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만 (3)
나는 후, 짧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일단 울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일단 들어.”
한번 물꼬가 터지기 시작하면 틀어막기 전까지는 끝도 없이 나불거리는 입이니 미리 막아 둘 필요가 있었다.
- 네! 훌쩍, 우으… 흡….
애써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딱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다시 한숨이 나올 뻔했다.
“라방에서 나온 그 자리. 우리만 빠진 거 아니야. 나도 같이 있었어. 나는 피곤해서 조금 일찍 빠져나와서 방송 틀었을 때는 같이 안 있었던 거고.”
- ……!
그러자 유역이 화들짝 놀랐는지 흡, 자기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어처구니없는 효과음(?)이 들렸다.
- 흡, 딸꾹, 욱, 딸꾹….
그래도 내가 말하지 말라고 시켰다고 정말 입 틀어막고 딸꾹질이나 하고 있는 걸 보면 애가 악의가 있거나 나쁜 건 정말 아닌데….
순간 머릿속으로 미니어처처럼 조그만 사이즈의 규민이 나타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의가 없다고 다 나쁜 놈이 아닌 건 아니지.’
됐고, 일단 들어가 있어. 나는 휘휘 허공에 손을 내저어서 미니어처 규민을 내쫓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출연진 사이에서 너 혼자만 조금 겉돌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왜 그렇다고 생각해? 이제 말해도 돼.”
그러자 또 줄줄 터진 둑처럼 대답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아무 반응도 들리지 않았다.
- …….
한참을 기다려도 무반응에 나는 핸드폰을 던지기라도 했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유역을 불렀다.
”유역아?“
그러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잔뜩 코 먹은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 아, 네…! 훌쩍… 딸꾹….
나는 차분히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내가 왜일 것 같냐고 물었잖아. 대답 안 해 줄 거야?“
그러자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걸 입 밖으로 꺼내기가 너무 서러워서 말을 못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이래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황에 진전이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낫겠네.’
아… 슬쩍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자 벌써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한 이놈도 이놈이고… 만나자고 하는 나도 나다. 그러나 손대기로 한 이상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너 지금 어디야? 잠깐 만나서 얘기할 수 있어? 혼내려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 …….
제발 서울에서 좀 가까운 지역에서 살고 있기를, 그리고 택시가 좀 잡혀 주기를.
나는 어쨌거나 숙소에서 야밤에 나간다고 감점을 당하거나 페널티를 받는 신세는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며 아까 벗어 두었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그리고 잠시 후. 끊어진 줄 알았을 정도로 한참의 적막 끝에 유역이 대답했다.
- 이, 이쪽으로 오시게요?
“어, 주소만 말해 줘 내가 지금 택시 타고 갈게.”
- 어, 시, 시간도 늦었는데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됐어. 이대로는 나도 두 발 뻗고 잠 못 자. 더 늦어지면 호출비 늘어나니까 빨리 문자로 주소 보내.”
- 아, 네…!
또 그 트레이드마크 같은 ‘아네’로 통화가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로 주소가 도착했다.
엄청 가깝다고 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같은 서울 시내라는 점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지금쯤이면 도로가 뻥 뚫려 있을 테니 한 30분이면 가겠는데?
다행히 택시가 바로 잡혀서 곧바로 큰길 쪽으로 나갔다.
“어후 피곤해라. 이 시간에 어딜 그렇게 다니세요? 나는 손님들 태울 때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라.”
기사님이 계속 스몰토크를 시도하셨으나 굳이 아이돌인 것을 밝힐 필요는 없어서 나는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다가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말 걸지 말아 달라는 여기서 더 분명할 수도 없는 의사 표시에 기사님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늦은 시간인데다 하루 종일 일하랴, 친목 모임에 끌려가서 어울리랴 고생한 탓에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딱 달콤하게 눈을 붙이려던 순간.
“도착했습니다, 손님.”
타이밍 좋게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마터면 입가에 침까지 흘리면서 졸 뻔했네.
나는 서둘러 계산하고는 차에서 내려 어두컴컴한 주택가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다들…. 이런 음침한 동네에서 살아.’
공민형도 그렇고 집으로 찾아가는 녀석들마다 사정이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인 게 너무 눈에 보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치안 관리라도 관할서에서 신경 써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인근의 먹자골목이라고 쓰고 온갖 술집과 을씨년스러운 가게들이 몰려 있는 골목과 닿아 있어서 그런가.
여기저기 위생이 불량한 흔적이 널려 있고 가로등 몇 개는 불까지 나가 있었다.
‘진짜 으스스하네.’
골목에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에게 강도질을 당해도 아무도 나를 구해 주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네였다.
지도 앱을 켜고 골목 입구에서부터 유역이 알려 준 주소까지 루트를 따라 이동하는데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바스락하고 몸을 일으켰다.
“헉…!”
나도 모르게 놀라 움찔 뒷걸음질을 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혀, 형, 저예요!”
낡은 2층짜리 주택의 입구에 쪼그려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유역이었다.
“아, 너구나. 갑자기 소리가 들려서 놀랐네.”
“죄송해요, 여기가 가로등이 멀어서 밤에는 진짜 잘 안 보이거든요. 못 보시고 지나치실까 봐….”
그런 걱정을 할 만도 했다. 벽돌색이 뭔 시커메서는 마치 위장이라도 해 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 일단 들어오세요.”
유역이 나를 데리고 간 건 1층도 2층도 아닌 지하층이었다. 구조상 그래도 입구 쪽은 지상과 트여 있어서 완전히 지하란 느낌은 아닌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바깥쪽 도로에 거의 붙어서 난 작은 창문이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입구의 전부였다.
그나마 출입문을 열어 두면 환기도 시킬 수 있고 내부는 넓은 편인가….
유역이 나를 안으로 들이며 불을 켠 순간….
데구르르르….
“음?”
발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걸려서는 원룸을 가로질러 굴러갔다.
선명한 초록빛을 가진 유리병이었다.
“아, 죄, 죄송해요, 아까 형한테 전화하기 전에 마시던 거라서… 그거라도 마셔야 좀 용기가 날 것 같아서….”
알코올을 현실 도피용이 아니라 용기 버프용으로 쓰다니. 게다가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술병이었는지 바닥이 금세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아냐, 미안. 내가 아래를 좀 잘 봤어야 하는데. 휴지 어디 있어? 내가 치울게.”
어색한 분위기와 진한 술 냄새 속에서 어영부영 바닥을 치우고 나니 덩그러니 앉을 자리가 나왔다.
소파도 없고 식탁도 없고. 아마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었을 가구들만 덜렁 있는 원룸 한가운데에 냉장고가 우뚝 솟아 있어 꼴이 굉장히 우스웠다.
“원래 손님 잘 안 부르, 거든요…. 집이 좀, 이래서….”
대체 냉장고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보통 벽에 붙여 놓지 않나?
아니면 사이에 가벽이라도 설치해 나름대로 인테리어를 해 보려는 시도였을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 쓸데없이 큰 냉장고를 벽에 바짝 붙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벽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그제야 보였다.
“아, 냉장고… 그거 무료 나눔으로 받은 거라서요. 원래 이 집에 없던 거라, 놓을 자리가 거기밖에 없었어요.”
거기다 이 너저분한 꼴은 뭔데? 이불은 아무렇게나 나자빠져 있고 설거지라고 하기도 어려운 배달 음식 플라스틱 그릇이 싱크대에 가득한 데다가 화장실 안에는 곰팡이까지 잔뜩 피어 있었다.
“…….”
나는 처음 숙소에 도착했을 때 대체 리모델링을 언제 한 건지 가늠도 안 되는 준흉가였던 것을 떠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뭐든 각오한 사람처럼 대답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집 좀 치우고 얘기하자.”
이 상태로는 들어오려던 복도 달아날 것이 뻔했다.
***
잠시 후. 이 새벽에 뻘뻘 땀을 흘리며 온 집구석을 쓸고 닦고 환기시키고 때를 벗겨 내고 나니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103호 학생! 어유, 새벽부터 뭘 하는 거야,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이웃 세입자로 보이는 아저씨가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불평을 하고 가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거 얼른 내다 버리고 와.”
지정된 장소에 분리 수거와 쓰레기 배출까지 마치고 드디어 환골탈태한 내부와 마주했을 때는 아침이었다.
환골탈태라고 해도 너저분한 동선을 바꾸고 최대한 덜 지저분해지도록 정리한 것뿐이지만.
몸을 한참 움직이고 났더니 피곤한 것도 피곤한 건데 배가 고파서 위장이 아우성이었다.
꼬르르륵….
그리고 그건 유역도 마찬가지인지 유역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 죄송해요….”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나는 재빨리 배달 어플을 켜서 영업 중인 국밥집을 찾았다.
“돼지국밥이랑 뼈해장국 있는데 뭐 먹을 거야?”
“어, 그….”
또 버벅거리길래 나는 빨리 결정하라고 보채기 위해 덧붙였다.
“내가 사는 거니까 빨리 골라. 안 고르면 냉면 시켜 버린다.”
메뉴 중에 제일 맛없어 보이는 걸로 골랐는데 그건 정말 싫었는지 유역은 뼈해장국을 골랐다.
“그럼 배달올 때까지 조금만 쉬자.”
“…네….”
유역이 내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사이 나는 잠깐 바닥에 머리를 대고 졸았다.
아까 엎은 술 냄새가 아직도 올라오고 있었다.
‘아…. 엎지 말고 이따 같이 마시면 좋았을… 아니지.’
내가 1회차 때도 아니고 일이 없어서 한가하게 술이나 퍼마시는 신세는 아니니까.
잠시 후 배달원이 도착해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밥상을 차리자 뜨끈뜨끈 김이 올라오는 국밥이 힘든 일 하고 먹기에 아주 제격이었다.
“아 이 집 진짜 맛있다. 맛집이네.”
괜히 24시간 장사를 하는 게 아니야. 유역은 본인을 단단히 혼낼 줄 알았던 내가 느닷없이 청소를 하고 밥을 사 주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른 먹어. 속부터 채워야 힘이 나지.”
그래야 팩폭을 얻어맞아도 좀 더 버틸 만하겠지. 나는 조금 전 생각은 속으로만 삼킨 채 한술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