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굳이 그런 생각을 (3)
그리고 마침내 기다린 밀키즈의 차례가 되자 낡고 낡은 영상 하단에 눈에 띄는 문구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으로 선보이는 밀키즈 완전체!]
그리고 그 뒤로 줄줄이 그 시절 특유의 시시콜콜한 TMI와 함께 자세한 설명이 나왔다.
[지난여름 이후 건강상의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유해라가 드디어 팬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비안, 해라, 지인, 연미, 네 요정들이 선사하는 따뜻한 크리스마스!]
멘트 낡은 거 봐. 그야 20년도 더 된 방송이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문제의 날짜가 유 대표의 출산 후 첫 무대라는 걸 알고 나니 좀 감이 잡힐 듯하면서도 오리무중이었다.
‘어쨌든 계속 미션을 진행하려면 유 대표랑 만나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수로? 비안은 연락처를 따로 갖고 있기도 하고 내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니 선뜻 감사 인사라도 할 겸 뵙고 싶다고 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유 대표는….’
내가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소속사 건물로 찾아간다고 하면 우선 ‘왜?’나 ‘굳이?’를 꺼내 들 것이 뻔했다.
‘뭐 실제로도 맞는 말이기도 하고.’
결국 유 대표를 만나려면 그럴 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무슨 수로 이유를 만드냐.’
일찍이 엔카운터 활동이 종료되는 대로 이적할 소속사를 알아보기 위해 둘러본다, 정도가 제일 납득이 가는 이유일 것 같긴 한데.
그러나 그쪽에서 그다지 반기지 않을 듯했다. 4차 미션 때도 내가 우겨서 들어간 거지 그쪽에서 나를 열렬히 원하고 그러진 않았으니까.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유 대표는 내가 자기 아들인 게 밝혀지는 걸 원치 않을 테고, 처음엔 겟 데뷔를 통해 데뷔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니 다시는 접점이 없기를 바랄지도.
‘이게 뭔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상황이냐.’
왜 아침 드라마나 일일 연속극에 흔히 나오는 사연 있잖아. 자식을 버리고 재벌가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비정한 엄마가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자식을 주저앉히려 하거나 방해하거나 하는…. 아주 흔하디흔한 클리셰였다.
‘딱히 지금은 미혼이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고 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한창 아이돌로서 현역 활동을 할 때나 막 소속사를 차려서 자리 잡아 가는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상관없지 않나.
괜히 서운하기도 하고 조금은 괘씸한 생각도 들었으나 지금 곱씹어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유는… 만들어 봐야겠지.’
나는 최근 쳇바퀴처럼 굴렀던 스케줄 틈틈이 교환한 다른 아이돌들의 연락처를 떠올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뭘 그렇게 보냐?”
내가 한참 핸드폰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처박고 있자 규민이 궁금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어 별거 아냐.”
“오늘따라 좀 이상한 거 같은데….”
하여간 쓸데없이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현호의 미션을 무사히 해결한 만큼 지금 당장은 급박하게 쫓기는 일도 없고 오히려 느긋한 편이었다.
‘진짜 막막하고 바빴으면 이렇게 찾아볼 여유도 없을 테니까.’
“저녁은 뭐 먹을 거야?”
내가 적당히 화제를 돌리자 규민이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어제 그렇게 먹었으니 양심이 있으면 샐러드?”
말 돌리려고 한 소리라는 걸 못 알아챘을 리 없건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하는 걸지도.
‘그런 면에서는 활동 초기에 비하면 좀 신뢰가 쌓인 거려나.’
몇 달 전이었으면 너 진짜 수상하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잔뜩 해 댔을 게 뻔했다.
“샐러드 먹어요? 드레싱 뭐 뭐 남았어요?”
어느새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듣고 다가온 영인이 불쑥 끼어들어 준 덕분에 분위기는 더더욱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스리라차만 잔뜩 남아 있던데. 할라피뇨랑.”
“아 진짜 싫어.”
“네가 달달한 것만 골라 먹어서 그렇게 된 거잖아.”
매운 걸 쥐약 수준으로 싫어하는 영인이 상상만으로도 괴로워하는 사이 늦은 점심으로 뺏어 먹은 라면이 벌써 다 소화가 되었는지 하나둘씩 방에서 나와 냉장고 앞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내 현미 플레이크 먹은 사람 누구야? 냉장고에 넣어 둘 때 분명 이거보다 많았던 것 같은데.”
“어….”
그러다 뜬금없이 발생한 절도(?) 사건에 적막이 찾아오기도 잠시. 우당탕탕 느긋한 휴일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그거 어제 네가 안주로 계속 먹었던 거 아니야?”
“오?”
“와 형 지금 본인이 먹어 놓고 저희 의심하신 거예요? 저 서운해요.”
얼결에 반전된 상황에 은찬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더듬었다.
“아닌데…. 진짜 제가 먹었어요? 기억이….”
“기억도 안 날 만큼 과음하다니, 아이돌이 그래도 돼요?”
“와 이거 진짜 대사건이다.”
거실이 소란스러워 주섬주섬 밖으로 나온 현호까지 가볍게 배를 채우고 나니 어느새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었다.
“잘 자.”
“네. 형도요.”
내일 예능 미팅하러 이동하는 동안 시상식에서 번호 딴 아이돌들한테 연락 좀 돌려 봐야지.
머릿속으로 가볍게 일정을 훑고 나니 곧바로 긴장이 풀린 듯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감자마자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모처럼 쫓기지 않고 여유로운 밤이었다.
***
한편 서울시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자기 방 데스크톱 앞에 앉아 서인수 태그를 달고 올라오는 글을 마치 본인인 것처럼 모니터링 중이던 인덕은 의아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거 좀 확실히 신경 쓰이는데.’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인수를 향한 말도 안 되는 악성 루머들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굳이 그때랑 비교를 하자면 어쨌든 전보다는 좀 인원수가 줄어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분명히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여러 계정들이 동시에 같은 주장을 펼쳐서 여론을 휘두르려고 하는 패턴은 같아서 동일범의 소행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짓을 대체 왜 하는 거냐.’
전보다 화력이 줄어든 거 보면 내부에서 좀 이탈한 인원이 있나 보지? 어련히 다른 아이돌 팬덤의 악성 견제 정도로 예상하고 있던 인덕은 쯧쯧 혀를 차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자기 덕질을 하는 게 백번 나을 텐데.’
벌써 아이돌 덕질 경력이 꽤 길어진 인덕이 일찍이 내린 결론이었다.
전처럼 루머에 대한 검증이 어렵고 처벌도 힘들던 시절도 아니고.
뻔히 최초 유포자 잡아내려면 검거할 수 있는 시대에 왜 그런 본인 신상에서도 이롭지 않은 짓을 하는지 제 뼈를 깎아 먹는 행위가 따로 없었다.
지금도 봐라 이런 거 해 봤자 누가 믿겠냐. 인덕은 조금 전 자신이 신고 버튼을 누른 게시글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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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인수 견제 장난 아니네 (+14)
[본문]
(사진)
무대 위에서 한 대 치겠다?ㄷㄷ
겟 데뷔 방송할 때는 이런 이미지 아닌 것 같았는데 이제 자리 좀 잡았다고 슬슬 성격 나오는 듯ㅋㅋ
1년 차도 안 됐으면서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냐 엔터 활동 끝나면 듣보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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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시글들의 결론은 마치 입이라도 미리 짜 맞춘 듯 같은 헛소리를 했다.
지금은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지금 KMC에서 대놓고 밀어 주니까 겉모습만 그런 것뿐이고.
실제로는 내부 경영 상태 개판에 온갖 소속사들이 숟가락 얹고 난리라 애들 정산도 못 받고 쫄쫄 굶어 가며 회사 먹여 살리고 있다나 뭐라나.
코드비 재정도 심각한 수준으로 적자라서 KMC에서 이제 더 이상 아이돌 서바이벌 사업을 벌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겉보기에만 그럴싸해 보일 뿐 망했고, 앞으로 해체하면 더 망할 거니까 가라앉는 배 붙들고 난리 치지 말고 빨리 탈주해라, 뭐 이건데….’
인덕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엔카운터가 망한 그룹….
‘이겠냐?’
억지도 정도껏이지. 실제 팬덤 규모를 증명하는 콘서트 대관 스케일이나 앨범 판매량을 봐도 엔카운터는 단연코 1군이었고, 겟 데뷔 직후 제일 피크를 찍었을 것이라 생각한 버즈량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더 흥하면 흥했지 모든 지표가 엔카운터의 성공을 보여 주고 있는 와중 어떻게든 부정적인 이슈를 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이 양심 없는 집단들이 대체 어디서 모여서 이 난리를 치는 건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이러는 것인지 인덕은 알아낼 수 없는 영역이었으나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싹 다 신고해 버려야지.’
중복해서 신고당할 만한 게시글을 올리는 IP를 아예 영구 정지시켜 버리면 좀 덜할 텐데.
그러면 이용자 수가 줄어들 게 걱정이라도 되는지 커뮤니티 관리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저 이상한 애들 말고는 대체로 반응 좋았던 것 같지….’
마지막으로 잠들 전 혹시나 자신이 놓친 떡밥이 있을까 봐 마지막으로 인수를 검색해 본 인덕의 눈에 웬 특이한 게시글이 들어왔다.
[서인수 실물 장난 아니네요]
뭔가 아이돌 팬이 주접으로 쓴 제목이라기에는 담백하달까, 말투가 조금은 달라서 클릭해 보니 연예 관련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아니라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고충을 공유하거나 내부 고발을 하는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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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 일하는 곳에서 서인수 왔는데 처음에는 제대로 못 봐서 왜들 그렇게 호들갑인가 했거든요.
저희 직원한테 뭐 좀 부탁해야 할 게 있어서 카운터 쪽으로 와서 말씀하시는데 서인수 씨 진짜 잘생기셨더라고요. 뒤에 후광이 뙇ㄷㄷㄷㄷ;;
집에 와서 화면으로 다시 보는데 비율이 워낙 좋으셔서 그런지 실물로 뵀을 때 분위기가 더 장난 아니에요 다른 직원들이 왜 그렇게 서인수 님 왔다고 메신저로 난리를 쳤는지 이해가 가는 비주얼;;;
저희가 업종 특성상 남직원도 용모가 단정한 사람 중심으로 채용해서 다들 내심 외모에 조금은 자신이 있었거든요.
이 정도면 잘생기지 않았나 하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덕분에 주제 파악했습니다. 아 이래서 우리 동료 직원분들이 우리 팀 남자들 보고 그렇게 싸늘했던 거구나 이해가 되었고요. 덕분에 점심시간 직전에 눈 호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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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데이션 식으로 변해 가는 호칭에 댓글은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맞아… 인수가 진짜 잘생기긴 했어.’
비주얼이면 비주얼, 보컬이면 보컬. 둘 다 아이돌 최상위급 실력을 꽉 쥐고 있는데 춤이나 랩도 빈틈없이 평균 이상은 해서 아마 인덕 생에도 이보다 더 완벽한 아이돌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좀 건강하게 오래오래 활동해 줬으면 좋겠는데.’
너무도 단단해 보여서 언젠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건 쓸데없는 기우려나.
인덕은 직장인 커뮤에 올라온 게시글을 캡처에 지인들에게 공유하고는 생각을 비우고 잠을 청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덕질을 하는 건 인수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