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수면 아래에 묻히면 (1)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안에게서 흔쾌히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안] 오키 지금 바로 가능~ 오후 8:10
쉬고 있던 참인가.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거실을 가로질러 옥상 쪽으로 올라갔다. 다들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문을 닫고 있어서 내게 신경 쓰는 멤버는 없었다.
‘후….’
짧게 심호흡을 하고 이제는 눈에 익은 번호로 전화를 걸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응, 인수야. 무슨 일일까? 우리 후배님이 전화를 다 하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 드는 것이 어떤지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녀석이라고 찍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아,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일부러 살짝 쿠션을 깔아 둔 것이었는데 비안에게 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비안이 다시 돌직구를 꽂았다.
- 나야, 잘 지내지. 그래서 여쭤 볼 거라는 게 뭔데?
그 말투가 어쩐지 흥미진진한 가십거리를 기다리는 사람 같아서 조금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도움 많이 주신 분이니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다른 게 아니고요, 요즘 민형이는 잘 지내나요?”
처음부터 대뜸 나와는 연관도 없는 서천향 얘기를 꺼내면 좀 당황스러워하거나 의아해할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공통 화제가 될 수 있는 녀석의 인부부터 물어보았다.
- 음… 잘 지내지? 왜? 너희들끼리 또 요즘은 연락 안 하니?
또, 라기보다도 원래 안 하는 사이인데요. 어쨌거나 비안에게는 그런대로 가까워진 사이인 척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태연히 둘러댔다.
“요즘 바빠 보여서 선뜻 연락하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연말에 데뷔하고 나서 또 본격적으로 싱글 말고 앨범 준비한다고 바쁜 것 같던데 제가 연락하면 또 신경 쓰일까 봐서요.”
나름대로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모두가 뻔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로 민형의 음원 성적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 이하에 가까웠지.’
팬들 사이에서는 화제도 되고 화보다 포인트 안무도 커뮤니티에서는 좀 주목을 받은 것 같던데.
아무래도 음원이 팬 말고는 쉽게, 그리고 자주 들을 만한 스타일은 아니다 보니 아주 잠깐 음방 버프를 받아 100위 안에 진입했다가 순식간에 밖으로 튕겨 나갔다.
중소 기획사에서 나온 무명 신인이었다면 아주 잠깐이나마 차트에 든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었으나 최근 최대 히트 서바이벌에서 2위까지 올랐던 멤버의 성적치고는 시원찮았다.
‘팬들 화력이 그 정도로 안 나오나…?’
대중성이 떨어지더라도 팬들만으로도 차트 하위권에는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홍보 부족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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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민형 데뷔함? (+14)
[본문]
대체 언제 한 거냐
무슨 닌자도 아니고 소리 소문 없이 데뷔를 하네
[댓글]
[- 아니 뭔 데뷔 카운트다운이나 라이브라도 좀 하지 홍보를 뭘 한 게 없어 팬들도 모르는 사람 많을걸]
[- 바빠서 최근에 SNS 몇 주 못 들어갔는데 갑자기 데뷔 무대 와 주셔서 감사하다길래 ㅈㄴ 당황함]
[- 공방 녹화 미달 난 거 보고 개놀랐잖아 평일도 아닌데 미달??]
[ㄴ 공지를 뭔 직전에 올려서 아무도 못 봄 음방 도는 줄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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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연말 무대를 보고 소식을 접한 팬들은 양반이었다.
가뜩이나 다들 바쁜데 연말에 현생을 즐기느라 업데이트가 안 된 팬들은 공민형이 아직도 연습생으로 수납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홍보만 잘했어도 훨씬 잘됐을 텐데.’
본인도 지금까지 받아 온 기대가 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심란할 와중에 데뷔곡부터 메가 히트를 친 내가 가서 요즘 어떠냐고 물었다가는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걔 형편이 여러 번 실패해도 괜찮을 만한 상황도 아니고.’
멋진 무대에 비해 아쉬운 성적에 나 또한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라 핑계가 된 김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음….
그러자 아예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생각은 안 드는지 비안이 잠시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에 빠졌다.
- 뭐 상태가 나쁘거나 한 건 아니야. 아무래도 싱글이 막 엄청 잘되고 그랬던 건 아니니까…. 고생한 거에 비하면 주목을 잘 못 받기는 했고,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한 건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네….
역시 심란하긴 했나 보구나. 내가 잠시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비안이 서둘러 당부의 말을 붙였다.
- 참, 내가 이런 소리 했다고 말하지 마?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다닌다고 엄청 뭐라고 할 테니까.
“당연하죠. 그래도 이번에 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으니까 다음엔 홍보만 더 잘되면 분명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 그래 그러면 좋겠는데….
이제 어느 타이밍에 서천향 얘기를 꺼내면 좋을까 시기를 가늠하던 그때. 한번 물꼬가 터진 탓일까 이번에는 비안이 줄줄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하여간…. 다들 말야, 내가 아무리 나이가 어린 편이고 동기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현역이라고 해도 너무 나한테만 의지하려고 한다니까?
“아하하….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가 했더니 지금 소속사에서도 나름대로 중견 가수 입장이다 보니 경영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고, 또 현역으로 활동하기도 해서 온갖 지인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푸념이었다.
‘이거… 혹시 나도 돌려 까는 거 아닌가?’
순간 의심스러웠으나 일부러 찔리라고 하는 말 같지는 않고 정말로 본인이 힘들어서 나오는 하소연 같아 얌전히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통화가 이어지고 어느새 5분, 10분, 15분… 그리고 30분이 다 되어 가도록 이어진 통화에 핸드폰이 뜨끈뜨끈해졌다.
‘나 슬슬… 배터리 괜찮으려나?’
잠깐 아~ 하고 추임새를 넣고 액정 화면을 켜서 배터리 잔량을 확인하자 10%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이러다가 결국 진짜 물어보려던 건 말도 못 꺼내고 핸드폰부터 꺼지는 거 아냐?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재빨리 비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앗, 선배님 저 그런데 멤버들이 얼른 들어오라고 해서요. 다른 게 아니고 저희 어머니가 뭣 좀 여쭤 보고 싶으시다는데 괜찮으실까요?”
- 다들 뭐가 그렇게 일이 많은지… 엥?
나는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이젠 정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슬쩍 허공을 향해 외쳤다.
“어어, 잠깐만! 바로 내려갈게!”
마침 비안도 한창 자기 얘기를 쏟아 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으므로 지금이 베스트 타이밍이었다.
“혹시요, 서천향 선배님이랑 친분이 있으셨을까요?”
그러자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서 순간 기억이 안 난 건지, 아니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건지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가 먹먹하도록 말을 쏟아 내던 비안의 침묵에 나까지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뭔가 일이 정말 있었나?’
비안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 건 어색한 침묵이 한참 더 이어지고 난 이후였다.
***
“대체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하고 와?”
길고 길었던 푸념과 통화가 끝나고 나니 자리를 비운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말도 안 하고 은근슬쩍 사라져서는 딱 봐도 통화하러 옥상 올라갔다가 내려온 차림으로 복귀하니 여간 의심스러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영인이 기대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형 혹시….”
“너 누구랑 썸 타냐?”
그리고 그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규민이 끼어들었다.
“헐 대박, 저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을 생각은 못 했는데!”
“……!”
현관에서 들려온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문장에 다들 눈을 빛내며 방문을 열고 거실에 하나둘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오해고 뭔 꼴이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조소하며 대답했다.
“무슨 헛소리야. 비안 선배님한테 안부차 전화했다가 요즘 힘드신지 갑자기 푸념을 시작하셔서 끊을 수가 없었어.”
그러자 그게 또 오해를 낳았는지 규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 네가 비안 선배님 안부를 챙기는데? 너 그렇게나 연상이 취향….”
이게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네. 나는 결국 입구 쪽 소파에 있는 쿠션을 집어 들고 규민의 등짝을 향해 날렸다.
“야!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지? 제정신이냐? 이 입 좀! 좀!”
무슨 황당한 오해를 다 하냐는 듯 집게처럼 입을 꽉 꼬집자 규민이 억울한 눈치로 대답했다.
“이상하긴 하잖아! 우리 데뷔할 때나 겟 데뷔 출연 중일 때나 챙겨 주신 건 알겠는데 그렇게 인맥 챙기는 건 너밖에 없다?”
그건 사실이었다. 2차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미션을 수락하지만 않았어도 비안과 이렇게까지 자주 연락해야 할 일은 없었다.
공민형의 소식이 궁금하긴 해도 못 듣는다고 불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는 아니니까.
‘확실히 평범한 선후배 관계치고는 좀 너무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나 싶기도 한데….’
나는 후, 짧게 한숨을 내쉬고 해명했다.
“공민형 때문에 그래. 우리 연말 무대 할 때 데뷔한 거 봤잖아. 성적이 기대한 것만큼은 잘 안됐을 것 같아서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했지.”
“그걸 왜 비안 선배님한테 물어보는데?”
때마침 기회가 되었기에 나는 재빨리 공민형을 팔아먹었다.
“몰랐어? 거의 친남매 수준으로 가깝던데? 공민형 하차하고 나서 방청객으로 왔을 때도 비안 선배님 휴게실에서 같이 대기했었는데.”
그러자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으나 그래도 규민은 허무맹랑한 의심이라는 생각은 안 하는 듯했다.
“하여간 너, 좀 수상해.”
“수상하기는 또 뭔 헛소리야.”
“연애설 터지면 한강 물에 다이브 하기로 약속한 거 잊지 마.”
“터지겠냐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나머지 멤버들도 해산시키고 방으로 돌아오니 아까부터 듣고 있었던 듯 제현호가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눈에 보였다.
“불 끌까요?”
내심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아예 의심의 뿌리를 뽑을 겸 먼저 말을 꺼냈다.
“오해할까 봐 하는 얘긴데 비안 선배님이랑 진짜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러자 현호가 예상외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형 무대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 없잖아요.”
“응?”
“그러니까 그런 오해 안 해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담백한 대답에 내가 다 놀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