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굳이 그런 생각을 (4)
다음 날 아침. 느긋하게 눈을 뜬 나는 어째 평소와는 다르게 햇살이 가득한 방을 보고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오늘따라 방이 왜 이렇게 환하지? 이렇게까지 밝을 리가 없는데… 설마 하는 생각으로 눈을 뜨자 세상에.
[10:56]
미친, 늦잠 잤네. 일어나야 할 시간을 초과해도 한참을 초과한 상황이었다.
“미쳤나, 왜 생전 안 자던 늦잠을….”
오늘은 개인 스케줄이라 다른 멤버들이 대신 커버 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어제 누나를 만나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평소 늦장을 부리는 일이 많지 않은 제현호도 웬일인지 인형처럼 조용히 자는 중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배웅 인사를 하는 것도 제대로 못 듣고 헐레벌떡 아무렇게나 주워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지만 이따 이동하는 동안 정리하면 되겠지. 거울도 보지 않고 서둘러 사옥으로 뛰어 들어가자….
‘응…?’
어떻게 된 일인지 나 빼고 모두가 유유자적하게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어, 왔어요? 인수 군 쿠키는 먹나? 초코랑 마카다미아 맛있는데.”
“아, 커피 드시면 캡슐이라도 내려 드릴까요?”
예상한 것과 달리 태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네?”
지금 당장 대기시켜 놨을 차로 달려가서 미팅이 있는 방송국까지 달려가야 하는 상황 아닌가.
나 혼자 마음이 급한 건지 아니면 뭔가 착오가 있었던건지 놀라 아무말도 하지 못하자 매니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 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부터 하자. 내가 무안해할까 봐 일부러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 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다들 동시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무슨 소리예요? 거의 한 시간 일찍 와 놓고서.”
기획 실장님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가리킨 시계는 내 기억으로는 지각이 아닐 수가 없는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다.
"네?“
”아~. 인수 씨 혹시 미팅 11시 30분인 줄 알았어요? 그거 1시로 밀렸는데?“
”네?“
연달아 바보 같은 소리를 내자 내가 그러는 게 퍽 드물기도 하고 재밌어 보였는지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공지 안 했어요? 그제 애들 데려다주면서 말씀하셨다고 하셔서 공지하신 줄 알았는데.“
”어… 인수 씨 우리 톨게이트 지날 때쯤에 제가 얘기했을 때 대답하시지 않았어요?“
갑자기 책임 소재를 묻는 진실 공방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는 다급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까 확실히… 뭐가 시간이 바뀌었다고 하셨던 것 같기도 한데….’
제현호 일로 계속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제대로 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 죄송해요. 한 시라는 것만 듣고 제가 11시로 착각하고 있었어요.“
슬쩍 그냥 농담한 거라고 임기응변…으로 때울 수도 있었으나 거짓말을 하느니 그냥 순순히 인정하는 게 나았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급히 왔구나? 아직 시간 여유 있으니까 와서 뭐라도 좀 같이 들어요. 점심 못 먹고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간단하게 뭐라도 좀 시킬까?“
내버려 두면 그대로 점심 메뉴까지 고르게 할 기세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아뇨! 괜찮아요! 그냥 물만 마실게요.”
얼결에 시간이 붕 떠서 이럴 거면 잠깐 숙소 돌아가서 옷도 좀 갈아입고 머리도 좀 다시 다듬는 게 나으려나.
고민하는 사이 다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다시 돌아갔다 오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잠시 후, 나는 기어이 점심으로 만두까지 조금 얻어먹고 나서야 미팅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럼 나오기 전까지 지각한 줄 안 거예요?”
“아, 네… 제가 알람을 바뀌기 전 시간 기준으로 맞춰 놨는데 그걸 끄고 잤더라고요.”
아니면 내가 무의식중에 어차피 1시로 미뤄졌으니까 더 자도 된다고 꺼 버리고 그대로 더 자 버렸던 걸까?
평소 늦어도 11시 안에는 눈을 뜨곤 했기 때문에 오후 스케줄만 있을 때는 알람을 설정하지 않고 잘 때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나사가 빠지긴 했다. 나는 속으로 짧게 자책하며 입술을 길게 늘였다.
“인수 씨는 평소에 너무 잘하니까… 가끔 로봇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 이렇게 사람 인증을 해 주시니 반갑네요.”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야. 하하,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한 귀로는 듣고 한 귀로는 흘리는 사이 어느새 방송국 주차장이 코앞이었다.
“먼저 올라가실래요? 아니면 주차장에서 같이 올라갈까요?”
나는 잠시 슥, 방송국 출입구를 보다가 아마 나를 보러 온 건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의 출근길에 진을 치고 있는 팬들을 확인했다.
“주차장에서 같이 올라가죠.”
아까 사무실에서 열심히 수습하긴 했지만 여전히 평소보다 허술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내 팬분들도 아니고 다른 찍사 카메라에 후줄근한 차림으로 찍히는 건 팬분들도 원치 않으실 테니까.
다행히 미팅 시간보다 15분쯤 일찍 도착해서 미리 회의실로 향하자 제작진분들과 나보다 일찍 도착한 두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쾌활한 인사와 함께 나를 맞아 준, 출연진으로 보이는 사람은….
‘응?’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요리뿅 님?”
내가 출연하는 음방이나 예능 말고는 유튜브나 미디어를 자주 보지 않는 나도 알 만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헉, 저 아세요?”
그쪽이 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어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알죠. 그 치즈빵으로 유명하신 분!”
그게 뭐냐면 귀여운 곰돌이 모양으로 빵반죽을 만들어서 치즈빵을 구웠는데 곰돌이의 눈코입을 그린 치즈가 새까맣게 타 버리고 눈코입에서는 치즈가 줄줄 터져 나와서 요리 절망편으로 널리 퍼진 영상이었다.
곰돌이가 하나하나 터질 때마다 오열하는 유튜버의 리액션이 꽤 웃겨서 나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는데.
실시간 유행 영상에 들어서 알고리즘도 탔고 한국어를 몰라도 일단 보이는 것만으로도 웃긴 덕에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조회 수가 올라가 몇백만 단위의 조회 수를 자랑하는 영상이었다.
‘요 근래에 인터넷 하면서 그걸 모른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지.’
굳이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각종 커뮤에 최신 유행 유머로 돌아다녔으니까.
그 화제의 주인공이 내 앞에 서 있다니 굉장히 희한한 경험이었다.
“아 쪽팔려, 하필 그게 제일 빵 떠 가지고. 저 원래 그렇게 요리 못하는 사람 아니에요.”
화면 속에서 봤을 때는 지금보다 좀더 동글동글한 인상이었는데. 방송 활동을 하면서 다이어트를 한 건지 아니면 영상빨을 못 받는 건지 훨씬 훤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팬분들도 나를 실제로 뵀을 때 이런 식으로 느끼시려나. 실물이랑 화면이랑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시기도 하고.’
연예인분들과는 아무래도 음방이든 예능이든 실물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화면 속 얼굴보다 오히려 실물이 더 익숙한 경우가 많은데.
새삼 신기한 역지사지를 해 보는 사이 ‘요리뿅’ 님 옆에 있는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 이제 저 소개해도 되나요?”
“아, 헉 네네!”
요리뿅의 호들갑스러운 대답에 멋쩍은 표정으로 웃은 건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는 사람이었다.
‘그… 되게 큰 화면으로 본 것 같은데….’
왜 이름이 생각이 안 나지. 표정에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쓴 그때 본인이 직접 자기 이름을 밝혔다.
“저는 모델로 활동 중인 이원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어쩐지. 뭔가 TV나 유튜브가 아닌, 그것보다 더 큰 화면으로 본 것 같다 했더니 매일 사옥으로 출퇴근할 때마다 지나는 옥외 전광판에 얼굴이 걸려 있는 사람이었다.
“아, 반가워요. 저희 사옥 근처에 원우 씨 전광판 엄청 큰 거 걸려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내적 친근감이 들었나 봐요.”
어색한 분위기를 쫓아 보고자 미리 모인 사람들끼리 두런두런 자기소개를 하는 사이 다른 출연진이 한 명 더 도착했다.
“어? 인수네? 너도 여기 나오는 거였어?”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었다.
“네, 저도 형 오시는 줄 몰랐어요.”
사이가 좋냐 나쁘냐를 따지자면 중간 정도랄까. NO 연습생으로 잠깐 있다가 다른 소속사로 옮겨 간 선배 아이돌이었다.
‘비연예인 출연자는 요리뿅이 다인가?’
잠시 후, 스케줄 때문에 오늘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는 배우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 모두가 모였을 때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우 시끄러워. 원래 성격인지 아니면 영상 속에서는 튀어 보여야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진 알 수 없었으나. 마지막으로 합류한 인플루언서는 요리뿅만큼이나 소란스러운 타입이었다.
“자, 우선 유역 씨 빼고 다 모이셨으니까 이제 설명드릴게요.”
우리가 함께 촬영할 예능의 컨셉은 심플했다. 20대 초반, 남자 여섯 명의 합숙 자취.
‘나나 선배 입장에서는 평소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생각하기도 잠시 PD님이 구체적인 컨셉을 설명했다.
“인데, 이제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가는 연습을 한다는 컨셉이라서요. 저희가 금지하는 게 세 가지가 있어요.”
우선 첫 번째로 외박 금지. 이거야 오래 찍는 것도 아니고 3주 정도 매주 1박 2일씩만 쓰는 거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외식 및 배달 금지. 촬영 중 먹는 식사는 전부 직접 해 먹는 것만 가능하다고.
마지막으로 사치 금지. 사치라고 하기에 잘 와 닿지 않았는데 룰을 들어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함께 생활하는 동안 지출하는 모든 생활비는 모두가 공용으로 사용하며, 제작진이 제공한 미션과 게임을 통해 벌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한정된 인력과 한정된 예산을 이용해서 알뜰살뜰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다.
유튜버, 아이돌, 배우, 모델, 각자 직업은 다양하지만 어쨌든 20대 초중반이라는 공통점을 두고 젊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목표라나.
“와 저 진짜 너무 기대돼요. 저희 오늘 파하기 전에 사진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헉 저도요!”
"죄송한데 볼깨물 하트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완전 귀엽겠다, 당연히 되죠!“
음….
‘어째 좀 불안한데.’
그러나 이제 와서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