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197화 (197/224)

#197.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만 (1)

모처럼 제한 시간도 없고 어차피 2주나 남았으니 잠깐 유역 문제는 신경을 꺼 둘까.

다음 촬영 전에 한번 친분 쌓기용 연락을 해 보면 될 것 같았다. 시간이 여유가 있는 만큼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귀찮게 하지는 말고.

모처럼 편한 방으로 돌아와서 카메라 의식하지 않고 푹 늘어져 잠을 청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렇게나 편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어디 가려워도 함부로 긁지도 못하니까.’

머리나 등, 팔같이 비교적 일상적이고 겉으로 드러난 곳은 상관없지 않나 하겠지만.

자칫 우습게 보이면 밈처럼 박제되어 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팬분들이 장난 반 애정 반 재밌게 봐 주시는 건 언제든 환영이지만 안티팬에 의해 조롱당하는 요소로 쓰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일주일 중에 겨우 하루 다녀온 것뿐인데 왜 이렇게 살 것 같은지….’

어깨를 으쓱이며 머리를 대고 눕자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평소보다 느지막하게 눈을 떴을 때는 개인 멤버 서인수가 아닌 엔카운터 리더 서인수로서의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해서 이렇게 총 8개 국가의 11개 도시를 돌 겁니다. 어때요? 기대되지 않아요!?”

우리보다도 더 고양된 표정의 대표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물었으나 그 누구도 바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콘서트가 아니라 팬 미팅이긴 하지만! 콘서트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으니까 여름쯤에는 가능할 겁니다.”

대표가 설명을 덧붙인 대로 이번 투어는 콘서트가 아니라 팬 미팅이었다. 무대 비중이 콘서트보다는 낮고 연출이나 설비 면에서 힘을 뺄 예정이니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8개국이나 돌릴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나 많은 나라에 콘서트도 아니고 팬 미팅 수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직 좀 신기하기만 했다.

‘한국에서의 흥행 정도를 생각하면 사실 당연한 거긴 한데….’

리스트로 나열된 국가들의 도시 이름을 보고 나니 이게 어디 상상으로만 떠올릴 수 있는 꿈같은 얘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실감이 났다.

“와 대박…. 저 필리핀 처음 가 봐요. 홍콩도!”

“저는 아무 데도 가 본 적 없어요…!”

“…….”

평소 기복이 큰 반응을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은찬도 콘서트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해외 공연 일정이 나오니 퍽 들떴는지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아무튼! 해외 일정이니까 다들 컨디션 조절 잘하고, 열심히 준비해서 팬들 만나러 가 봅시다!”

대표의 힘찬 응원과 함께 또다시 길고 긴 연습이 휘몰아칠 시간이었다.

해외 팬 미팅 시작 시기까지 아직 기간이 좀 남아 있었기에 다행히 그렇게까지 일정이 빡빡하지는 않았다.

각자 저마다 개인 스케줄을 한두 개씩 진행하고 모일 때는 또 다 같이 모여서 합을 맞춰 보고 하는 사이 또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훌쩍 시간을 보내고 나니 문득 유역의 호감도가 아직 그대로인 것이 떠올랐다.

‘이번 주에는 최소 별 반 개는 만들어 놔야겠는데. 다음 주까지 일정 끝내고 나면 아무래도 직접 만날 일이 웬만해선 없을 테니까.’

그러잖아도 주중에 한번 유역에게 안부 인사를 보냈던 나는 생각도 못 한 반응에 좀 당황하던 참이었다.

[나] 유역아 잘 쉬고 있어? 오후 4:39

때마침 홍보용으로 공개할 스틸 컷이 제작진으로부터 도착한 참이었기에 그 얘기라도 좀 해 볼까 싶어서 보낸 메시지였다.

‘핸드폰 계속 들고 다니는 거 같으니까 곧 보겠지?’

막 30초 만에 답장 오고 내가 뭔 말할 틈도 안 주고 우다다다 보내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그의 엄청난 대화량을 떠올리며 두려움 가득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나 매우 뜻밖에도 유역에게서는 그 어떤 메시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

정말 이러고 씹는다고?

5분 10분 15분 30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답장에 결국 운동이나 할 겸 나가서 땀을 쭉 빼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내가 번호 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쪽이 먼저 달려들어서(?) 난리를 쳐서 받아 갔으면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냐, 배우니까 한번 촬영장 가서 스케줄 들어가면 하루 통으로 핸드폰 못 보고 눈치 보이는 일이 부지기수일 수도 있잖아?

넉넉하게 다음 날까지 기다려 보자.

그러나 내가 너그러운 마음을 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그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유역에게서는 그 어떤 메시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 버르장머리… 없는….’

홧김에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 볼까 하다가 괜히 독촉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혹시 모르지 아예 못 봤을지도. 스팸 메시지나 사생팬의 연락이 계속 쏟아진다면 미리 언질하지 않은 메시지는 못 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냥 다음에 촬영할 때 한번 얘기나 꺼내 보자.’

어쨌든 헤어질 당시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해외 공연 준비에 슬슬 시동을 걸면서 시간을 보내니 유역을 만나야 할 촬영일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시간이 또 지났으니까 괜찮겠지.’

괜히 말 붙여 볼 핑계를 찾아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길이 좀 막히네 오전 7:15

[나] 너는 좀 괜찮아? 오전 7:16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매몰차게 씹히고 말았다.

“…….”

이거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아냐 잠들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나 차가 촬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뭐지? 일단 차량에서 내려 스태프분들은 물론 촬영 감독님과 PD님께도 인사를 드리니 한번 봤다고 조금은 익숙해진 내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위치가 조금 바뀌었나….’

슥 돌아보며 둘러보고 있으려니 하나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냐?”

가볍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건네는 건 아이돌 선배였고,

“안녕하세요~! 아, 아니지. 말 놓기로 했다. 오랜만!!”

수더분한 얼굴로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찾아온 건 요리뿅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곧이어 모델과 춤신도 각각 도착했다. 남은 건 유역 하나뿐인데….

‘언제 오는 거지?’

슥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공지 받은 촬영 시작 시간까지 그다지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장 도착해도 이래저래 준비하려면 꽤 정신없을 텐데, 괜찮은가?

그리고 불안감을 느끼기 무섭게 유역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애써 침착하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잔뜩 긴장한 데다 달려와서 그런지 숨이 매우 거칠었고, 표정은 또 왜 그리 험악한지 본래의 예쁘장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오….”

“와우.”

그 표정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다들 저도 모르게 한마디씩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골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등을 대고 중얼거렸다.

“뭐, 왜, 나를….”

나더러 어쩌라고. 뭔가 당연히 네가 유역을 케어해야 하지 않겠니? 묻는 듯한 시선에 진땀이 흘렀다.

털썩. 헉헉 거의 주저앉듯 자리에 앉아 숨을 헐떡이는 유역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촬영 진행하겠습니다.”

워낙 도착한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뭐라 물을 새도 없이 촬영이 진행되었다.

잠시 후, 게임 미션을 성공하고 장을 보러 가게 된 요리뿅이 간신히 여유가 생긴 유역에게 물었다.

“아까 도착했을 땐 왜 그랬던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나름대로 유역이 사정을 설명할 수 있도록 배려 차원에서 물어봐 준 것 같았으나 아쉽게도 전혀 쓸모없는 다정함이었다.

“…에서… 분기점을… 해서….”

유역이 개미 기어가는 소리처럼 웅얼거린 대답을 요리뿅이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응?”

분명 상냥한 목소리로 묻고 있는데도 꼭 누구 괴롭히는 것 같은 상황에 나는 재빨리 끼어들어 대신 설명해 주었다.

“고속도로 타고 오다가 매니저분이 분기점 잘못 나가서 한참 돌아왔대.”

“아~. 고생했겠네.”

눈치 빠른 요리뿅은 자기가 계속 말을 걸어 봐야 유역에게든 자신에게든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는지 곧 죽이 잘 맞는 춤신과 이야기하러 자리를 옮겼다.

결국 촬영은 지난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성이라곤 어디 줘 버린 것 같이 뚝딱이는 유역과 그런 유역을 구제해 주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어우러졌다.

덕분에 재미는 있는 그림이 나온 것 같긴 하다만.

출연진 중에 22살이 세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내가 제일 나이대에 걸맞지 않은 어른스러움을 보여 주게 되었다.

“아 이거 맏형 타이틀 넘겨줘야 되겠는데~?”

“아니 괜찮아.”

“별로 사양 안 해도 돼. 역이 챙기는 김에 나도 좀 사육해 주라.”

“아니 괜찮다고.”

“뭘 또 그렇게 겸손을… 괜찮아 사양 안 해도 된다니까?”

얼결에 위로 맏형 같지 않은 형까지 챙기느라 고생하는 이미지가 붙어 버렸는데.

뭐 어쨌거나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니까 됐나.

출연진 모두가 첫 주 촬영보다 더 자기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눈치를 안 봐서 그런가. 훨씬 더 정신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인데….’

무사히 2주차 촬영을 마치고 다시 해산할 시간.

집으로 돌아가기 전 등장인물 도감을 켜서 호감도 수치를 확인한 나는 예상외의 난관에 등 뒤로 진땀이 흘렀다.

‘음….’

시작은 좀 애매하긴 했어도 내내 유역이랑 붙어 있기도 했고 어젯밤에는 무슨 음식 좋아하는지. 생일은 언제인지 이런 간단한 호구 조사도 하다 잠들었는데.

첫 주에 별 한 개를 찍은 수치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받아 주지 않아서 실망했나? 아니면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벽을 치기로 했나?’

오만 생각이 다 드는 와중 유역이 내 문자 연락을 다 씹었다는 것이 뒤늦게 다시 떠올랐다.

‘아.’

그것부터 일단 해결해야지. 나는 유역이 아직 출발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따라붙었다.

“역아, 혹시 핸드폰 문자 같은 건 잘 안 봐?”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오늘도 휴식 시간 내내 핸드폰만 붙잡고 있던데. 내가 애써 심문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톤을 가라앉히며 묻자 유역이 꿀꺽 침을 삼키더니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 문자요? 저한테 문자 보내셨어요?”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못 받은 건지. 나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응. 혹시 문자 확인하기가 좀 어려운 거면 메신저로 연락해도 될까?”

메신저는 최소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이 되니까.

애써 친절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묻자 유역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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