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그 안의 진실을 보면 (3)
[Second place][공민형]
단순히 게스트로 참여하는 것이 아닌, 연말 무대를 통해 데뷔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신인한테는 너무 모험이지 않은가.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으나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을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데뷔 자체에 대한 축하를 해 주는 게 먼저겠지.’
소속사는 어디인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차차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 생애, 비록 망하기는 했지만 데뷔했던 그 순간만큼은 기뻤고 모두가 응원해 주기를 바랐으니까.
공민형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도 알아서 어련히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거기에 가타부타 제정신이냐고 부정적인 토를 다는 것보다는 어차피 이미 질러 버린 거 좋은 얘기만 듣고 싶겠지.
‘내가 막 굳이 직언할 만큼 걔 인생을 책임져 주고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위태로워 보여도 기적적으로 잘해 나갈 수도 있는 거고. 나는 잠시 큐 시트를 노려보다가 영인에게 다가갔다.
“잠깐 시간 되면….”
공민형한테 인사나 좀 다녀오자고 하려 했는데. 타이밍 좋게 스태프분이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엔카운터 서인수 님 유지원 님 리허설 진행하겠습니다. 메인 스테이지로 이동해 주세요!”
“앗.”
리허설을 늦추면서까지 급히 만나 봐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영인과의 대화를 머쓱하게 마무리 지었다.
“이따 얘기하자. 나 리허설 다녀와서.”
“엥? 뭔데요?”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지금 갈게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영인을 뒤로하고 잔뜩 긴장한 지원과 향한 곳은 특설 무대 위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와 지원이 합류하자 나머지 인원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아, 타이밍 좋게 딱 오셨네요. 저희도 지금 막 와서 가볍게 목 풀고 있었어요.”
“아침이라서 그런지 저도 목이 좀 잠겨 가지고. 리허설이니까 다들 살살 하시죠.”
멤버도 아닌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간결했다.
‘우리가 콜라보 무대 첫 타자니까 무조건 실수 없이 잘해야 해.’
나와 지원이 참가하는 콜라보 무대가 이번 연말 시즌 첫 번째 무대였던 것이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리허설은 ‘열심히’ 하지 말자고 지금 눈치 주는 것 같다만. 어째 의도를 정반대로 알아들은 듯한 지원이 해맑게 웃었다.
상대방도 웃는 얼굴에 차마 침을 뱉을 수는 없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무대 자체는 그렇게 어렵진 않으니 괜찮겠지.’
나와 지원이 제안받은 콜라보 무대는 멤버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듯 보컬 중심의 무대였다.
안무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동선도 처음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위치 그대로 고정. 계단을 따라 무대 앞으로 내려와서 노래만 부르고 퇴장하는 아주 간결한 구성이었다.
‘이게 장단점이 있는데….’
우선 장점은 복잡하게 안무 외울 필요도 없고 동선 때문에 머리 아프게 기억력에 힘을 줘야 할 이유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 그야말로 꿀 빠는 무대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편하게 해 주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지.’
달리 말하자면 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비주얼과 보컬 실력밖에 없었다.
퍼포먼스가 좀 포함되어 있는 무대면 어떻게 화려한 동작으로 시선이라도 끌고 분산시켜 볼 텐데.
구성이 이렇게 간단한 무대는 실력과 비주얼만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나야 둘 다 자신 있긴 한데.’
지원도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몇 주 전부터 철저하게 목도 관리해 온 덕에 우리는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무대 도중에 삑사리를 낼 만큼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니니 괜찮겠지.’
우리와 함께 무대를 서야 할 사람들이 문제였다. 무대에 오르는 인원은 총 다섯. 그중 둘은 같은 그룹 출신이었다.
아이돌로서의 역량은 평범한 수준이었으나 소속사 자체가 원래 발라드 가수들을 대거 배출한 중형 규모의 회사라서 보컬 실력만큼은 꽤 탄탄했다.
나머지 한 명도 1.5군 정도의 유명 그룹의 메인 보컬이어서 멤버 그 자체는 인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실력은 보증된 사람이었다.
‘여기서 제일 큰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 건 우리 팬분들이겠네.’
아무래도 엔카운터의 네임 밸류가 제일 탄탄하기도 하고 대중성은 물론 팬덤 규모로도 뒤지지 않는 그룹인 탓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역시 서바이벌 출신이라서 호응이 좋네요, 같은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 들어 봤자 기분만 나빠질 뿐이니까.
의식하려고 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그룹 내에서 연습을 할 때보다 성대에 힘이 들어갔다.
‘인수 씨야 워낙 잘하시는 거 다들 아니까 걱정 없을 것 같은데…. 지원 씨는 목 관리 어떻게 하세요?’
콜라보 멤버 중 연차가 제일 긴 선배님이 연습 첫날에 대뜸 한 말이었다.
대놓고 네가 불안하다고 돌직구를 꽂는 건 아니었지만 은근히 지원을 빈틈 취급하는 바람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 막내가 뭐가 모자라서. 평소에 좀 허술하긴 해도 음색만큼은 어디 가서 뒤지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이런 무대에서 조금 삐걱거려도 지원이는 다들 귀엽게 봐 주시겠지, 정도의 허술한 마음가짐이 빼꼼 고개를 들었던 것이 정신이 확 차려졌다.
‘무조건 잘해야 해! 우리 데뷔 무대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지원을 졸졸 따라다니며 연습시킨 결과 지금 우리는 원곡자보다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원곡자 선배님들께는 죄송하지만….’
특별히 마찰이 있었거나 악감정이 폭발하고 그런 건 아니라도 이 팀원들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자, 다 모이셨으면 리프트 이동 동선부터 확인하러 가실게요!”
“넵!”
그동안 연습실에서 이동하고 타이밍 재는 것만 맞춰 봤지 이렇게 실제로 이동식 무대에 올라와 보는 건 처음인데.
제 자리에서 서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원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어 휘청거리면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이거 좀 불안한 거 아닌가?’
얼마 안 있어 제대로 바닥을 딛고 서서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문득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계속 빤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시선을 느꼈는지 지원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따봉을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따봉은 뭐가 따봉이야.’
주위에서 아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귀여워해 주시는 거니까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이따 본방 들어갔을 때도 실수하면 그땐 혼난다.’
지원을 향해 영혼 없는 눈으로 웃어 주자 지원이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바짝 기합이 들어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이제 MR 재생하겠습니다! 큐!”
슬레이트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더는 농담 따 먹기 할 여유도 없이 다들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난 또 매일 같은 꿈을 꿔 어쩌면 네가 다시 돌아올까 봐-.]
도입부는 우리가 아닌 다른 그룹 출신의 팀원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자.’
나는 흠흠 속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차례가 올 때까지 정신을 집중시켰다.
***
잠시 후. 무대 이동 장치의 이상으로 예상보다 길어진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우리는 비축해 둔 에너지의 절반 가까이는 쏟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눈치가 보이니 원….’
별 대단한 연출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자꾸 리프트가 말썽을 부려서 중단과 재개가 반복되니 슬슬 다음 일정이 걱정되는지 스태프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연히 무대 위에서 서서 기다려야 하는 우리도 지치고 스태프들도 힘들고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인내심이 떨어져 갈 즈음 다행히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린 거야?”
겨우 리허설을 마치고 팀 대기실로 돌아가자 다들 걱정 반 호기심 반의 눈빛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테크니컬 이슈 때문에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쌩으로 시간 날렸지 뭐.”
리허설 중에는 조명을 풀로 켜지 않아서 조명 열로 버틸 수도 없고 꽁꽁 싸매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다들 가볍게 본의상에 가까운 차림으로 무대 위에 서 있었으나 점차 조끼 패딩에, 일반 롱패딩까지 챙겨 입더니 나중에는 장갑에 목도리까지 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설마 메인 무대에서도 또 말썽을 부리진 않겠지.’
간절히 기원하며 큐 시트를 다시 확인한 나는 벌써 공민형이 리허설을 위해 이동했을 시간인 것을 보고 옅은 탄식을 삼켰다.
오늘 생방송 촬영에 사용되는 무대는 총 세 개. 그중 인원수가 많거나 장비를 많이 사용하는 무대는 메인 스테이지를 활용하고, 인원수가 적거나 비교적 단출한 연출이 사용되는 무대는 서브 스테이지들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메인 스테이지에서만, 공민형은 서브 스테이지 A에서 촬영 예정이었다.
‘공민형이 대기실로 돌아오면 그때는 우리가 단체 무대 리허설로 자리를 비우겠는데?’
대기 시간이 그렇게 긴데 이렇게 엇갈릴 수가 있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안 되는 일은 미련을 버리고 얌전히 스토브 앞에 앉았다.
“아 뭐야.”
내 뒤에 앉아 있던 규민이 불평했지만 나는 장갑과 목도리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꿋꿋하게 온기를 쬈다.
“이러고 더 있다가는 콧물 나올 것 같아서 그런다, 왜. 지원아 너도 이쪽으로 와서 몸 좀 녹여.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지원도 끌어당겨서 옆에 앉히자 밀려난 규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너도 진짜 많이 변했다. 전에는 진짜 선 긋는 깍쟁이 같았는데.”
또 무슨 헛소리야. 나는 한 귀로 흘려들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본격적인 이벤트가 시작된 건 오후부터였다. 오랜 시간 동안 대기하는 건 현장에서 방청을 신청한 팬분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시간을 죽이기 위한 이벤트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 방청에 참가해 준 팬클럽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우리 팬분들이었기에, 우리도 마냥 대기실에 박혀 시간만 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추운 날에 여기까지 보러 와 주셨는데 하루 종일 기다린 기억만 남겨 드릴 수는 없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꽁꽁 굳어 버린 팔다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 핫팩을 하나씩 챙겨 주었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다들 몸조리 잘하시고요. 귀중품은 두고 가지 마시고 다 챙기셨으면 이동할게요!”
매니저의 당부에 다들 핸드폰이며 지갑이나 주렁주렁 챙겨서 패딩 주머니 안에 꽂고 이동하는 꼴이 꼭 펭귄들 같았다.
“저쪽으로 나가면 돼요. 바로 간이 무대 준비되어 있으니까 단상으로 올라가셔서….”
그리고 하나둘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그때. 영인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