 스무 살이요!”

호주의 법적 성년 제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딱 좋네요.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타지에서 생활하기 힘들지 않아요?”

그거야 뭐 K-pop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부분이었다. 은근슬쩍 어린애 마음 약한 부분을 집중 공략할 생각에 운을 뗐나 본데.

안됐지만 영인은 그런 게 먹힐 타입이 아니었다.

“어, 아뇨! 저 어렸을 때부터 워낙 대가족 사이에서 살아서 오히려 지금이 더 편한 거 같아요! 멤버들끼리 같이 지내니까 외로운 것도 모르겠고요.”

그러고는 활짝 웃어 보이자 노인의 얼굴에 큰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본인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던 듯 묘하게 주름이 깊어졌다.

“숙소 생활이 잘 맞나 보네요?”

“네, 같이 방 쓰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그다음으로 이어진 대화는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앞으로 계속 아이돌 활동만 할 거냐. 연기 같은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볼 생각은 없냐. 보컬 실력이 탄탄한 것 같은데 아이돌 장르 말고 다른 음악은 생각해 본 적 없냐.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골든링 쪽에서 어떤 이미지의 구성원을 영입하길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일반 발라드 보컬곡도 잘하고 팝송 스타일도 소화하면서 아이돌 음악도 잘하고 거기다가 이국적인 페이스로 외국에서까지 먹힐 수 있는 연기돌… 같은 걸 원하나 본데.’

다장르를 소화하는 표영인, 까지는 그런대로 상상해 볼 수 있었으나 연기? 연기?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마 본인 캐릭터에 맞는 철부지 배역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당장에 MV용 가대본을 읽는 것만으로도 서로 웃겨서 죽을 뻔했던 와중에 진지한 연기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입만 열었다 하면 이미지가 와장창 친근하게 되는데 어떡하냐고.’

영인은 지금 그대로, 무대 아래에서는 친근하고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빛나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그걸 억지로 원하는 이미지에 끼워 넣는다고 되겠냐.’

사측에서 원하는 이미지를 덧씌우면 씌우는 대로 소화하고 어울리는 사람도 있고, 또 그 수가 적지도 않겠지만. 영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둘 때 가장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별로 안됐단 느낌은 아니지만 헛다리 짚었네.’

골든링 대표가 얼마나 감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니까 요즘 도는 얘기들이 다 계약 파기 못 해서 붙들린 중견 가수들만 남아 있는 옛날 소속사란 소릴 듣지.

속으로 나도 모르게 잔뜩 비난을 늘어놓고 나니 영인도 슬슬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이제 들을 만큼 들었으니 계약 조건마저 듣고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다고 하면 되나.’

아마 순순히 보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협박까진 안 하더라도 오늘 들었던 내용은 절대 외부에 유출해선 안 되며 유출할 시 무슨 영업 기밀 누설로 고소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우리도 준비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압박하려 하겠지.

그걸 막는 건 내가 할 일이고. 어차피 영인 성격상 그런다고 원치 않는 계약에 ‘아! 네! 그럼 여기서 도장 찍고 갈게요!’ 할 녀석도 아니긴 하지만.

“음, 그러면 일단 우리 쪽에서 작성한 가계약서부터 설명을 해 줄 테니까….”

박 대표 쪽에서도 영인의 집중력이 바닥난 걸 눈치챘는지 내내 서류 봉투 안에 넣어 두고 있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어떤 조건인지 내용이나 좀 볼까.’

내내 옆에서 잠자코 듣기만 했던 내가 스윽,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뒤에서 불쑥, 우리를 맞아 주었던 직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민감한 부분이다 보니까, 인수 군은 잠깐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는 순간 영인과 눈을 맞췄다.

‘이거 사인하지 마.’

내가 눈으로 의사를 전달하자 영인이 알아들었다는 듯 짧게 눈을 찡긋거렸다.

저걸 믿어도 되나 몰라. 그래도 눈치껏 아무튼 내가 하라는 대로 해서 나쁠 게 없다는 건 알 테니 괜찮으려나.

“네, 알겠습니다.”

나는 더 소란 피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정원이 엄청 예쁘거든요. 온 김에 한번 보고 가요. 대표님이 정말 정성껏 가꾸신 연못도 있어요.”

입구에서 보이는 것만 봐도 조경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 같긴 하다만.

직원의 안내에 따라 뒷문으로 난 산책로로 향하자 과연 단순한 접객용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도 다 회삿돈으로 가꾼 건가. 이 정도면 그냥 대표 취미에 횡령한 수준 아닌지….’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도 나도 모르게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된 이유는,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정원 가득 온갖 비싸 보이는 분재와 나무들이 심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분재나 나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냥 딱 봤을 때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휘었나 하는 놀라움을 자아내는 나무일수록 수억 원을 호가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런 정원을 서울 한복판에 갖다 놨어 봐라, 팬들이 오고 가면서 지금 소속 연예인들 서포트에나 돈 쓸 것이지 나무에 몇억씩 처바르고 앉아 있다 욕하고 난리 났을 텐데.’

이렇게 외진 곳에 있으니 팬들의 눈초리도 피한 채 회삿돈을 유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 의심에 정점을 찍은 건 말마따나 대표가 공들여 가꿨다는 연못이었다.

“와….”

계절이 겨울이라서 그렇지. 여름이나 봄에 왔으면 엄청났겠는데.

이미 다 져서 죽은 줄기만 남아 있는데도 연꽃이 어찌나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름에 꽃 피면 정말 장관이에요. 수면 위가 쫙, 꽃으로 뒤덮여서 물이 분홍색으로 보일 정도라니까요.”

내가 자세히 보기 위해 연못 가장자리에 둘린 울타리 쪽으로 다가가자 직원이 가볍게 주의를 주었다.

“참. 여기 수심이 꽤 깊으니까 조심하세요. 수영에 자신 있다고 해도 물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식물들도 많고 뿌리에 잘못 엉키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이 어쩐지 조금은 섬뜩하게 들렸다.

“여기서 사고가 난 적도 있었나요?”

내가 무심코 묻자 직원이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가 여기로 이사 온 후부터는 없는데요. 인수하기 전에는 있었다고 들었어요. 저희끼리 농담처럼 물 다 빼내면 수면 아래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했거든요.”

아까 건물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 붙어 있던 기념패에 적힌 건축 연도는 10년이 채 안 됐다.

소름 돋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서천향도 여기에 밀어 버리고 실종됐다고 둘러댄 거 아닌가 생각해 버렸으나 시기를 생각하면 불가능했다.

“여기로 사옥을 옮긴 지 얼마 안 됐나요?”

내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다는 듯 물어보자 직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한 5년쯤 됐나 그래요. 전 소유자분한테서 구매한 지도 그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그럼 애초에 이 건물도 사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진 건 아니었다는 거네.

일하는 건물치고는 굉장히 그냥 부유한 가정집 주택처럼 생긴 이유가 단번에 이해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직원이 누군가에게서 핸드폰으로 연락을 받더니 나를 다시 건물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요, 잘 생각해 보고 연락 줘요. 아직 뭐 영인 군 입장에서 급할 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세계에선 시간이 금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왜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도 있잖아. 시기를 놓치면 안 돼.”

말은 생각해 보고 연락 달라지만 사실상 너한테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압박하는 배웅 인사에 웃음이 나왔다.

“저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습니다.”

내가 꾸벅 박 대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박 대표자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또….’

무슨 생각으로 날 보는 거지 싶어서 어차피 정중하게 인사도 했겠다 빤히 눈을 마주치자 박 대표가 뜬금없이 물었다.

“정원이 마음에 들었어요?”

갑자기? 속내가 바로 파악되지가 않아서 나는 일단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잘 꾸며 두셨더라고요. 겨울인데도 이 정도면 봄 되면 정말 엄청 멋질 것 같았어요.”

칭찬이나 하자.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박 대표가 의미 모를 말을 덧붙였다.

“연못이 참 크죠? 6월쯤 되면 정말 장관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계속 자랑을 하는지….

“난 연꽃이 정말 좋더라고. 멋있지 않아요? 더러운 진흙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나는 꽃이라니.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은 영원히 모르는 게 낫다고 증명하는 것 같잖아.”

뭐지 이거. 나한테 경고라도 하는 건가. 순간 서늘해진 분위기에 나는 더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한창 꽃 필 때는 정말 물 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쯤 되니 계속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말만 늘어놓는 것을 듣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박 대표가 듣기 싫을 만한 말을 꾸역꾸역 내뱉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라서 그런가. 물이 꽤 맑던데요? 얼어붙지 않은 곳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다 보이더라고요. 덕분에 재밌게 구경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자 포커페이스를 잃고 표정이 찌푸려지는 게 아주 장관이었다. 곧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회복하긴 했지만.

“그래요, 잘 보다 간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영인 군은 곧 다시 연락합시다.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둘 다.”

그 말에 영인도 마저 인사를 하고 차를 대 놓았던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좀 수상한데….’

정말 그 연못에 사람 몇 명 담가 놓기라도 한 거 아냐? 나는 차에 올라타기 직전. 영인에게 부탁했다.

“잠깐만 나 아까 정원에서 뭐 좀 떨어트리고 온 것 같은데. 다시 보고 올게.”

다행히 주차장이 정원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정원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직원에게 말을 걸거나 어디 울타리를 넘어야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잠깐만 다시 보고 오자. 걸음을 서둘러 연못 근처로 향하자 나무로 된 울타리 안쪽으로 어느새 져 가는 노을빛이 반사되어 빛나는 것이 보였다.

‘뭐지? 금속으로 된 파편 같은데….’

슥, 울타리 아래로 몸을 숙여 팔을 뻗자 손끝에 차가운 뭔가가 걸렸다.

‘이게 뭐야?’

겨우 손에 넣은 물건은 작은 금속제 장식이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디자이너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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