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만 (2)
“아, 네…! 괜찮아요!”
유역이 곧 흔쾌히 대답했으나 표정은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메신저까지 무시하진 않겠지.’
나는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애써 외면한 후 나 또한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보조 배터리 챙겼고, 모자랑, 또… 오늘 두고 가면 일주일 후에나 찾을 수 있기에 하나하나 점검하는 사이 유역이 탄 차가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어쩐지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뭔가 쑥덕거리고 있는 나머지 멤버들을 들여다본 그때.
“어어, 짐 다 챙겼어?”
불쑥 아이돌 선배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불렀다.
“응, 매니저 형 곧 도착한다고 하셔서 나도 얼른 들어가 보려고.”
그러자 선배가 잘됐다는 듯 활짝 웃으며 내 어깨 위로 냅다 팔을 걸쳤다.
“너 오늘 끝나고 스케줄 없지?”
왜 이래 부담스럽게… 그런대로 가까운 사이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스킨십은 같은 그룹 멤버들끼리도 부담스러웠다. 나는 움찔거리며 틈이 생기면 바로 튀어 나갈 생각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스케줄 잡혀 있는 건 없긴 한데, 왜?”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가자, 가자, 가자!!!”
“일단 빨리 태워 버려, 빨리!”
“뭐야, 왜 이러는데!?”
반항할 새도 없이 등 떠밀려서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이돌 선배네 차 코앞까지 들이밀어져 있었다.
“잠깐만! 뭔지 설명은 해야지 내가 알아듣지! 어딜 가자는 건데?”
코어 힘과 악력으로 버티며 두 발로 주차장 흙바닥을 딛고 서자 웬만큼 힘을 줘서는 해결이 안 될 걸 알았는지 아이돌 선배가 사실대로 불었다.
“아, 우리 오늘 뒤풀이 겸해서 저녁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고. 원우가 아는 형님네 가게 진짜 괜찮은 데 있대. 오늘 점심 장사만 하고 쉬는 날인데 저녁에 가게 쓸 거면 와서 알아서 차려 먹고 가라고 했대. 고깃집이야. 고깃집.”
모델이 고깃집 사장님이랑 그렇게까지 친한 것도 신기하다.
하지만 얼핏 본 SNS에 올라온 사진 속 술병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고깃집 와서 마진 제일 잘 남는 술을 그렇게나 시켜 대는데 나 같아도 알짜 손님으로 모시겠다.’
그래도 빈 가게를 빌려줄 정도면 보통 친한 게 아니긴 한 모양인데.
마침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눈 붙이는 대로 잠들 것처럼 피곤했던 지난주와 달리 오늘은 컨디션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가 뭐… 매일매일 치팅데이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다른 멤버들 앞에서는 리더랍시고 본보기가 될 만한 모습만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매일 자제해 와서 그런가.
미션 수행하랴 장 보고 집 수리하랴 이것저것 몸을 움직였더니 간만에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가 당겼다.
“가게가 어디 있는 곳인데요?”
숙소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면 곤란하다는 듯 슬쩍 운을 떼자 아이돌 선배가 내 등짝을 퍽퍽 두드렸다.
“서울이야, 서울! 어련히 뭐 이상한 지방으로 데려갈까 봐? 먹고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는 것까지 다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타!”
“아 빨리. 나 진짜 배고파. 서울 올라가려면 또 시간 걸릴 텐데.”
여기저기서 나를 독촉하느라 아우성이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알겠어. 일단 매니저 형한테 연락부터 하고. 아직 오는 길이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으니까 바로 들어가서 쉬시라고 하게.”
“오케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인지 물어보니 오늘따라 일정이 꼬여서 아직 본사에서 출발도 못 한 상황이었다.
촬영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 버린 탓도 있어서 올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니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긴 자기 차도 아니고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지방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
-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고 내일 미팅 룸에서 뵐게요!
“넵, 들어가세요.”
전화를 마치고 아이돌 선배네 차 쪽으로 핸드폰을 쥔 채로 손을 흔들자 드드륵, 옆으로 미는 문이 열렸다.
“얼른 타. 집은 그거 캐리어 하나야?”
“어. 다른 분들은?”
“상연이 형이 자차 끌고 와서 그거 타고 올라간대.”
“아, 그럼 여기 타는 건 나랑 형뿐이야?”
슥 둘러보니 회사에서 신경 써서 관리하는지 내부가 상당히 깔끔했다.
“응, 아. 올라올 때 발 한 번만 털고 타. 매니저 형이 흙발로 올라오는 거 되게 싫어해.”
나는 슥 내 신발 바닥을 한 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외부에서 친목 활동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돌 선배의 차에 올라타서 서울로 향하는데 문득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잊고 있는 거지?’
뭔가 까먹은 것 같은 묘한 찝찝함의 정체를 찾아 헤매던 나는 잠시 후 그 원인을 밝혀냈다.
‘아. 근데 그럼 전 출연자 중에 유역만 빼고 모이는 건가?’
아니면 아까 출발하기 전에 먼저 물어본 건가. 나는 곧바로 선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역이는? 걔도 온대?”
그러자 선배가 그걸 왜 자기에게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걔? 별로 안 친해서 나는 안 불렀는데? 불러도 안 올 것 같잖아.”
“아니….”
그래도 한번 물어는 봐야지. 한 명만 소외시키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럼 지금 연락해 볼까? 어차피 단톡에도 들어와 있고 나 개인 연락처 있으니까….”
내가 당장이라도 본인에게 전화해 볼 기세로 핸드폰을 꺼내 들자 선배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나를 말렸다.
“아니 그러지 말고. 아… 이게 내 일이 아니라서 좀 말하기가 그런데. 요리뿅 형이 유역이가 불편하다고 하더라고. 막 싸우거나 사이가 안 좋거나 한 건 아닌데… 별로 사석에서까지 보고 싶진 않은 거면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아.”
그 말에 나는 멈칫, 핸드폰을 쥔 손을 움찔거렸다. 그제야 촬영 내내 요리뿅이 유역의 딱딱한 태도로 인해 무안해졌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담임 선생님처럼 유역을 따라다니면서 챙겨 주더라도 촬영 중인 이상 24시간 붙어서 밀착 보호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미션이 갈리거나 게임에서 팀이 나뉘거나 해서 도와줄 수 없는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조금씩 쌓인 게 누적된 모양이었다.
‘뭐 거기까지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긴 한데….’
그나마 제일 친해 보이는 나도 이제 겨우 별 한 개를 채운 마당에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아…. 알겠어, 이해했어.”
자리에 유역까지 끼우려던 시도를 그만두고 나니 어느새 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긴 한데….’
자리를 주도한 듯한 멤버가 불편해하는 상대방을 억지로 끼우려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
“음….”
그리고 잠시 후. 식사 자리를 마치고 2차로 술집으로 옮기려는 출연자들을 뒤로하고 나는 조금 일찍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클럽이니 포차니 아이돌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 거론될 것 같아서 눈치껏 빠진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 사람만 빼고 이렇게 모이는 것도 그리 내키진 않는 일이네….’
뭐 사람이 어떻게 같이 일하는 사람 모두와 친할 수 있겠냐만.
‘걔 원래 성격이라면 요리뿅이든 춤신이든 진짜 잘 맞을 것 같은데.’
본인 적성에도 안 맞게 얌전한 척하느라 사이가 틀어진 걸 보고 있으려니 퍽 안타까웠다.
‘음….’
제삼자인 내가 끼어들어서 중재해 주는 것도 좀 그런가. 하지만 요지부동으로 별 하나에 멈춰 있는 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대책이 필요했다.
최대한 술 냄새를 빼기 위해 일부러 숙소 앞에서 겉옷을 펄럭거리다 올라가자 시간이 시간인 탓에 다들 잠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애들끼리는 다들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지.’
더 친한 멤버는 있어도 서로 사사건건 부딪치거나 으르렁거리거나 혹은 본심을 숨겨 가며 괜찮은 척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놓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거 보면 역시 이 멤버가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씻은 다음 방으로 들어가자 제현호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참 꿈나라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현호를 나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본 그때.
부우우웅-.
어둠 속에서 드드득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헉,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뜻밖의 인물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문자는 그렇게 무시를 하더니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다고?’
나는 화들짝 놀란 채 거실로 나가서 목소리를 낮추고 전화를 받았다.
“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형, 흐윽, 흐끅, 우우읏… 흑, 허엉… 엉엉….
뭔데. 왜 갑자기 대성통곡인데?
“왜 무슨 일인데. 뭐 문제라도 생겼어?”
느닷없이 봉변처럼 걸려 온 전화에 이유부터 묻자 유역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 형, 저희 왕따당한 거죠? 그렇죠?
이건 또 뭔 소리야.
“응? 무슨 얘긴지 자세히 설명을 좀 해 줄래?”
사연인즉, 내가 먼저 자리를 뜨고 난 후에 남은 네 명이서 안주가 맛있는 걸로 유명한 룸 술집에 간 모양이었다.
무슨 퇴폐 업소 같은 이상한 곳은 아니고. 한창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자주 가는, 구역마다 칸막이로 나뉘어 큰 소리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놀기 편하게 만들어 둔 가게였다.
연예인이 간다고 문제 될 곳은 아니라 춤신인지 요리뿅인지가 라이브 방송을 켰고 그걸 이 밤중에 본 모양이었다.
‘아….’
그렇지 솔직히 속상할 만하긴 해. 그 모임에 내가 스스로 빠진 게 아니라 애초에 부르지도 않은 줄 안 건지 잔뜩 서러운 목소리로 내게 연락한 것이었다.
‘그런 오해를….’
단순히 사실 관계를 정정해 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도와주는 게 낫겠지.
나는 그동안 카메라 앞에서 유역을 커버 치기 위해 바로 옆에 붙어서 도와줬다. 그러나 그건 유역의 분량을 챙겨 주는 것일 뿐. 유역이 가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진 못했다.
‘이미지고 나발이고 본인이 너무 불행해 보이잖아.’
이대로는 안 된다. 조금 따끔하더라도 달라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