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눈앞에 가려진 것 (4)
잠시 고민하다가 겨우 핸드폰을 들고 메신저를 켜자 얼마 전에 봤을 때와는 또 달라진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정말 젊게 사시네….’
대선배님이라고 해도 데뷔를 워낙에 어린 나이에서 해서 아직 마흔도 안 되셨으니까…. 고모나 이모치고는 꽤 어린, 막내 고모 같은 느낌이려나.
새삼 엔카운터 안에서도 지원이 미성년자이자 막내로서 여러 가지로 배려도 많이 받고 귀여움도 받는 게 생각났다.
‘밀키즈도 데뷔했을 때는 그런 느낌이었으려나.’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안과 유 대표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누구 때문에 데뷔가 엎어질 뻔했는데, 라고 했었나.’
지금도 그렇게 달갑고 가까워 보이진 않지만 그때는 더 살얼음 같은 분위기였겠지. 나 역시도 데뷔 조가 몇 번이고 엎어지고 멤버가 바뀌는 과정을 지켜봐 왔기에 그때 당시 얼마나 예민하고 날 서 있었을지 조금은 예상이 되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날 아끼는 후배처럼 대해 주시는 건 꽤 대인배적인 행보 아닌가….’
유 대표가 사실상 내 친모이기만 할 뿐 부모 자식 관계로서 사이가 좋은 건 아니라서 더 내게 잘해 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내 존재도 모르고, 남남이나 다름없는 자식이 본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인물과 가까이 지내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할 테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내가 지금 취해야 할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대선배님이자 도움을 주는 감사한 어른으로서 깍듯이 대하면 된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비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언제 벌써 12시가 넘었어?’
이 야밤에 전화하는 미친 후배가 될 순 없지. 나는 얌전히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고단백 식빵으로 토스트를 해 먹고 연습실로 향했다.
어제 뭐 힘든 일정도 없었는데 하루 풀어졌다고 그새 다들 눈에 졸음기가 가득했다.
“자자, 다들 얼른 잠 깨고! 몸 미리 풀어 놔, 졸리면 가서 세수 한 번 더 하고 오고.”
당장이라도 연습실 바닥에 엎어져서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지원을 어린애 달래듯 어르고 달래서 화장실로 보내니 정신이 없었다.
‘미리 물 좀 꺼내 놓자,’
이따 한창 연습 시작되면 물 가지러 이동하는 시간도 아까울 것 같아서 미리 생수병을 꺼내 와 뚜껑을 따두자 규민이 슥 가까이로 다가왔다.
“……?”
또 뭘 하려고…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규민이 순간 쇽, 병의 입구에 뭔가를 탁탁 털어 넣었다.
“뭔데?”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물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히비스커스 티. 칼로리 없고 물 대용으로 마셔도 되는 거니까 그냥 마셔. 나 실수로 두 개 뜯어서.”
“그럼 좀 말 좀 하지.”
평소 수분 보충용으로 어디서 그렇게 가져오는 건지 콤부차니 옥수수수염차니 별별 차를 다 마시는 규민과 달리 나는 항상 맹물파였다.
입맛이 까다롭거나 맹물만 좋아하는 건 아닌데 챙기는 게 귀찮기도 하고 굳이 거기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아서.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는 얼굴로 빨갛게 물든 내용물을 마시자 약간의 상큼한 맛이 느껴졌다.
‘나쁘진 않은데 굳이….’
“나쁘진 않은데 굳이 돈 주고 사 먹을 건 아니다.”
“……?”
머릿속으로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규민이 옆에서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따라 말했다.
“맞지? 표정이 딱 그거네.”
내가 순간 귀를 의심하며 규민을 쳐다보자 규민이 아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감싸 쥐었다.
“맞지?”
맞긴 한데… 뭔가 이 녀석에게 마음을 다 읽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진 않은데. 나는 슬쩍 오리발을 내밀었다.
“아닌데?”
“거짓말.”
“아니거든.”
어린애들도 아니고 티격태격 말장난이나 하고 있으니 곧 트레이너 쌤이 들어와 주의를 끌었다.
“자자, 다들 대열 정리하시고! 이따 오후부터 백업팀이랑 같이 맞춰 봐야 하니까 너희들끼리 연습하는 건 오전 내로 다 완벽하게 숙지한다고 생각을 해야 해. 서두르자!”
말마따나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병을 내려놓고 내 자리로 향했다.
***
잠시 후 연습이 마무리됐을 때는 아직 저녁을 먹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시점이었다.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도 점심 한 시간 쉬고 밤늦게까지 내내 연습 강행군을 달리는 것은 무리한 일정인지라 하나둘 픽픽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 죽겠다….”
규민이 냅다 등을 대고 눈을 감자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멤버들이 하나둘 주섬주섬 여분으로 가져온 외투 등을 바닥에 깔고 몸을 뉘었다.
“…….”
나중에는 그 까탈스러운 은찬조차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지 가방을 깔고 옆으로 새우처럼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체력만 생각하면 지금 제일 지칠 만도 하지.’
마음 같아서는 저녁 먹고 다시 와서 맞춰 보자고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했다가는 은찬이 다음 발매 곡에서 내 파트를 1초로 만들어 버릴 듯했다.
‘그건 곤란하니까….’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고는 모두의 주의를 끌어모았다.
“다들 저녁 어떻게 할 거야?”
“전 그냥 셰이크 먹고 때우려고요.”
“나도.”
“집에 단백질 빵 사다 놨어.”
“샐러드 오늘 안 먹으면 상할 것 같아서 다 먹어 버리려는데.”
한창 투어 준비로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였기에 다들 관리를 하느라 난리였다. 어쨌든 다들 집에 가서 먹겠다는 거고, 연습실은 오늘 쭉 써도 된다고 했으니 남아서 솔로 파트만 좀 연습해야겠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서 쉬어. 여기서 늘어져 있는 것보다 씻고 제대로 쉬는 게 낫지.”
그러자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짐을 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은요?”
운동화를 집어넣기 위해 가방을 풀어 헤치던 현호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솔로 파트 좀 더 연습하고 가려고.”
“아.”
솔로곡처럼 번듯하게 별도 무대를 할당받은 건 아니지만 인트로에 잠깐 내 솔로 파트가 2분 정도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리 대단한 연출이나 공임이 들어간 자리는 아닐지라도 수 분간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저도 좀 봐도 돼요?”
굳이? 그냥 가서 쉬는 게 낫지 않나 싶었으나 제현호도 눈썰미만큼은 좋은 녀석이라 한번 보고 아쉬운 점은 없는지 평가해 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너 편한 대로 해.”
굳이 나 때문에 고생할 필요는 없는데. 덤덤하게 대답하자 다른 녀석들은 숙소로 같이 이동하고 제현호만 연습실 한구석에 남았다.
‘뭔가 한 명한테만 보여 준다고 생각하니까 민망한데.’
그것도 그냥 관객도 아니고 팀 메이트라서 더.
내가 주춤거리는 게 티 났는지 제현호가 나름 배려랍시고 내게 말을 걸었다.
“저는 그냥 의자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하세요.”
덩치가 180이 넘는 의자가 어디 있는데.
구깃구깃 구석에 몸을 말고 앉아 있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그래.”
괜히 어깨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거나 빠지거나 해서 어색하기도 잠시.
나도 피곤해서 얼른 들어가 봐야 하기도 하고 비안에게 연락해 볼 것도 있어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턴, 하고, 다시 위로 손 뻗고 아래로 돌려서….’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물론 단체 무대일 때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만 최소한 시선이 분산될 때는 눈에 덜 띌 테니까.
기껏 다른 녀석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은 기회를 잡아 놓고 모자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돌려 보고 속도를 붙여 보기를 반복했을까.
꼬르르르륵-.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내 배에서 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제현호가 낸 소리였다.
“아.”
자기 배에서 나는 소리인 걸 알고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우리도 얼른 숙소로 가자.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나지.”
그러고 가는 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친다고. 웬일로 우리 어렸을 때처럼 컵떡볶이를 팔길래 하나씩 주워 들었다.
“와 물가 진짜 올랐다. 우리 어릴 땐 500원이면 샀는데.”
양은 고만고만한데 컵 좀 튼튼해졌다고 1,500원을 받나.
다행히 현금 오천 원이 지갑에 있어서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둘이서 한 손에 들어오는 컵 하나를 나눠 먹어야 할 뻔했다.
“빨리 먹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자.”
집 근처 쓰레기통 앞에 서서 재빨리 마지막 국물까지 털어 먹고 있으니 연습생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가끔 일탈처럼 탄수화물이 너무 당겨서 회사 몰래 먹을 때면 이렇게 쓰레기통 앞에 서서 다 먹고 증거 인멸을 했는데.
지금은 딱히 들킨다고 누가 혼내는 건 아니지만…. 아니 혼나는 건 아니라도 야유는 받으려나.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입까지 싹 닦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
제현호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왜 웃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별거 아냐. 얼른 들어가자.”
배를 적당히 채우고 들어와서는 아무것도 안 먹은 척 샐러드만 조금 깨작이다 방으로 들어오니 아직 8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지금 연락해 보자.’
톡톡, 화면 위를 두드리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서인수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을까요? 오후 8:03
[나] (이모티콘) 오후 8:03
아직 잘 시간은 아니니까 곧 보시겠지. 핸드폰을 내려놓고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비안에게서 회신이 돌아왔다.
[비안 선배님] 오 인수 오랜만~ 오후 8:04
[비안 선배님] 곧 투어 나간다며 한참 바쁘겠네? 오후 8“05
투어라고 해 봤자 콘서트도 아니고 팬 미팅인데…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러웠다.
[나] 네, 오늘도 연습 다녀왔어요 오후 8:05
[나] 콘서트는 아니고 팬 미팅이지만 그래도 무대 구성이 많아서 기대가 되네요 오후 8:06
마침 한가할 타이밍이었던 걸까, 비안에게서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안 선배님] 콘서트나 팬 미팅이나 오후 8:06
[비안 선배님] 나중에 짬 차면 그게 그거야ㅋㅋ 오후 8:06
하지만 저는 아직 1년 차니까요? 나는 언제쯤 본론을 꺼내면 좋을지 타이밍을 재다 슬쩍 핸드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선배님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요?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후 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