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만 (4)
그릇을 싹싹 비워 갈 즈음이 되니 슬슬 배가 불렀다. 더 먹으려고 하면 들어갈 것 같긴 하지만 이만하면 됐다. 과식해 봤자 속만 더부룩할 뿐이니 일찍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유역은 내가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국물 한 방울까지 마실 기세로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내 눈치를 보고 먹어도 되나 고민하는 것 같더만.’
이제는 누가 그릇째로 뺏어 가기라도 할까 봐 야무지게 숟가락을 쥐고 먹는 게 다섯 살짜리의 식사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술까지 모두 비우고 배달용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유역은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헉… 자, 잘 먹었습니다….”
뭐 할 말이 없으니 일단 감사 인사라도 하는 건가. 나는 한결 혈색이 돌아온 유역의 얼굴을 보고 다시 물었다.
“아까 내가 찾아오기 전에 전화로 물어봤던 거 말인데. 왜 대답 안 한 거야?”
꼬치꼬치 캐물으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유는 확실히 자기 입으로 말하도록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묻자 유역의 표정이 순식간에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어….”
“대답을 해야 내가 널 어떻게 도와줄지 생각을 하지.”
묻는 이유가 혼내려는 게 아니라는 걸 지적하자 유역이 슬쩍 시선을 돌려 바닥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불편해서요.”
알긴 아네.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왜 불편해하는지는 알고?”
그러자 유역이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약간의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말을, 안 하니까….”
그러고는 기세가 조금은 살았는지 곧바로 변명하려 했다.
“근데 저도 어쩔 수 없는 게 회사에서 이미지 관리 때문에….”
어쩜 이렇게 예상한 그대로 반박하는지. 나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회사에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한 거지 아예 말을 안 해서 마찰을 일으키라고 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러자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유역이 다시 한번 변론을 내뱉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말을 하지 말라고 했지 말을 안 해서 트러블을 일으키라고 하진 않았잖아. 그게 설마 정말 입 꾹 닫고 소통도 하지 말라는 뜻이겠어? 적당히 할 말 하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은 삼키면 서로 얼마나 좋아, 응?”
그러자 거기까지는 더 반박할 말이 없는지 유역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다시 시무룩해진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으나 여기서 물러질 수는 없었다. 이놈이 처한 상황을 바꿔 주려거든.
“나는 네가 나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려는 것도 알아. 근데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 밑도 끝도 없이 널 협조도 안 하고 사교성도 없고 남들이 다 해 주고 숟가락만 얹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볼 텐데 그래도 괜찮아?”
유역이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드디어 말이 통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면 티를 내야지. 나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쪽이 뭐라고 말하는지 관심 있어요, 뭐 해야 할지 같이 상의하고 의논하고 각자 배려하는 거 잘해요, 말을 하고 행동으로 보여 줘야 다른 사람들도 너랑 어울리고 싶어 할 거 아냐.”
학창 시절 때는 단순히 생긴 게 좀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화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 터다. 3반에 잘생긴 애 누구 친구, 이렇게 덩달아 시선을 받아서 교내에서 잘나가는 무리로 보이고 싶어 할 녀석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그게 100%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한다. 긍정적인 교우 관계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친구는 친구니까.
다만 그런 수동적인 관계에 익숙해진 사람이 학교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떻게 사람을 사귀고 알아 가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게 문제지.
같이 어울리고 싶고, 놀고 싶은 사람이 되는 건 보이는 것 이상의 에너지와 노력을 요한다.
‘이쪽이라고 아무것도 안 하고 이 많은 인맥들을 이어 나가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전부 정말 진심으로 영혼의 단짝이고 절친이고 매일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평생의 찐친 우정이라서 틈틈이 안부도 묻고 정성을 쏟는 거겠냐.
사람은 누구나 거리가 멀어지고 시선 밖으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자리를 지워 버리기 마련이다.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다면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이 영영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내 지적이 끝나기 무섭게 축 처진 유역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다들 제가 말만 하면 싫어하는데….”
그거야 말을 질릴 만하게 하니까 그렇지! 나는 울먹거리는 유역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어?”
얘가 운명 공동체처럼 묶인 같은 그룹 멤버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하게 된 건지.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유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
그 후 유역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다음 촬영 날이 되어서였다.
무슨 국가 대표로 중요한 시합에 나가는 선수도 아니고. 심기일전하는 듯한 진지한 태도였다.
뭐 저렇게까지, 싶을 수 있어도 본인 딴에는 사력을 다한 도전인 거겠지.
그리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이전 촬영과 다를 것 없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자 우선 지난주 사용하고 남은 잔액을 확인할 건데요….”
미리 작가님들이 짜 주신 흐름 대로 미션을 수행하려니 자연스럽게 협력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우리 둘이 같은 조 할래?”
때마침 내가 가지고 있는 미션용 아이템이 아이돌 선배의 것과 시너지가 좋게 맞물려서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이득이었다.
“어, 그럴까?”
나는 확답을 들려주기 전에 슥 유역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걱정한 것도 잠시, 유역이 능청스럽게 요리뿅 옆에 슥,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요리뿅이 순간 얘가 대체 왜 자기 쪽으로 왔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유역을 바라보았다.
유역은 말없이 슥, 요리뿅 쪽으로 엉덩이를 붙인 채 의욕으로 반짝반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 내 얼굴에 뭐 묻은 거 있어?”
요리뿅이 당황을 금치 못하고 묻자 유역이 다시금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했다.
“뭐, 뭔데…?”
저도 모르게 짧은 문장이 요리뿅의 입을 빠져나온 순간 유역이 물었다.
“저 형이랑 같이하면 안 될까요?”
“어?”
그리고 그 순간 다들 잘 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 안 될 건 없는데….”
카메라가 뻔히 촬영하고 있는데 싫다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요리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와, 됐다, 됐어. 와!!!”
원시적인 방법으로 화덕에 불을 피워서 고기를 굽는 것이 미션이었던 유역과 요리뿅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이게 되네!?”
잿가루가 좀 묻기는 했어도 그냥 꼬질꼬질해 보이는 정도인 요리뿅과 달리 유역은 배우라는 직업도 잠시 망각했는지 아주 새까맣게 숯 검댕이 되어 있었다.
‘뭐 저거도 웃긴다고 화제가 되기는 하겠다.’
“야 진짜 장하다. 와 대박이다.”
요리뿅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내가 내 미션에 집중하는 사이 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뭐가 별거 아니야. 이거 요령 없으면 손바닥만 다 까질 텐데. 대단하다 진짜.”
‘어떻게 뭐 잘 해결된 것 같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건 다음 날 밤 촬영이 끝나고 하나둘 주섬주섬 새벽에 숙소를 빠져나와 앞마당에 불을 지폈을 때가 되어서였다.
“와 나 진짜 얼굴 다 태워 먹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
그러니까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슬슬 연기가 나기 시작하자 불을 안정적으로 붙이고 싶었던 마음에 요리뿅이 부엌에 있던 식용유를 조금 가져와서 뿌렸다고.
조금 잘 타는 정도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갑자기 불이 잘 붙는 기름이 끼얹어지자 순식간이 불꽃이 치솟았고 그대로 요리뿅의 앞머리가 날아갈 뻔한 것을 유역이 때마침 벗고 있었던 겉옷을 그대로 화덕에 던져 진화했다고.
아까 편집으로 일부만 나갈 거라고 미리 보여 주었던 화면으로는…. 음…. 불길이 솔직히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는데.
본인 눈앞에서 화르륵거렸으면 그랬을 수 있겠지. 성냥불만 한 불도 코앞에서 보면… 무서울 수도 있으니까.
그것 외에도 유역이 요리뿅의 바로 옆에 붙어서 계속 노력하고 또 챙겨 주려고 애쓰는 모습에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나라도 그럴 것 같긴 해. 자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모임에 안 불렀던 동료가 잘해 주려고 하는 게 느껴지면 미안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겠지.’
거기에 유역이 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는 또 조금씩 말을 하기까지 해서 그동안 유역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소통의 부재가 다소 해소되었다.
“아 진작 좀 친하게 지낼걸. 내일이면 해산인데 아쉽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리뿅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외향적인 사람이라서 조그만 계기로도 마음이 열리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와 아이돌 선배는 제로 칼로리 탄산 외에는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은 단출한 야식 파티가 끝나고, 드디어 잠을 청할 시간.
지금까지처럼 둘둘 나뉘어서 방에서 자는 게 아니라 거실에 이불을 넓게 펴서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잠을 청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다음 날 아침. 서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세수를 하고 그동안 수행해 온 미션과 기록들을 정리해서 MVP를 뽑자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각자 대기 중이던 회사 차로 이동한 그때. 유역이 갑자기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저… 인수 형. 진짜 감사해요. 형이 말한 대로 하니까 다들 저한테 잘해 주시고…. 아! 저 이번에 SNS 맞팔도 전부 다 했어요!”
그게 그렇게 신이 났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한테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바뀐 건 너고, 너 스스로 한 일인데 나한테 감사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유역에게 해 준 조언은 아주 간단하지만 유역의 가진 문제점의 핵심을 꿰뚫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