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되돌아갈 순 없지만 (2)
눈이 마주친 상대방이 순간 놀라 움찔 반걸음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놀라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정신은 꽉 붙잡고 있었는지 서둘러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사실 한번은 찾아가고 싶었어-]
[멀리서 네 그림자 바라보고파-]
그다음부터는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네겐 이미 끝난 사랑 나 혼자 남아서-]
[너를 아프게 할까 두려워 난 뒤돌아섰어-!]
나는 후렴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 마이크를 객석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따라 불러 달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제스처를 이해한 앞자리 관객들부터 비교적 음이 평탄한 후렴을 함께 열창했다.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나 욕심내지 않을게-!”
“우리 아주 잠깐만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앞자리 관객들이 무반주로 따라 부르자 곧이어 후열의 관객들도 천천히 합류하기 시작했다.
뒤에선 여전히 아수라장인 채로 장비들을 철수시키고 있고 완전히 뒤쪽으로 치우친 열의 관객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혼란스러운 가운데 수천 명의 목소리가 겹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너를 사랑해,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날.”
어느새 미소를 되찾은 지원이 활짝 웃으며 마이크를 입가에 대고 자기 파트를 불렀다.
[바보 같다고 욕해도 돼 시간만이 해결해 줄 거라는 그 말]
[한 번 더 믿어 볼게 너를 위해서-]
깔끔하면서도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다정한 음색에 다들 귀가 트이는 듯했다.
역시 실전에서는 믿을 만한 녀석이라니까. 그동안 지원은 연습에서는 나나 다른 멤버들에게 지적을 받을지언정,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시점에서 아쉬운 소리를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그러곤 곧바로 돌아온 내 파트를 맞아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 네가 없어도]
[아직 널 잊지 못한 난 계속 그 거리에 남아-.]
빈자리 하나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3층짜리 공연장. 뒤에서는 시끄럽게 스태프들이 신호를 맞추느라 소리를 내고 반주도 없이 관객들과 함께 노래하는 건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문득 숨이 벅찰 만큼 가슴이 뛰어서 마침내 곡이 끝났을 때 무대 위에 있던 모두 지금껏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다 같이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객석을 향해 감사 인사를 올리자 객석에서 이런저런 격려가 쏟아졌다.
“멋있다!”
“잘했어!”
“너무 잘했다!”
그러고는 우리가 어디로 내려가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대기하고 있으려니 객석에서 시작된 박수와 함성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갔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물론 방송 관계자분들도 괜찮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황급히 달려온 스태프들이 타 그룹 멤버들을 인솔해서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한 스크린이 객석과 무대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재빨리 마이크를 끄고 우리 쪽으로 다가온 스태프에게 물었다.
“저희 다음 무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곧장 이어질 엔카운터의 팀 무대가 신경 쓰였다.
다음 무대는 특수 효과라고 해 봐야 배경뿐이고, 나머지 연출은 조명이랑 백업 댄서가 전부이긴 했지만….
“리프트 철수 완료했고 바로 일반 대형으로 진행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곤 서둘러 조명이나 음향을 비롯하여 다른 장비들은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곤 나머지 멤버들을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괜찮아!?”
헐레벌떡 무대 위로 올라온 멤버들의 표정이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놀라긴 했지만 어디 다친 곳은 없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다행히 다치진 않았어. 떨어질 뻔했는데 지원이가 먼저 잡아 줘서.”
그러자 마냥 부끄러워하며 쑥스러워할 줄 알았던 녀석이 웬일인지 생색을 냈다.
“내가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어…!”
그 모습을 다 같이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동시에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스태프가 다급히 외쳤다.
“바로 스탠바이 부탁드립니다!”
“헉.”
그제야 다들 우리가 무사한 것에 안도하기도 잠시.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고는 정신을 차렸다.
“일단 무대 끝나고 얘기하자.”
공연이 끝나고 나면 엔딩 무대 때까지는 객석에서 훤히 보이는 방청석에 앉아 있어야 해서 진솔한 대화는 어렵겠지만.
무대 사이사이 대기 시간이 꽤 길어 멤버들끼리 간단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일단 단체 무대만큼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해야지.’
콜라보 무대를 사실상 망쳐 버린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더 붙들려 있을 수 없었다.
“카운트 시작하겠습니다. 쓰리, 투, 원! 스탠바이, 큐!”
정석적인 카운트와 함께 길게 드리워졌던 스크린이 다시 천장을 향해 말려 올라갔다.
설마 이번에도 사고가 터지는 건 아니겠지. 긴장하기도 잠시. 문제없이 말려 올라간 스크린 아래로 잔뜩 걱정 어린 표정의 팬분들이 보였다.
‘무대 연출도 연출이지만 일단 안심시켜 드리는 게 우선이니까.’
나는 괜찮다는 듯 내 이름이 적힌 슬로건을 재빨리 찾아냈다.
[서인수]
현란한 파스텔 색상에 스티커로 잔뜩 꾸며 놓은 슬로건이었다. 슬로건의 주인을 찾아 아이컨택을 하려던 그때.
‘응?’
슬로건 주인은 내가 아닌 도입부 파트를 맡은 영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거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아직 간주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부터 다른 곳이나 보고 있고 말야. 반쯤은 장난으로 삐친 척 입술을 삐죽 내밀자 순식간에 카메라가 우르르 튀어나왔다.
헉 깜짝이야. 원칙적으로 공연 중 촬영은 금지되어 있지만 단독 콘서트장도 아니고, 웬만큼 전문적인 장비로 대놓고 찍는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용인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멋쩍게 웃으며 도입부 시작에 맞춰 다시 진지하게 표정을 잡고 포즈를 취하자 곧 간주가 끝나고 테이프가 지이익 늘어지는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조금 전의 무대 사고로 인해 이번도 사고가 난 게 아닌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이번은 연출이었다.
배경의 스크린을 통해 미리 편집해 둔 뮤직비디오의 이미지가 어지럽게 흩어지며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들 입고 있었던 재킷과 코트를 벗어 던졌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업 댄서분들이 재빨리 우리가 던진 의상을 주워 무대 아래로 내려보내고 자세를 잡았다.
팟, 다시 모든 조명이 켜졌을 때는 다들 한결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오늘은 안 된다는 말 장난스럽게 하고 돌아서던 너]
얇은 반팔 옷과 대조되는 커다란 귀마개와 목도리 그리고 장갑을 낀 영인이 무대 중앙에서 백업 댄서들 사이로 산뜻한 표정으로 튀어나오자 무대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장난이란 걸 알아 하지만 우리 같은 맘일까 난 불안하단 걸]
이번 무대의 컨셉은 원곡보다 발랄하고 귀엽게, 그리고 한층 강조된 댄스 브레이크였다.
원곡이 적당히 흥겹게 들을 수 있는 가벼운 팝 발라드였다면 아예 댄스곡으로 편곡을 맞췄다.
[가끔은 나를 생각해 줘 내 머릿속은 항상 너로 가득하지만]
곧이어 파트를 이어받은 하연이 상큼한 비주얼과 함께 앙증맞도록 수정한 안무를 선보이자 분명 공식적으로 촬영은 금지일 텐데 셔터음이 요란하게도 울려 퍼졌다.
[그래도 조금은 토라질 때가 있어 나를 좀 더 아껴 주길 바라]
곡의 전반적인 컨셉은 귀엽고 어린 남자 친구의 투정이었다, 곡의 청자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을의 연애를 하고 있지만 내가 너무 지치지 않도록 가끔은 아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baby honey darling 여러 달콤한 호칭들은 바라지 않아]
한결 빨라진 박자감에 다들 헷갈릴 법도 한데 시간을 얼마 들이지 못했어도 정신 단단히 차리고 연습한 덕에 헷갈리는 멤버는 없었다.
소품인 커다란 장갑과 목도리를 활용하여 귀여운 안무를 소화하고 단체로 모여 중앙에서 점프.
그 후 이어질 댄스 브레이크를 앞두고 고음으로 올라가는 브릿지 파트. 내가 전면으로 나설 타이밍이었다.
[그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알고 있겠지만]
[너만 바라보는 나를 잊지 말아 줘-!]
가벼운 동작과 함께 뒤로 빠지며 본격적인 댄스 파트가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컨페티를 맞으며 양옆으로 늘어선 백업 댄서와 함께 이루는 군무는 이번 무대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준비하면서 진짜 힘들었지.’
직전에 음정을 고음까지 쭉 끌어올리면서 애드리브로 이어져서 숨이 좀 벅찬 상황에 다급히 대형을 맞추고 댄스 브레이크라 뛰는 동작이나 스텝을 복잡하게 밟는 게 많아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주혜성! 정은찬! 이규민! 서인수! 박하연! 제현호! 표영인! 유지원! 엔! 카! 운! 터!”
멤버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응원 구호를 단 한 번만 외쳐도 순식간에 댄스 브레이크 구간이 끝나 버려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흘끔 상태를 확인한 지원도 무사히 큰 실수 없이 동작을 마친 듯했고.
‘이제 거의 다 끝났다.’
남은 건 다시 후렴으로 돌아가서 밝은 분위기로 무대 아래의 통로를 쭉 걸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안 된다는 말 장난스럽게 하고 돌아서던 너]
[네 장난에 난 또 놀라고 기뻐하는걸]
하나 둘 셋 넷. 정해진 박자에 맞춰 계단을 따라 삼삼오오 흩어지자 천장에서 한 번 더 반짝이는 종이 꽃가루가 터져 나왔다.
멤버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기 무섭게 인이어를 뚫고 엄청난 비명 소리가 새어들어 왔다.
‘이거 라이브가 거의 안 될 수준인데?’
이 정도면 음향에 환호성도 다 섞여 들어가는 거 아닌가. 놀라기도 잠시 나를 향해 여기저기서 뻗어 오는 손에 하이파이브를 쳐 주느라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장난이란 걸 알아 하지만 우리 같은 맘일까 난 불안하단 걸]
[내게 확신을 줘 난 너를 사랑해-!]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 나를 바라보는 팬들 사이에 섞여 내 파트도 아닌 후렴을 따라 부르고 있으니 조금 전의 불안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몸을 데워 주는 강렬한 조명 밖으로 나오면서 살이 떨리도록 추워진 것도, 말썽을 부렸던 리프트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내게 확신을 줘 난 너를 사랑해-!]
마지막으로 다 함께 외치며 다시 무대로 돌아와 엔딩 포즈를 하자 그제야 모든 긴장이 풀리며 표정도 같이 안도로 물들었다.
‘이제 한고비 넘겼고.’
그러나 아직 완전히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클로징 멘트 해야지.’
나는 재빨리 성공적인 무대에 감격에 찬 멤버들의 주의를 끌어 스태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직 1부 클로징 멘트 인터뷰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