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실수였다고 해도 (1)
날이 여전히 추웠다. 해가 넘어가는 시기를 앞두고 있으니 당연했다.
덩치 큰 김밥처럼 둘둘 롱패딩 하나를 걸치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가을만 해도 아래층 사람이나 다른 호수 거주민들이 내놓았던 화분들이 싹 사라져 있었다.
나는 슥, 썩 밝아 보이지 않는 현호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이 안 와?”
“네.”
그리고 더 말도 없이 정적이었다.
‘말수가 많은 놈은 원래 아니긴 하지만….’
내가 단순히 잠이 안 오는 건지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물은 게 아니잖냐. Yes or No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래서 잠이 왜 안 오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결국 재차 되물어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왜?”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현호가 무척이나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형은 상 뺏긴 거 안 억울해요?”
상당히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빼앗겼다라… 글쎄다. 우리가 받았다가 수상 취소가 되고 결과가 번복된 건 아니니까 애초에 우리 것이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관용적인 표현으로는 빼앗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우리 손에 쥐어졌던 적이 없는데 빼앗긴 게 분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억울해하는 것도 어른스러운 처사는 아니었다.
“글쎄. 애초에 우리 준다고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던 상은 아니었잖아. 주최사별로 각자 자기네가 밀고 싶은 후보한테 주지 칼같이 점수로 재서 주는 거 아닌 것도 알고.”
본질을 외면하는 내 말에 현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우리 손 떠난 일 갖고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자는 얘기야.”
그러자 현호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더니 내 의견에 작게 반박했다.
“…저희는 기회가 한 번뿐이잖아요.”
한 번뿐이라니. 대상이 그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기회가 한 번뿐이라니?”
현호가 우물쭈물하며 설명했다.
“저희는 올해가 마지막이니까….”
“올해가 마지막 연말인 게 기회가 한 번뿐이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앞으로 시상식 두 개 더 남았잖아.”
“그, 셋 다, 받으면….”
곧장 쏘아붙이던 현호가 자기 입으로 말하려다가 부끄러운지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얼버무렸다.
“셋 다 받으면 뭐?”
그리고 내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물고 늘어지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겨우 문장을 끝마쳤다.
“트리플, 크라운이라고….”
그걸 신경 쓰고 있었단 말야? 생각도 못 한 야망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트리플 크라운 못 받아서 그렇게 아쉬웠어? 막 분해서 잠도 안 오고 그럴 만큼?”
내가 대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자 제현호가 자기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되레 목청을 높였다.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성적이었잖아요, 솔직히!”
“그래그래, 아. 야망이 생각도 못 하게 커서 진짜 놀랐네. 아니 혼내려고 한 말은 아니야. 꿈은 클수록 좋은 거니까.”
“하….”
놀리려는 의도가 잔뜩 드러나는 문장에 제현호가 자기 머리를 북북 헤집으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제현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쉬며 계단으로 향하려던 찰나. 나는 재빨리 현호를 붙잡고 말했다.
“엔카운터로서 상 받는 게 그렇게 중요했어?”
현호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더 자세히 풀어서 물었다.
“처음엔 뭐 아이돌 같은 거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만. 꽤 진심이 됐네?”
그러자 곧장 반박이 돌아왔다.
“내가 언제 아이돌에 관심 없댔어요.”
“데뷔는 관심 없는 것처럼 굴었잖아, 너. 그거 신경 쓰는 녀석이 첫 미션부터 그렇게 적을 주렁주렁 만들었어?”
현호가 잠시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것인지 한참을 기억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러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다시 새빨갛게 물들였다.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지금까지…!”
현호의 주의가 다른 쪽으로 돌려진 김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 일에 얼마나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다들 잘 알아. 나도 그렇고.”
그리고 여기부터가 진짜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근데 뭐… 이런 얘기 하면 정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해체한다 해도 엔카운터로서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것뿐이지 우리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
현호가 이해를 잘 못 했는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각자 자기 소속사로 돌아가서 재데뷔할 일정도 있을 거고. 이번만이 트리플 크라운… 을 따낼 유일한 기회는 아니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마.”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담으려니 새삼 또 조금 전의 장면이 떠올라서 살짝 목소리가 흔들렸다. 내가 웃음을 삼키는 모습을 본 현호의 미간이 더욱더 깊게 찌푸려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네 개인은 앞으로도 기회가 무한히 열려 있다는 거야.”
현호는 여전히 썩 개운하게 받아들인 것 같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실실 웃으며 물었다.
“아니면 그냥 트리플 크라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받는 게 중요했던 거야?”
그간 동료 의식이나 동지애 같은 건 그다지 보이지 않았던 제현호였기에 상당히 의외인 동시에 기특한 발상이었다.
“…몰라요.”
나 화났어요, 잔뜩 심통이 난 듯한 대답이었다.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모처럼 엔카운터 멤버들 중 동생 라인에 속하는 녀석이구나 실감이 났다.
“기특하네. 팀 생각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고.”
“…….”
제현호가 더 할 말이 없는지 조개처럼 입을 다문 그때. 머릿속으로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과연 제현호가 협조해 줄진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걸 왜 하냐고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한데….
‘그래도 말은 꺼내 봐야지.’
나는 무슨 음흉한 흉계라도 꾸미는 것처럼 웃어 보이며 물었다.
“어쨌든 그냥 묻고 넘어가기는 분하다는 거잖아. 그럼 내가 방법 하나 알려 줄까? 욕 안 먹으면서 항의할 수 있는 방법.”
현호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네 협조가 좀 필요해.”
됐다. 표정을 보니 이미 다 넘어온 것 같고. 결전의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그리고 마침내 당일. 두 번째로 참여하는 가요 시상식에 첫 시상식보다는 확실히 한결 자연스러운 태도로 레드 카펫을 지날 수 있었다.
‘처음엔 다들 무슨 걷기 설정 오류 난 로봇들처럼 삐걱거려서 엄청 웃겼는데.’
분명 연습실 거울 앞에 서서 레드 카펫 위를 걷는 연습을 했을 땐 꽤 자연스러웠는데.
다른 녀석들이 포토 라인 전부터 잔뜩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뚝딱거리는 것을 보니 나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 지금 엄청 부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아닌데, 난 진짜 괜찮았는데. 며칠 전 나간 시상식보다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굉장히 길어서 거의 서너 배는 더 걸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신드롬급의 히트를 친 그룹이라고 해도 신인은 신인이니까. 데뷔한 지 반년도 안 된 그룹이 레드 카펫 위에서 긴장한 티를 내는 게 그렇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 주고 싶은 욕심에 얼굴이 조금씩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자, 올해 최고의 화제를 불러 모은 특급 프로젝트 그룹! 엔카운터, 포토존으로 입장하시겠습니다.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MC의 요란한 멘트와 함께 포토존에 서자 오면서 걸었던 카펫 위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카메라들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자 왼쪽 보고 한번 포즈 부탁드립니다!”
미리 준비해 온 대로 오늘 컨셉에 맞춰서 작게 손동작을 하고 활짝 웃어 보이자 타이밍에 맞춰서 플래시가 잔뜩 터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한 제현호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로 유지하는 게 나아.’
괜히 방긋방긋 웃거나 가벼워 보이는 것보단 나았다.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쭉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 온 녀석이니까.
암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후 포토존에서 내려와 실내로 입장하자 누가 우리 든든한 소속 회사 아니랄까 봐 제일 좋은 앞자리에 우리 지정석이 딱 배치되어 있었다.
“우와…!”
지금껏 어딜 가도 자리가 그렇게 나빴던 적은 없지만. 이렇게 최고 상석을 배정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우리가 KMC에 벌어다 준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한가 싶지만….’
너무 그렇게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은근히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자 무대 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만큼 카메라에도 자주 잡히겠지. 흠 잡힐 행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새삼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당히 여유가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참석자분들이 입장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옆자리에 꽤나 어깨가 무거워지는 선배님들이 하나둘 착석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도착했을 때는 기분 좋았는데 조금은 부담이 되네.’
당장의 성적은 엔카운터가 더 앞서고 있긴 하지만 벌써 데뷔한 지 3~4년이 지난 그룹과 이제 막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신인은 다르니까.
나는 재빨리 뒤로 돌아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이자 다행히 다들 재치 있게 받아 주었다.
“어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무 귀한 분들이라 어떻게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중 한 분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리액션을 하자 규민이 재빨리 그 앞에 서서 큰절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돌아온 리액션이 아주 일품이었다.
마치 자신이 엄청난 중죄를 저지른 것처럼 황송해하며 바들바들 떨더니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물구나무서기를 하려 드는 바람에 주위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유쾌하게 서로를 존중하는 인사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꼭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네요!”
며칠 전의 일을 다들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어째 위로해 주는 분위기가 쑥스러웠다.
“선배님도 꼭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잠시 장내가 어수선하다가 곧바로 오프닝 무대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이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집중하자.’
나는 우리가 한창 바빠질 후반부를 기다리며 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