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그때의 선택이 (3)
슬쩍 내려다본 테이블 아래로 다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어… 이렇게 상을 받게 될 줄 몰라서 소감을 준비를 못 했어요. 너무 감사드리고 올 한 해 함께 수고해 주신 우리 스태프분들, 대표님….]
정말 생각해 온 게 없는지 이 시상식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을 받고 있는데도 수상 소감이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
우리 테이블 근처에 앉아 있던 다른 그룹 멤버들이 하나둘 조용히 응원을 건넸다.
“아쉽다… 엔카운터분들이 받을 줄 알았는데… 제가 다 아쉽네요.”
아쉬울 게 뭐가 있어. 그새 머리로 계산기를 두들기고 보니 어느 정도의 마이너스 점수를 받은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걸 심사 위원 평가라고 할 수 있나? 조작이 아니고?
다들 표정이 험악해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이라 나는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니에요, 올해 임주희 선배님도 정말 멋지게 활약해 주셨으니까요. 받을 만한 분께 갔다고 생각해야죠. 저희는 아직 신인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속은 쓰렸다. 우리가 일주일쯤 전 K사를 들이받은 건 때문에 이러나?
그러나 이번 시상식 주관사는 다른 방송국과 사기업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K사와는 경쟁사나 다름없는 위치의.
그러니 그날의 일로 우리가 보복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뭔데.’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KMC에 대한 견제였다. 우리가 특정 방송사 출신 그룹인 건 맞으니까.
우리에 대한 보복이나 견제라기보다는 KMC 산하 레이블이나 그룹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티 나게.’
우리한테 다른 굵직한 상이라도 줬으면 수상자가 너무 겹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나눠서 줬구나 참작할 수라도 있겠으나….
‘그게 아니니까 지금 이렇게 분위기가 술렁거리는 거지.’
비단 우리 자리 주변뿐만 아니라 객석은 물론, 초청석에 앉아 있는 가수들조차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에 어리둥절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 아쉽지만 올해 시상식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자리를 빛내 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리면서, 이제 마지막 남은 특별 단체 무대의 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저는 신승규였고요, 잠시 후에 마지막 인사로 찾아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C의 호들갑스러운 인사와 함께 많은 출연진이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우리도 수많은 출연진들 사이에서 껴서 병풍처럼 함께 자리를 빛내야 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을 새가 없었다.
“이쪽으로 이동하실게요!”
스태프의 인솔에 따라 재빨리 일어나 움직이다 보니 다들 넋 나간 듯한 표정이 눈에 띄었다.
“표정 관리, 표정.”
내가 재빨리 꾹, 지원의 소매를 당기자 눈에 띄게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그러고는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건 무슨 아픈데 어른들 걱정할까 봐 안 아프다고 힘겹게 거짓말을 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막내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인데 퍽 안쓰러워 보였다.
“이따 집 가서 다들 얘기 좀 하자.”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해 무대 위로 올라서자 아직 공연은 시작도 안 했는데 거의 전 객석의 방청객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건 저분들도 마찬가지겠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를 응원하는 슬로건을 든 팬분들을 보니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잘못한 건 없는데.’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다들 잔뜩 기대해서 높은 경쟁률의 추첨을 뚫고 이 추위에 오랜 시간 대기해 가며 우리를 보러 오셨을 텐데.
다 같이 기뻐하며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대상을 못 받은 것 때문에 침통한 분위기가 된 것 같아서.
아무리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한들, 마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까지 생각하던 내 눈에 들어온 건….
“…….”
멀찍이 있는 자신을 찍는 팬에게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영인이었다.
‘그렇지.’
어쨌거나 다들 우리를 계속 지켜보고 계시니까.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슬로건을 들고 있는 팬분들께 눈을 맞추며 검지만 펴서 양쪽 입꼬리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스마일. 입매로 호를 그리는 것처럼 만들어 보였다.
영인처럼 장난기 넘치는 익살스러운 표정은 어렵지만. 이런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하나둘 표정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며 나도 모르게 눈웃음을 짓자 가까이에 있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자 그 주위로 몇 명이 동참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꽤 큰 규모의 구호가 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큰 함성으로 전해지는 위로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해도 괜찮나? 의문이 든 순간 스태프가 나타나 객석을 저지했다.
“다른 관람객분들을 위해 공연 중에는 조용히 부탁드립니다!”
급물살을 탔던 분위기도 스태프의 통제에 곧 잠잠해졌다.
마음이 썩 가볍기만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를 이렇게나 든든히 지지해 주는 팬분들을 보니 큰 위로가 되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침내 다시 MC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등 뒤로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오늘의 엔딩 무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도 순서에 맞춰 중앙으로 나가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들어올 예정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다 불쑥, 오늘의 대상을 받아 간 선배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
무슨 마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저 멀리서 선배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전달하려는 듯 필사적인 표정으로 팔을 흔들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기도 당황스러운 일임을 어필하는 듯했다.
‘그야 뭐… 본인이 알겠어?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면 가수 본인보다는 회사 차원에서 중재한 일일 텐데.’
선배님이 뭘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기쁜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마음이 쓰였다.
‘실제로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동정하거나 할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뒷맛이 씁쓸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 보여 드리려고 나왔으니까.
나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객석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웃었다. 곧 숙소로 돌아가 멤버들과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을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
인수가 무대 위에서 씁쓸한 기분을 수습하고 있을 때 한바탕 난리가 난 장소가 또 있었으니.
“아니, 제정신이냐고. 이거 조작 아니야?”
거실에 즐겁게 야식판을 벌이고 평온하게 본인들이 지지하는 그룹의 첫 대상 수상을 지켜볼 예정이었던 모임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와 진짜 어이없네. 방금 커뮤에 점수를 얼마나 마이너를 줘야 순위가 뒤집히는지 계산한 거 올라왔거든여. 봤어요?”
인덕에 이어 인연과 XOXO, 그리고 XOXO가 부른 다른 친구까지 해서 네 명 모두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조작으로 난리가 나곤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순수하게 실력으로 살아남은 멤버들이다.
설마 데뷔하고 난 이후에 조작 논란의 피해자로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XOXO가 데려온 지인이 말한 대로 어느 사이트고 대상 수상 논란으로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 ̄ ̄ ̄ ̄
[제목] 시상 기준 확인하니까 더 어이 털리네 (+999)
[본문]
공식 홈페이지에 당당하게 걸어 둔 시상 기준 들고 옴
장난하냐ㅋㅋㅋㅋㅋㅋㅋ 작년까지 심사 위원 내부 기준 비율 40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올해부터 당당하게 50%로 올라가 있네.
여기에 음원/음반 합산 점수 25%, 사전 투표 25%면 대체 투표는 왜 한 거임?
열 받아서 항목별 세부 비교 들고 옴
[음원/음반 점수]
음원 점수
베리맨션(1위): 환산 점수 283,207점
임주희(2위): 환산 점수 268,923점
엔카운터(7위): 환산 점수 193,442점
음반 점수
임주희: 환산 점수 93,218점
엔카운터(1위): 환산 점수 732,005점
음원 점수에서 OST나 연간 차트 최상위 곡에 밀린 건 알겠는데.
음반이 너무 압도적이잖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위 자리수가 다른데요?
그러고 심사 위원은 누구인지 공개도 안 함? 욕먹기는 싫은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투표 유료 결제로 건당 100원씩 받아먹어 놓고서 팬 장사는 할 거지만 공정 심사는 묻어 두겠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할 줄 알았나?
(중략)
[댓글]
[- 중계 화면으로 보이는 현장 분위기 장난 아니길래 무슨 일 있나 했는데 이렇게 보니 대박이네ㄷㄷ]
[ㄴ 동영상 딴 화면 있어? 어느 정도였길래 다들 난리인지 궁금하네 ㅠㅠ 시간 놓쳐서 못 봤어]
[ㄴ (동영상) 링크 들어가서 직접 보면 됨ㅋㅋㅋㅋ 댓글 안 막힌 거 보니 곧 저작권자 신고로 재생 불가능 뜰 듯]
[- 차라리 베리맨션 줬으면 음원 1위라도 먹었으니 그러려니 이해라도 할 텐데 황당 그 자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베리맨션은 앨범 없이 OST로 나온 거라서 음반 점수 합산할 게 없어서 안 준 듯요]
[ㄴ 아 네ㅎㅎ;; 근데 정말 베리맨션 줬으면 해서 남긴 댓글은 아니었어요]
[- 받은 당사자인 임주희도 엄청 당황한 거 같던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동영상 링크)]
[ㄴ 아 저 필사적인 손동작 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ㄴ 아니… 하… 본인도 놀란 거 같아서 뭐라고 욕은 못 하겠는데 결과적으로 수혜자가 된 거니까 좋은 시선으로 보진 못하겠네]
[ㄴ 난 저것도 그냥 연기하는 거 같음 욕먹기 싫으니까 난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려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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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주희 진짜 본인이 받을 줄 몰랐을까 (+492)
[본문]
물론 시상식 측에서 가수들 참석하게 하려고 일부러 부를 때 후보에 오른 것만 알려 주고 상 주는지 안 주는지는 말 안 해 주는 거 알고 있음ㅇㅇ
임주희 본인도 자기가 받을 줄 몰랐다고 마이크 쥐고 버벅거리고.
엔카운터 멤들이랑 마주 보게 됐을 때 필사적으로 제스처 한 거나 등등.
태도만 보면 정말 몰랐던 사람 같은데 정말 본인도 모르게 이런 게 가능한 건지 궁금하네.
회사 차원에서 자기네 가수 상 달라고 압력 넣은 거면 가수 본인한테도 알려 주지 않나?
[댓글]
[- 솔직히 진짜 모르는 일이니까 마녀 사냥하고 싶지 않은데 진짜 모양 빠지는 수상 1위이긴 한 듯]
[ㄴ 받고도 쪽팔릴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대상 가수 타이틀이 갖고 싶을까….]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이건 돈 주고 투표한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행위다, 조작/사기로 신고해야 한다 아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