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눈앞에 가려진 것 (1)
“…….”
“…….”
그리고 일순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족욕을 위해 마련해 둔 공간은 열기로 뜨끈뜨끈했으나 분위기만 보면 영하가 따로 없었다.
“…….”
누가 아무 말이라도 좀 해 봐. 침묵 속에서 은찬을 제외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얼굴 터지겠네.’
그 당사자인 은찬조차도 태연하기는커녕 얼굴이 당장이라도 펑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 준 건 언제나 그렇듯 영인이었다.
“여기서 그게 누구냐고 물어보면 파국인가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모두의 시선이 단숨에 영인과 은찬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잘 삶은 문어처럼 얼굴이 새빨간 은찬이 입을 뻐끔거리다 겨우 문장을 끄집어냈다.
“으, 음치라고 생각한 적, 없어…!”
이대로 아무도 대답 안 하고 통편집되는 건 아닌가. 어쨌거나 예능일 뿐인데 그냥 나를 희생양으로 삼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음치랑 거리가 먼데. 모두가 어떻게 반응해야 상황이 더욱 무탈하게 흘러갈까 고민하던 와중, 결국 규민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거짓말 탐지기는 아니라는데요, 형.”
“…….”
그리고 다시금 무거운 적막이 휘몰아쳤다.
“…….”
이 분위기 이제 어떡할 건데. 다들 말없이 입만 다물고 있던 그때 은찬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나, 내가… 제일, 보컬은 부족하니까….”
“네?”
그리고 은찬과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영인이 해맑게 비수를 꽂았다.
“저 제대로 못 들었어요.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부끄러움이 임계치를 넘어 버린 탓일까. 은찬이 빽 소리를 높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몰라!”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무튼 멤버들의 실력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건가? 어물쩍 순서가 넘어가 곧 다음 차례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그럼 이번엔 하연이네?”
“얼른 뽑기 돌려 뽑기.”
하연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자 안에 손을 넣어 공을 뽑았다.
[정은찬]
“엇.”
조금 전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장본인의 이름이 재등장하자 다들 다시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앗.”
그리고 말없이 은찬과 하연을 바라보며 뭐라도 좀 말해서 이 어색함을 깨 주기를 바란 그때. 은찬이 겨우 부끄러움을 수습했는지 열감이 약간 남아있는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말했다.
“나는 녹음 작업 방식에 불만이 있다.”
“엑.”
그러자 하연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기계 위로 손을 올리고는 대답했다.
“아니다, 요!”
그 후 버튼을 누른 기계가 잠시 번쩍거리더니 버저를 울리는 대신 경쾌한 멜로디를 재생했다.
“빠바밤 밤 빠밤~! 통과!”
녹음된 통과 메시지에 다들 우우, 불평을 토했다.
“아니 잠시만요 왜 예능을 사적으로 유용하시죠. 그냥 형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 아닌가요.”
“우우 노잼, 우우.”
느닷없이 은찬과 하연이 있는 곳만 감동이 번져 애틋해진 분위기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으나 은찬은 곧 포커페이스를 되찾았는지 미동도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룰을 어긴 건 없잖아. 하지 말란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하여간 누가 멤버들 중 제일 유난인 사이 아니랄까 봐.
그 이후로도 별거 아닌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어지럽게 오고 갔다.
‘뭐 싸움은 안 났으니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정신없이 일정을 마치고 겨우 잠을 청할 룸으로 이동하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온몸이 쑤시도록 일하게 될 줄이야.’
벌써부터 이렇게 뻐근하면 내일 아침에는 얼마나 쑤셔 댈지 감도 오지 않았다.
‘미리 파스 붙이고 자자.’
넷씩 쪼개져서 방 하나씩을 배정받은 상황이라 나와 현호 몫의 더블베드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머지 인원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아, 파스. 파스 좀 붙이려고.”
내일도 마냥 놀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숙소로 돌아왔을 때 바닥을 기어 다니고 싶지 않으면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그러자 하나둘 내게 도움의 손길이라 쓰고 마수라고 읽는,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손을 내밀었다.
“뭔데 이건?”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지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 나도 붙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바로 옆에서 현호도 한마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안 되나요?”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지원 옆에 붙어 있는 영인까지 나보다 어린 녀석들이 줄줄이 눈을 빛내며 부탁해 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들 그럼 옷에 가려지는 곳에만 붙여. 파스 자국 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괜히 또 잘 보이는 곳에 붙이면 고생했다고 유세 부리는 거냐. 뭐라도 가리려고 하는 거 아니냐 이상한 시비를 걸어올 사람도 있으니까.
주섬주섬 한 팩을 나눠 붙이고 나니 숙소에 파스 냄새가 진동을 했다.
“뭐냐? 경로당이야?”
잠시 후, 짐이 섞인 게 있어서 찾으러 온 규민이 우리 방에 들어오더니 알싸하게 퍼지는 냄새에 놀라 물었으나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형, 뭘 모르시네요…. 이게 바로 한국인의 행복입니다.”
너네한테 나눠 준 파스는 매니저 형이 휴가 때 사서 돌린 일본산이다만. 아무튼 효과만 좋으면 됐지.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이 지나고 불을 끄자 하나둘 조용히 잠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진짜 폭풍우 같았다.’
평소면 스케줄 틈틈이 대기 시간이 생겨서 핸드폰을 몇 번은 들여다봤을 텐데 오늘은 내내 물가에서 일하고 쉴 틈도 거의 없어서 중요한 연락이 왔더라도 받을 새가 없었다.
‘가족 일이나 정말 심각한 일이라면 회사를 통해 연락했을 테니까 놓쳤을 일은 없겠지만.’
짧게 한숨을 내쉬며 10시간 이상 확인 못 한 화면을 켜자 켁, 메시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999개 뭔데?’
평소에 메시지가 밀리지 않도록 바로바로 확인하거나 삭제하는 편이라 정말 많이 밀려도 200개 이상 밀리는 일이 흔치 않은데 대체 어느 단톡방에서 이렇게 수다 판이 벌어진 건지 놀랍기만 했다.
‘아마 '집밖위' 단톡이려나.’
얼핏 예상한 대로 6명이서 다 같이 모이기로 한 일로 내가 못 본 사이 엄청나게 떠들썩했던 것 같았다.
[뿅] 아 근데 여기도 진짜 맛있고 오후 5:23
[뿅] (링크) 오후 5:23
[뿅] 이 집도 진짜 맛집이라 유명하거든? 오후 5:23
[뿅] 아 근데 베트남 음식 먹으러 갈 거면 그냥 아예 베트남 현지에서 먹는 게 진짜 대박인데 오후 5:24
[뿅] 나 친구랑 여러 번 가 봐서 맛집도 다 꿰고 있거든 오후 5:24
[이워누] 먹는 얘기 나오니까 뿅 형 대흥분함 오후 5:24
[뿅] 어쩔 수 없음 오후 5:24
[뿅]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오후 5:25
[쭈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후 5:25
[유역] ㅋㅋㅋㅋㅋ 오후 5:25
[이워누] 수상할 정도로 먹는데 진심인 유튜버 오후 5:25
[뿅] 직업병인데요 오후 5:25
[뿅] 산재 처리됩니까? 오후 5:25
[쭈인] 되겠냐? 오후 5:25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후 5:26
처음엔 각자 자기가 자주 다니는 식당을 모임 장소로 추천하던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더니 어느새 휴가 날짜를 맞춰서 2박 3일로 어딜 놀러 가자는 얘기로 번져 있었다.
“……???”
왜 갑자기? 잠깐만, 선배부터가 일정이 안 되지 않아? 급히 채팅 내용을 따라가며 화면을 아래로 내리자 선배가 멋대로 대답해 놓은 게 아주 가관이었다.
[□] 인수네도 지금 좀 널널할걸?
[□] 최근에 활동기 끝나서
아니 활동기가 끝났다고 활동 기간 1년밖에 안 되는 계약직이 여기저기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잖아. 열이 확 뻗쳤으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었다.
[유역] 헉 너무 가고 싶어요 오후 6:08
[유역] 저 촬영 일정이랑만 안 겹치면 꼭 갈게요!!! 오후 6:08
[유역] (이모티콘) 오후 6:08
[쭈인] 굿굿 오후 6:08
[뿅] 벌써부터 기대된다 오후 6:09
[이워누] 이따 인수 형 채팅 내리다 기겁할 듯 오후 6:09
[쭈인] 지금 예비로 라인업 세운 약속만 몇 개야ㅋㅋㅋㅋㅋ 오후 6:09
[쭈인] 우리 이거 올해 안에 다 하려면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야 할 듯ㅋㅋㅋㅋㅋㅋ 오후 6:09
[뿅] 계 모임임? 오후 6:10
[□] 헐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 오후 6:10
[□] 들고 튀어야지 오후 6:10
[유역] (이모티콘) 오후 6:10
혹시 겉돌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유역이 저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확실히 좀 다행이긴 한데.
‘뭔 가자는 곳이 이렇게 많아?’
이 중 하나라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이워누] 어 1 사라짐 오후 11:49
[이워누] 인수 형 왔다 오후 11:49
그리고 내용을 파악하자마자 새롭게 올라온 채팅에 머리가 핑 돌았다.
‘분명 나쁜 사람들은 아닌데….’
확실히 기가 빨린다. 나는 후, 긴 한숨과 함께 일정이 되는 날에는 함께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잠시 창을 닫았다.
‘이거 말고 다른 데서 온 연락은 없나….’
계속해서 상단을 차지하는 단톡방 메시지를 슥 옆으로 밀어 버리고 개인 메시지를 확인하자 자잘한 안부 연락 사이로 유역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이번엔 무슨 말을….’
기쁘기보다는 약간의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별 얘기 아닐 것 같긴 하다만. 짧게 심호흡을 마치고 확인하자 엄청난 양의 스크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뭔 또 이렇게 투 머치 토킹을….’
[유역] 안녕하세요, 인수 형! 바로 스케줄 가신 것 같아서 이렇게 따로 연락드리는 것도 조금 죄송하긴 한데 진짜 너무 감사한 마음뿐이라 그냥 넘어가는 건 더 죄송하고 마음에 걸려서….
요는 고맙고 미안하고 앞으로 자기가 꼭 보답하겠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보답할 거면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는데. 유역이 연성 프로덕션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유 대표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회사를 나오게 된 건지 같은 것들….
지금은 의도치 않게 별도 3개 이상 채워 버린 상황인데 물어보면 대답해 주지 않으려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나] 아 ㅎㅎ 응 오늘 촬영이 좀 길어져서 핸드폰을 이제야 확인했네 오후 11:53
[나] 혹시 시간 되면 우리끼리만 따로 볼까? 내가 밥 한 끼 살게. 한 번은 밖에서 먹이고 싶었어서. 오후 1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