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눈앞에 가려진 것 (2)
유역과의 약속이 잡힌 건 이틀 후였다. 슬슬 해외 투어 일정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는 바람에 더 늦으면 내가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단체 모임은… 여행 같은 건 투어 때문에라도 어려울 것 같다고 빠지면 되겠네.’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니까.
유역과의 대화를 마치고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
‘얼른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자자.’
눈을 감고 색색 규칙적이고 낮은 숨을 내뱉자 곧 의식이 흐려졌다.
그날 밤. 몇 시간 깊이 잠들지도 못한 나는 아닌 밤중에 별안간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아니 뭔 이런 개꿈을….’
현실일 리가 없는데도 쓸데없이 너무 생생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 잠들다 깨어난 모양이었다. 손바닥 안쪽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꿈속에서 본 건 다름 아닌 겟 데뷔 제작진 일동이 구속되거나 수사 대상이 되는 장면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데뷔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도 전에 제작사 측의 치명적인 이슈로 활동이 무산되는 꿈이었다.
‘진짜 별 같잖지도 않은….’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고 잘만 데뷔해서 반년 가까이 잘만 활동하고 있는데. 꿈은 숨겨진 두려움이 발현되는 곳이라고 했었나.
지금까지 제작진 비리로 난리가 난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심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걸까.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번 하고 나니 정신이 말끔해졌다.
‘정신 차려. 너 데뷔한 지 벌써 반년이다.’
스스로를 달래고는 아직 다른 녀석들은 쿨쿨 잠들어 있는 시간이라 나 또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꾼 꿈은 더 개꿈이었다.
‘아니 진짜 뭔….’
꿈속에서의 나는 다시 그 처량하기 짝이 없는 옥탑방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동안 겪었던 일이 모두 꿈인 것처럼 굴러다니는 술병 속에서 눈을 뜨자 모든 게 그대로였다.
데뷔도 못 하고, 활동도 못 하고, 허송세월만 보낸 14년 차 실패한 연습생이었던 서인수 그대로.
‘…….’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무시무시한 꿈꿔 본 적 없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되고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이런 악몽을 연달아 꾸는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그냥 깨어 있자.’
지금부터는 다시 잠들어 봤자 일어나야 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피곤하기만 할 것 같으니까.
일찌감치 이불을 정리하고 일어나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려니 잠시 후 덜컥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확인하니 지원이 눈도 못 뜬 채로 주섬주섬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헉!”
그러다가 거실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나야, 잠이 좀 일찍 깨서 나와 있었어.”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으니 서둘러 정체를 밝히자 지원이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나 화장실 써도 돼?”
“응. 얼른 세수하고 나와.”
“응!”
그 후 지원을 시작으로 큰방 인원들이 하나둘 잠꼬대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거실 창으로는 슬슬 커튼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하여간 이렇게 평화로운데 뭔 쓸데없는 개꿈을 다 꿔서는.’
나는 쯧,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고는 연습실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굳이 개꿈을 의식하고 싶진 않지만 좀 불길한 꿈을 꿔서 그런가. 괜히 연습할 때 몸에 불필요한 힘이 실렸다.
“인수야~. 너무 그렇게 힘주지 말고 조금만 빼고 춰 보자. 춤 선이 좀 너무 딱딱 끊어지는 것처럼 보여. 유연~하게. 응? 이해됐지?”
안무 코칭을 담당하는 트레이너 쌤의 눈에까지 보였을 정도니 티가 꽤 나는 모양이었다.
“아,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렇게 기합 들어갈 것까진 없고. 지원이랑 은찬이는 디테일 날리지 말고 좀만 더 살려 보자! 잘 모르겠으면 영인이랑 하연이 보고 어느 시점에서 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참고 좀 해 봐.”
무대용 동선으로 수정된 안무를 익히고, 댄스 라이브 안정화를 위해 반주기만 켜 놓고 맞춰 보기를 수없이 반복하니 어느새 또 하루가 날아가 있었다.
‘약속 장소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더라….’
여유가 있으니까 간만에 대중교통이라도 탈까. 문제가 될 만한 약속에 가는 것도 아니고 공식 스케줄에서 알게 된 동성 지인이랑 만나는 거니까.
모처럼 팬분들께 목격담이 떠서 반가운 기분이 들게 해 드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고려해 보았으나…. 길 찾기 어플로 확인하니 같은 서울 안인데도 환승을 세 번 이상해야 하는 극악의 루트에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거리를 환승 몇 번씩 해 가면서 오고 가는 건 아무리 생각도 아니다.’
얌전히 택시행을 결심하고 나니 유역에게서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역] (블로그 링크) 오후 9:48
[유역] (블로그 링크) 오후 9:48
[유역] (블로그 링크) 오후 9:48
[유역] (블로그 링크) 오후 9:49
[유역] (블로그 링크) 오후 9:49
[유역] (블로그 링크) 오후 9:50
대체 뭘 그렇게 보내 놓은 건가 했더니 우리가 만나기로 한 가게의 블로그 후기들을 잔뜩 전달해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나….’
기본이 2인분부터만 주문이 가능한 곳이라 혼자서는 갈 수 없으니 기회를 노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냥 약속 잡은 게 신나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유달리 이 가게가 그렇게 가 보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네.’
어느 쪽이든 기대한 만큼 실망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약속 장소를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도 괜히 조금은 신경 쓰이게 된 와중 연이은 연습으로 지친 몸을 조금 쉬게 해 주려니 곧바로 약속 당일이 찾아왔다.
‘요즘 왜 이렇게 정신이 없냐….’
표면상으로는 비활동기이지만 준비하는 게 이것저것 많아서 그런가. 다른 녀석들도 틈틈이 개인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인수 형 어디 가?”
내가 슬슬 외출복으로 갈아입자 소파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영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 예능 하면서 만났던 출연자랑 밥 한번 먹기로 해서.”
“누구?”
영인이 쓸데없이 눈을 빛냈다. 나가서 뭐 맛있는 거 먹는 건 기가 막히게 낌새를 알아채고 이러는 건가. 영인의 동물적인 직감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유역이라고 그 집밖위에서 내가 챙겨 준 배우 있잖아.”
그러자 영인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아, 나랑 나이 비슷하지 않아?”
벌써부터 밑밥을 까는 게 ‘나도 같이 가면 안 돼?’라고 말할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응 안 돼. 돌아가. 유역과 만나서 단순히 밥만 먹고 친목을 다지는 게 아니라 연성 프로덕션에서는 왜 나온 건지, 유 대표와는 무슨 관계인지 등등 물어볼 생각이었기에 어림도 없는 시도였다.
“뭐 20대 초반이니까 다들 그렇지. 금방 다녀올 거니까 이따 저녁은 같이 먹자. 맛있는 거 있으면 포장해 올게.”
“아싸!”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약간의 지출을 감내하는 대신 영인을 떨구는 데 성공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내려 드리면 되죠?”
집에 나오자마자 호출에 성공한 택시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주중인데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은 한낮이었다.
‘평일 낮에도 사람이 엄청 많구나….’
이쪽은 직업상 주말이 더 바쁜 때가 많다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3층에 있는 가게로 들어서자 꽤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장식해 놓은 내부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예약하고 오셨을까요?”
“아, 네. 유역, 으로 2명 예약했는데요.”
입구에서 직원분께 예약자명을 말씀드리자 곧 안쪽에서 안내 직원이 나오며 나를 데리고 깊숙한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홀 없이 개인 룸만 있는 식당이어서 조용히 대화하면서 먹기 좋다는 얘기가 많던데 과연 틀린 말은 없었다.
드르륵, 곧 우리에게 배정된 방이 나와 미닫이를 열자 안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유역이 나를 보곤 활짝 웃었다.
“어, 형 왔어요? 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애써 자제에 성공해서 두 마디까지만 뱉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유역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걸렸어. 택시로 20분 정도.”
평일 낮이라 확실히 차가 덜 막힌 덕분이었다.
차로 오면 이렇게 간단할 걸 환승 루트는 뭐 그렇게 복잡한지. 어깨를 으쓱이며 유역의 맞은편에 앉자 직원분이 하나둘 밑반찬을 서빙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 사이드 반찬이 그렇게 맛있대요. 고기도 맛있긴 한데.”
그러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게 방문을 오래 고대해 왔던 가게이긴 한 것 같았다.
“얼른 먹어. 기대 많이 했던 것 같던데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
“에이, 누구랑 같이 먹는 건데 당연히 맛있겠죠.”
대체 칭찬인지 아부인지 모를 멘트와 함께 수저를 들기 시작하자 얘기한 대로 확실히 밥은 맛있었다. 나도 모르게 정말 먹으러 나온 사람처럼 우물우물 반찬을 비워 나가기도 잠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꺼냈다.
“참 그러고 보니 너 원래는 아이돌 연습도 했었던 거야?”
그러자 유역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빤히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네?”
“아니, 전에는 연성 소속이었던 것 같길래. 아니야?”
확인차 묻자 유역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아뇨 저 아이돌은 아니고 그냥 가수요. 아, 근데 그룹 데뷔가 아닌 거지 아이돌은 맞긴 한가?”
“음?”
“저 길캐 출신이거든요. 동네 노래 자랑 나갔다가 관계자분이 보시고 명함 주셔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던 거라서.”
어쩐지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성량이 꽤 좋은 편이다 싶긴 하더니.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노래 잘하나 보네?”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빛내며 묻자 유역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저 변성기 오면서 목소리가 너무 확 바뀌어서요. 전에 올라가던 고음 지금은 하나도 안 올라가요.”
그러고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부르던 만큼 지금도 부르고 있으면 배우 안 하죠. 솔직히 제가 봐도 제 성격에 배우는 좀 이미지상 안 맞는데.”
어쩐지 처음부터 배우를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들려서 그 뒤에 사연이 더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내가 듣고 싶은 방향으로 다시 돌렸다.
“연성에서 지냈을 때는 어땠어? 거기 대표님 코칭 엄청 엄하시지 않아?”
그러자 유역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