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2)
“……?”
제현호는 짐작 가는 이유가 없는지 다소 의아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말고 따로 둘이서만 얘기해야 하는 일이에요?”
자연스럽게 뒤따라온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얼마 안 걸리니까 잠깐만.”
그러자 아까도 자리를 비웠던 것이 신경 쓰이는지 규민이 탐정이라도 되는 양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 몰래 뭐 사고 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자꾸 이상한 상상으로 헛다리 짚는 거 이제는 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수상하단 말야. 냄새가 나~.”
때마침 내 주머니에 아까 아침에 먹으라고 매니저가 하나씩 쥐여 주었으나 먹지 않고 남겨 둔 쿠키가 있었다.
나는 슥,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규민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이거나 먹어라.”
“응?”
“뭐야 과자 탐지견이야?”
갑자기 엉뚱해진 상황에 다들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나는 재빨리 제현호를 데리고 비상 계단 쪽으로 데려갔다.
‘이쪽 층은 사람이 좀 다녀서 새어 나갈까 봐 조금 불안한데.’
여전히 멀뚱멀뚱 아무것도 짐작 가는 게 없어 보이는 제현호를 데리고 한층 더 위층으로 올라가니 그제야 주위가 좀 조용해졌다.
나는 복도 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갑자기 확 열리지 않도록 문고리의 잠금장치를 살짝 잠그고는 물었다.
“너 요즘 뭐 힘든 일 없어?”
여기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내가 개입하기에는 좋은데. 그러나 제현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딱히 없는데요. 저 뭐 요즘 실수한 거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호감도 미션이 아니었더라면 어디 불편한 일이 있는지 짐작도 못 했을 테니까,
“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솔직하게 시설 보호자분 통해서 들었다고 이야기할까. 현호가 지금 누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지.’
찾고자 하는 이유가 정말 가족의 정이 그립고, 다시 만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버린 가족들에게 내가 지금은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고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지.
잠깐 나라면 어떤 감정이 남아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유 대표에 대해 그다지 강렬한 원망도 그리움도 없었다. 내 친모가 유 대표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비슷했다.
지금의 나는 양부모님을 만나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게 친부모님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 데뷔와 앞날을 가로막은 사람이 유 대표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았을 때는 아무렴 그래도 부모인데 버린 자식이래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주저앉히지는 말아야지 하고 아주 잠깐 원망스러웠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실력으로 당당히 성공했으니까.’
마냥 천사표처럼 유 대표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모든 걸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복수를 하고 싶을 만큼의 악감정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과 정도는 받고 싶은 마음이려나.’
데뷔 직후나 한창 활동할 당시의 전성기 때는 그렇다고 쳐도. 아이돌 활동을 그만둔 후에는 내 앞에 한 번 정도는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는 게 걱정이라면 조금 크고 난 후에 알려 줘도 되는 거고. 최소한 성인이 되었을 때라도 사실대로 밝힐 수 있는 거잖아.
이 모든 감정들을 굳이 하나로 뭉뚱그려 표현하라면… 역시 증오보다는 서운함 쪽에 더 가까웠다.
‘좀 웃기긴 하네.’
서운하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기대가 있을 때에나 드는 감정일 텐데.
완전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더라도 핏줄이 이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모로서의 책임감을 기대하다니.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제현호의 표정을 살폈다.
더 할 말 없으면 빨리 대기실로 돌아가기나 하자고 말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더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거 없으니 그냥 돌직구로 말하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가 기분 나쁠 수도 있는 건 아는데. 이런 부분까지 포함해서 협력하기로 한 거라고 생각해서.”
대체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길게, 라는 느낌이었던 현호의 눈이 순간 찌푸려졌다.
“보호자분한테서 들었어. 누나분이 센터로 연락을 하셨는데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다고 의사를 밝히셨다고….”
나는 놈에게 한 소리 크게 들을 것을 각오하고 시선을 피했다. 최대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그나마 덜 기분이 나쁠 듯해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는데.
“…….”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려 확인한 제현호는 예상외로 덤덤한 얼굴이었다.
‘뭐지…?’
잔뜩 긴장한 채로 제현호의 답을 기다리자 놈이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아, 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어?”
“…….”
그 태도가 어찌나 무미건조한지. 저희 내일 보컬 트레이닝 강사님은 최유경 선생님이래요, 나 스타일리스트 쌤이 옷 저쪽에 걸어 두었으니까 가져가면 된대요, 할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게 끝이야?”
남의 일이나 다름없는 내가 다소 떨떠름하게 묻자 제현호가 오히려 내가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감상이 필요해요?”
“아니, 너 겟 데뷔 나온 것도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했었잖아.”
설마 그게 누나를 말하는 게 아니었나? 나 지금까지 완전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건가 아찔함에 등 뒤로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려던 그때 제현호가 다행히 내가 그 정도로 엇나간 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긴 했는데요. 해 보니까 적성에도 잘 맞고, 재밌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무대 일은 계속하고 싶어서요.”
내가 벙찐 채로 놈을 보고 있는 사이 제현호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본인이 그렇게 만나기 싫다는데다 연락처도 못 준다는데 제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찰나 제현호의 덤덤한 태도가 이해가 안 되었지만, 표정을 조금 더 살피니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포기한… 건가?’
아예 찾지도 못했다면 혹시나 그쪽도 내게 미안해하면서도 나를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 기대감을 품을 수 있지만. 만나기 싫다고 답을 들어 버린 이상 더는 희망을 꿈꿀 수조차 없어진 거니까.
‘물론 나도 유 대표가 날 절대 만나기 싫다고 하면… 누구는 뭐 대단히 보고 싶었던 줄 아세요? 하고 반발할 거 같긴 한데.’
제현호가 그런 타입은 또 아니고 지금 느껴지는 분위기도 그런 느낌은 아니라서 더 혼란스러웠다.
“그럼 왜 못 만나겠다고 하는지도 알아?”
그냥 미안해서 만나기 싫다, 그 정도의 이유만 듣고도 단념할 수 있는 건가.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캐묻자 제현호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버린 게 미안해서 못 보겠다고 하는데 더 뭐라고 말을 하고 붙잡아요. 제가 괜찮다고 해도 이제 와서 절 버린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 짧은 문장의 끝이 어쩐지 쓸쓸해서. 제현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다시 한번 또 거절당한다면, 그때는 가족에게서 세 번이나 버림받는 게 될 테니까.
그건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도 견딜 수 없는 일인 것이 분명해서 애초에 회피해 버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그냥 내 추측일 뿐이지만.’
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이대로 영영 못 만나도? 퀘스트 때문에 뛰어든 일이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주제넘은 참견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누나분이 너 못 보겠다고 한 이유, 그것 때문만은 아냐.”
결국 센터를 통해 한 번 더 졸라서 얻어 낸 정보를 전달하자 놈의 지금껏 덤덤했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한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녀석이 짓기에는 너무 쓸쓸한 표정이라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센터를 통해 더 조르면 그때는 정말 완전히 연락이 끊겨 버릴 수도 있는 거고….”
뭔가 방법이 없을까. 우리 쪽에서 누나분에게 직접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달할 방법이….
‘아.’
그래.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 해 볼 만한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으니까.
“잠깐만. 확실하게 통할 거라는 확신은 없긴 한데. 이따 이렇게 해 볼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으면 뭐든 쥐어야 했다.
제현호가 필요 이상으로 열심인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 귀를 기울였다.
***
잠시 후. 본격적인 오프닝이 시작되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1부에서 우리가 받을 만한 상은 트렌드상과 신인상 정도였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번 신인상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음…. 그럼 신인상 대신 대상으로 주려나.’
앞서 비슷한 부류의 트로피는 수없이 받았지만, 전혀 욕심이 없을 수는 없어서 살짝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가요 대상을 못 받으면 인기 가수상이라도 주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마저도 못 받더라도… 맡겨 놓은 건 아니니까,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마지막을 장식한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자 나와 현호 모두 수상자가 호명될 때마다 움찔 긴장하기 시작했다.
‘설마 2부에서도 상 하나도 안 주는 건 아니겠지.’
슬슬 수상 리스트가 끝나가는지라 반사적으로 가슴을 졸이던 그때.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인 대상 후보자 호명이 시작되었다.
‘노미네이트 된 건 진작 알았으니까, 뭐….’
그리고 마치 내 일인 것처럼 조마조마했던 그때 MC의 입에서 엔카운터가 불렸다.
“올해의 가요 대상 수상자는, 엔터운터! 축하드립니다.”
됐다. 겨우 찾아온 기회에 나는 일부러 우리 기본 대형이 아니라 제현호를 제일 오른쪽을 보내 마이크가 제일 나중에 도착하도록 했다.
[항상 저희를 믿고 응원해 주시는 드리머 여러분 너무 감사드립니다. 드리머와 함께 행복한 1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그리고 이렇게 과분한 상도 안겨 주셔서 덕분에 더없이 기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더 멋진 엔카운터가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답지 않게 조금 쑥스러운 인사까지 해 가며 마이크 순서를 넘기니 곧 제현호의 차례가 되었다.
끼이익,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이크 소음과 함께 제현호가 준비한 소감을 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