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모든 일에는 이유가 (1)
“저… 몸은 좀 괜찮으세요?”
슬쩍 메인 촬영 세팅에 앞서 유역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자 유역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끄덕였다.
화가 꽤 많이 났나. 그래도 방송이니까 우리가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 텐데… 속으로 골치 아프게 됐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좀 과했죠… 죄송해요. 기획 자체가 좀… 요즘은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굳이 싶고….”
멋쩍은 마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뺨을 긁적이자 유역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게 정말 수더분하게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뭐랄까… 더 말 걸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 같아서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첫인상부터 망해 버렸는데?’
새삼 별 두 개가 어느 정도의 친분인지를 곰곰 따져 보니 앞날이 까마득했다.
겟 데뷔에서 나름대로 동병상련을 겪고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갔는데도 별 두 개가 안 되는 멤버가 있었는데.
3주짜리 예능에서 별 두 개 수준으로 친해지려거든 개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지 않는 한 무리였다.
‘일단 좀 어색하게 보이더라도 룸메이트가 되는 건 당연한 거고….’
뭘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을까… 게임이나 미션 할 때 좀 배려해 주고 그러면 도움이나 될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곧 촬영이 개시되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순서로 촬영이 진행될지 대본이 주어지는 예능이었기 때문에 미리 고지해 둔 설정에 따라 나는 제일 먼저 촬영장에 도착한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세트장에 들어가 초대장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아… 와, 깔끔하다.”
촬영의 뼈대가 되는 흐름 외에 이런 사소한 반응이나 행동들은 모두 자율에 맡겨져 있었기에 나는 처음 세트장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소감 그대로를 내뱉었다.
“이게 뭐지?”
뻔히 알면서 처음 보는 척. 거실에 놓인 테이블 위의 카드를 뒤집자 미리 확인했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인수 님. 모두의 자취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서인수 님… 모두의 자취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는 초대장에 적힌 내용을 줄줄 읊었다.
[그럼 앞으로 도착할 룸메이트들을 위해 준비를 시작해 주세요.]
[본인을 포함한 룸메이트 6인의 웰컴 키트를 준비해 주세요.]
“웰컴 키트를 준비해 주세요… 보상은… 5천 원?”
그리고 대본대로 관찰용 카메라에 대고 물었다.
“5천 원이 뭐예요?”
순간 5천 원만 주면 어메니티 정리해 주는 놈, 같은 문구가 떠올랐으나 내 입으로 나오기에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듯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거 모아서 뭐 사고 그러는 거예요?”
한 번 더 시스템 룰 설명을 위해 관찰 카메라에 대고 묻자 메인 카메라를 들고 있는 촬영 감독님 옆의 PD님이 새로운 카드를 건네주었다.
[모두의 자취방 첫 번째 룰.]
[자취방에서 사용하는 모든 예산은 미션과 게임을 통해 모을 수 있으며 모두와 공동으로 사용한다.]
“아~.”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개인용품으로 사용할 웰컴 키트를 준비하기 위해 안쪽에 있는 세탁실로 향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출연자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맞이하면서 줄 선물을 준비하다가 곧이어 합류할 아이돌 선배와 만나 소회를 풀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설정이었다.
‘내가 시청자 입장일 때는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정해 주는 걸 줄은 몰랐는데.’
너무 인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대사 하나하나를 정해 주는 건 아니지만 참가자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건 방지해 주는 계획들이 착착 쌓여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겟 데뷔보다는 편한 느낌일지도.’
스스로 분량을 쟁취해 내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무척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럼 일단 기본적으로는 제작진이 해 달라는 대로 맞춰 주고, 나머지 여력은 유역이랑 친해지는 데 쓰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이후 한 명 한 명 출연진들이 합류하고 마침내 여섯 명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때가 되었음에도 유역만큼은 마치 잘못 들어온 사람처럼 겉돈 것이다.
“와, 근데 진짜 여기서 요리뿅 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요리뿅 말고 그냥 본명으로 불러 주시면 안 돼요?”
다 같이 모여 첫 번째 게임인 아이스 브레이킹을 수행하기에 앞서 각자 본명을 트고 말을 편하게 하네 어쩌네 정리를 하는 와중에도 유역은 항상 두 발자국 뒤에 있었다.
“그럼 지금 나이가 다들 23 이상이 없는 거죠?”
“네네.”
“그럼 내가 제일 형이네?”
일부러 비슷한 또래들로만 섭외했기 때문에 다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
유일한 군필자이자 나이가 제일 많은 춤신도 24살이었고 그다음인 요리뿅과 아이돌 선배가 23살, 나와 모델이 22살이었다. 그리고 막내가 문제의 유역인데….
‘이 분위기 어떡할 거냐고.’
분위기가 아니라 위기가 따로 없었다.
“유역 씨도 같이 말 편하게 할까요? 어차피 다들 나이 차이 크게 안 나는데 그냥 다 같이 말 편하게 하고 형 동생 하면 컨셉에도 맞고 좋을 것 같은데.”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괜찮아도 우리가 안 괜찮다고. 어색해진 분위기에 요리뿅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뭐 존댓말이 더 편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 저희는 말 편하게 해도 괜찮죠?”
그러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편하신 대로….”
이런 건 대본에는 없는 내용이었는데. 다들 쓴 입맛을 다시며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하자 혼돈이 따로 없었다.
“자 그러면 오늘 저녁 메뉴 준비를 위해 재료 벌기 게임부터 시작해 볼 건데요. 우선 돌아가면서 헤드셋을 착용하고…”
제작진이 준비한 건 다른 예능에서도 자주 보이는 포맷의 게임이었다. 일명 조용한 스피드 퀴즈.
퀴즈를 내는 사람만 헤드셋을 끼고 누구나 들으면 알 정도로 유명한 히트곡을 들은 다음 몸으로 곡을 표현해서 정답을 맞히게 하는 게임이었다.
K팝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출연진이 많다 보니 너무 직접적으로 안무를 추는 건 반칙이라는 룰이 새로 걸린 건 덤이었다.
“아, 이런 건 또 내가 전문인데.”
의기양양하게 나선 춤신을 필두로 나 역시도 슬쩍 안무를 변형해서 메인 키워드를 표현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자 그러면 제일 먼저 맏형부터 시작해 볼까요?”
미리 알고 있었던 대로 춤신을 시작으로 게임이 시작되자 본격적인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정답! 미라클러, 너와의 기적!”
“앞에 나와서 포인트 안무랑 같이 정답 외쳐 주세요!”
“우와!”
춤신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로 콩콩 뛰기 무섭게 아이돌 선배가 정답을 외쳤다.
그러곤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정답으로 외친 곡의 포인트 안무인 어깨 으쓱으쓱 춤을 따라 춘 순간.
깡-!
“악!”
머리 위에서 퍽, 가볍고 소리가 잘 울리는 쟁반이 날아들었다.
“오답입니다! 정답 기회는 다섯 분 통틀어서 딱 세 번만 드리며 세 번 연속 오답시 실패로 처리됩니다.”
“아, 아니 아픈 것보다도 소리가 너무 커서 진짜….”
과장된 포즈로 머리를 붙들고 울상을 짓는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원래도 이미지가 진중한 느낌은 아니기도 했고 팀 내에서는 개구쟁이 막내 느낌이라 잘 어울렸다.
“괜찮아? 혹은 안 났어?”
아직은 초반이다 보니 다들 어색함이 남은 채로 걱정해 주는 와중 유역은 혼자 다른 출연진들과 동떨어진 채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고 식사 준비를 마치기까지 유역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굉장한데….’
다른 사람이 퀴즈를 내는 역할일 때는 아예 정답을 맞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본인이 퀴즈를 낼 때는 애초에 말을 안 하는 게 룰이라서 움찔거리며 마임을 한 게 전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인이 설명해야 할 곡으로 나온 곡이 키워드가 강렬하다 못해 뮤비의 한 동작만으로도 자동 연상이 되는 수준의 곡이었다. 유역은 자연스럽게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제 차례를 넘겼다.
‘이러면 분량 안 나올 텐데… 괜찮은 건가?’
이전에 나왔던 예능에서도 이런 식으로 무존재감으로 게스트 소개 화면에만 나오고 묻혔던 것 같은데.
발전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처음 왔을 때 기절한 게 너무 스트레스라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밖엔 없는 건지 제삼자인 나로서는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 내가 분량을 좀 챙겨 줘 볼까.’
내 담당은 김치부침개였다. 나는 다 같이 자기 담당을 정하고 있을 때 뒤에서 멀뚱멀뚱 있느라 수저 놓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진 유역을 불렀다.
“유역아 잠깐만 이쪽으로 와 볼래?”
“아, 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거실에 서 있으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유역이 재빨리 가스버너 앞으로 튀어왔다.
“이거 싱크대에 가서 흐르는 물에 씻고 이만한 크기 정도로 잘게 잘라 줄 수 있어? 김치부침개에 넣을 거라서.”
“아, 네.”
아까부터 대답 너무 ‘아, 네.’만 반복하고 있지 않아? 지적할 새도 없이 주방으로 튀어간 유역에게 내가 맡긴 건 오징어를 넣기 좋은 크기로 손질하는 일이었다.
가위를 쓰든 칼을 쓰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가져오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최소한 나중에 편집본 보고 쟤는 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뭐 하는 것도 안 나오냐 욕을 먹는 건 방지할 수 있겠지.
그리고 잠시 후.
“…….”
접시에 담긴 오징어를 본 나는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유역아.”
“네.”
이번에는 ‘아.’는 뺐군.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거…. 일부러 이렇게 한 건 아니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참으며 접시 안의 내용물을 카메라 앞에 보여 주었다.
접시 위를 확인한 스태프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와중 유역은 뭐가 잘못됐는지 정말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뭐 문제라도….”
촬영을 시작한 이래로 유역이 내뱉은, 대본에 없는 첫 번째 문장이었다.
문제라도? 그럼 이게 문제가 안 되겠냐. 유역이 내민 건 다름 아닌 죽 같은 상태가 된 ‘오징어였던 것’이었다.
“인수 씨 그거 살릴 수 있겠어요?”
PD가 웃으며 물은 순간 나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뇨,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