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수면 아래에 묻히면 (2)
“어… 고맙다…?”
근데 이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약간의 의아함과 함께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뭐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니까 더 해명 안 해도 괜찮겠지. 나는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올려 덮고 잘 준비를 했다.
‘역시 이불 속이 최고야….’
비공개 연애도 체력과 정신력과 그만한 정성과 뻔뻔함이 있는 녀석들이나 하는 거지. 연애고 나발이고 활동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일로 발에 불나게 뛰어다니느니 얌전히 이불에 등 대고 쉬는 게 백번 나았다.
‘활동기 풀 스케줄로 돌면서 연애까지 하는 거 진짜 보통 난놈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니까.’
보통은 본업 활동 쪽에 조금씩 신경을 덜 써서 문제가 터지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성을 들일 생각도 없고 여력도 없어서 아마 팀 멤버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안전한 축에 속하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다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은근히 신경 쓰고는 있나 보네.’
다른 멤버들에게 들려주기 싫어서 자리까지 옮겨야 할 정도의 통화라고 하면… 보통은 가족 일 정도로는 웬만큼 큰일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잘 안 나가니까.
본 소속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전화 통화를 요청했을 때가 아니면 다들 귀찮아서라도 집 안에서 통화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설마 연애설 다음에는 해체한 후에 어디로 갈 거냐고 캐묻고 궁금해하는 거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자 아직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현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별일 아냐. 그냥 갑자기 뭐가 좀 생각나서.”
그러고 보니 다들 해체 후의 진로(?)는 잘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규민처럼 본소속사가 좀 탄탄하고 연습생 풀이 있는 곳은 활동 기간이 끝나는 대로 바로 새 그룹의 데뷔 조에 합류시키겠지.
영인같이 올라운더로 잘하는 애들은 솔로로 데뷔시키는 것도 방법일 거고.
‘공민형이 생각보다 데뷔 성적이 안 나온 걸 보면… 회사에서 모험을 안 하려고 할 수도 있겠다.’
데뷔할 때만 해도 이렇게 구체적인 부분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제 슬슬 정말 준비해도 이르지 않은 시기였다.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인가.’
나도 지금 과거 일을 파헤친다고 돌아다닐 게 아니라 내 소속사 구하러 수소문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궁금해졌다.
“너는 우리 활동 기간 끝나면 어떻게 할지 소속사랑 의논해 봤어?”
불쑥 제일 가까이에 있는 현호에게 묻자 현호가 ‘자기 직전에 그런 얘기를?’ 하고 써 놓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아직 구체적인 얘기는 없는데요.”
하긴 제현호가 계약한 소속사는 워낙에 소규모라서 당장에 데뷔 조를 준비하지는 못할 것 같긴 했다.
그럼 일단 솔로로 예능 정도만 돌리거나 OST 작업 정도만 하다가 후에 배우로 전향하는 루트로 가려나.
다른 서바이벌 출신 선배님들의 예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중형 이상의 소속사로 돌아간 멤버는 새 그룹으로 재데뷔, 중소형 소속사에서는 솔로 데뷔, 소형에서는 배우로 전향, 이 정도 루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프로젝트 그룹으로 활동할 때 모아 둔 수익으로 일찍이 은퇴해서 종종 팬 이벤트나 광고 모델 정도만 하면서 지내기도 하더라.
‘어쩌면 그게 인생의 승리자일 수도 있어.’
프로젝트 그룹이 대박이 나서 일찌감치 은퇴할 수 있을 만한 정산금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투어 돌고 나면 나나 영인은 그렇게 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뭐 나야 집에서 쉬면 몸에 녹스는 줄 아는 타입이니까.’
막상 은퇴한다고 하면 매일매일 느긋한 백수 라이프를 즐기기보다는 노래하고 싶어서 계속 무대 주변을 얼쩡거릴 것이 뻔했다.
‘나도 슬슬 여기저기 미팅 연락 오는 거 거절하지 말고 얘기는 들어 봐야겠네.’
그동안은 아직은 논의할 시점이 아닌 것 같다고 거절해 왔으나 이제는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음 주에 출국하기 전에 한번 또 일정을 잡아 보도록 하고.’
갑작스러운 질문 탓에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현호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이제 슬슬 고민해야 할 시기이긴 한 것 같아서. 알다시피 난 소속사가 없잖아.”
“아.”
현호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이겠네요. 당장에 정해진 게 없으면.”
“아무래도?”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보다도 서천향에 대해 어떻게 더 캐낼 수 있을지였다.
활동 기간 이후의 행보도 내 목이 잘 붙어 있을 때의 얘기지 미션 실패해서 다시 술병 굴러다니는 옥탑방으로 돌아가면 무슨 소용인데.
나는 슬금슬금 이제 다시 잘 준비를 하겠다는 듯 현호 쪽으로 등을 돌려 누웠다,
‘아까 비안 반응을 보니까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던데.’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비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서천향 선배님? 선배님은 왜?’
‘아, 다른 게 아니고 저희 어머니가 팬이셔서요. 이번에 리마스터링 앨범 나오는 거 구매하면 유족분들한테 수익이 가는 건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그 한창 소속사가 저작권 가져간 걸로 말 나왔었잖아요.’
어머니, 죄송해요. 졸지에 어머니를 핑계로 대고 말았으나 비안에게 서천향에 대해 묻기에는 이쪽이 제일 자연스러운 변명거리였다.
‘아~ 으응… 좀 사정이 복잡하기는 한데. 뭐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얘기하기 좀 그렇지만 지금 나오는 건 유가족분들께 수익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면 아마 아닐 거야.’
나는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래요? 뭐 수익의 몇 퍼센트 이런 것도 전혀 유족분들께 전달되지 않는 거예요?’
내가 좀 더 본론을 캐기 위해 자세히 묻자 비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응, 좀 이상하긴 하지. 그러잖아도 선배님 실종되셨을 때 다들 말 많았었거든. 한창 히트곡 쭉쭉 내고 더 잘나갈 일만 남았던 선배님이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하신 건지 이해가 안 되잖아? 가정 내에 문제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가족들이랑 사이좋은 걸로도 유명하신 분이었고.’
‘으음….’
그리고 그 직후, 귀가 번뜩일 만한 이야기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오죽했으면 멤버들끼리도 혹시 사장님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거 아니냐고 말 나왔을 정도라니까? 테이프를 그렇게 많이 팔고 행사를 그렇게 많이 뛰었는데 선배님이 계약 조건이 좀 안 좋아서 재계약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시점에 실종되신 거라….’
그리고는 자기가 봐도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싶었는지 헉, 자기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들렸다.
‘어우 내가 진짜 주책이다. 오늘 왜 이렇게 입이 터졌니. 방금 한 얘기는 그냥 찌라시 정도로 생각해줘. 우리도 바로 아래 후배이기만 했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니까.’
비안은 곧바로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한가 너한테 정말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했다, 사과를 했지만 이쪽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골든링 대표가 숨겨야 할 비밀이라는 게 서천향과 관련된 일인가?’
정말 서천향의 실종, 이라 쓰고 죽음이라 읽는 사건과 관련된 일이 있고, 그걸 임희록이 알아 버려서 임희록까지 묻어 버렸다…?
‘이건 너무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서천향이 모습을 감춘 건 20년도 전의 일이었다. 임희록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설령 골든링 대표가 임희록과 만나서 수상한 짓을 벌였다고 해도 20년 전의 일의 진상을 임희록이 알아내서 그걸로 골든링 대표를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고 하기엔 너무 무리가 있지 않나?
‘여의도 찌라시도 이거보다는 신빙성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임희록과 골든링 대표 사이에 접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임희록에 실종 또한 골든링 대표가 손쓴 것임은 분명했다.
‘차라리 내가 한번 직접 만나 보는 게 나을까?’
고민하던 찰나 배터리를 6% 남겨두고 비안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너 내가 소개해 준 분식집 다녀갔다며?’
갑자기 느닷없이 또 떡볶이 얘기에 꽂힌 게 일부러 화제를 바꾸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티가 났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아, 네네. 맛있었어요. 사장님도 엄청 좋은 분이시고요.’
그러자 비안이 아하하, 웃으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거기 사장님 어~엄청 잘생기셨지?’
‘네? 아, 네. 예전에 연습생 하셨다더니 인물이 정말 좋으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비안이 숨넘어갈 듯 웃는 바람에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황당하기만 했다.
뭐지? 나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감안하고 기회가 된 김에 물어보기로 했다.
‘저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혹시 사장님이랑은 무슨 관계이신지….’
내 의아함이 가득 담긴 질문에 비안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어? 별거 아냐. 그냥 연습실 선후배지 뭐. 데뷔는 나만 했지만,’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끝에 비안이 설마 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혹시 내가 사장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줄 알았니?’
‘앗, 그런 건 아니지만….’
그 후 한바탕 또 마녀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거 아냐, 정말로! 그냥 뭐, 너한테 도움이 될 만한 분이니까 자연스럽게 소개시켜 줄까 싶었지.’
‘도움이요?’
‘안 됐으면 말고!’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지막 남은 배터리가 장렬히 산화하며 핸드폰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하필 그때….
서둘러 숙소로 내려와서 보조 배터리를 연결하고 비안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시간을 오래 잡아끌어서 미안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거기에 대고 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란 게 무슨 뜻인데요?’ 하고 캐묻자니 시간이 또 늦어 버려서 다시 나가기도 애매해졌다.
‘거기다 갑자기 무슨 연애하네 어쩌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아서는….’
총체적으로 꼼짝도 못 하게 되어서는 나만 뜻 모를 문장과 함께 남겨졌다.
‘내가 도움을 받을 게 뭐가 있지?’
보컬 연습 정도인가? 아니면 새 소속사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수상하리만치 연예인 인맥이 넓을 뿐인, 잘생긴 떡볶이집 사장님이 내게 무슨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는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결국 또 그걸 물어보려면 비안이랑 연락해야 하잖아.’
다음엔 전화 말고 전부 메시지로만 주고받든가 해야지. 그렇게 결심하는 사이 어느새 정말 자야 할 시간이었다.
‘일단 골든링 대표와 어떻게 하면 직접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마침내 머릿속에 남은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