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버거운 듯해도 (2)
우선 요즘 트랜드는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작년 무대들을 확인했다.
물론 매년 바뀌는 유행이니 그리 대단한 참고가 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이즈음에 가장 좋은 반응을 받았던 무대가 무엇인지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조회 수가 높은 영상을 확인한 나는 죽은 눈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때는 이게 괜찮았던 때구나.’
20년도 이후에 나오면 죽도록 욕먹었을 컨셉이었다. 선배 걸 그룹의 무대를 코믹하게 연출한 커버 무대였다.
이 시기에는 나름 유머틱하고 귀엽다고 유행했던 모양이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팬들의 반응도 대중의 선호도 바뀐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장의 흥행을 생각한다면 이런 컨셉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는 오래 활동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다른 녀석들에게도 오래도록 따라붙을 꼬리표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이런 컨셉은 패스. 섭외가 팀에서 몇 명, 혹은 누구랑 누구 이렇게 지목으로 올지 아직은 모르는 상황이니 어떻게 될진 알 수 없다만.
다른 멤버에게 섭외가 들어온다면 원곡의 팬들이 불쾌해하지 않겠냐 말은 해 줘 봐야지.
어깨를 으쓱이며 영상을 계속 찾아보고 있으려니 매니저가 새 소식을 물고 왔다.
“우선 K사 대중 가요 축제부터 콜라보 무대 섭외가 왔는데요. 아직 다른 행사들 섭외가 안 들어와서 한번 다음 주 초까지는 더 기다려 보고 답변드려도 될 것 같아요.”
“오… 저희도 콜라보 무대 하는 건가요?”
“일단 M사에서 매년 해 오는 K팝 메들리는 확실하게 참여 예정이니까 확정된 건 그것뿐이라고 생각해 두시면 될 듯합니다.”
M사에서 매년 해 오는 K팝 메들리란, 그해에 M사 선정 월별 히트곡을 부른 가수들을 초청해서 합동 무대 형식으로 편집해 선보이는 공연이었다.
실제로 한 곡당 할당되는 시간은 20초에서 30초 내외던가. 나는 선정된 곡이 싱글인지 아니면 앨범 타이틀인지 궁금해서 곧바로 물었다.
“저희가 몇 월인지는 아직 모르나요?”
그러자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8월이랑 10월 둘 다요!”
“오…?”
둘 다 그달의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히트를 쳤으니 어느 곡이 선정되어도 이상할 건 없다 싶긴 했는데.
어느 하나만 선정된 게 아니라 둘 다라는 사실에 나도 귀가 번쩍 트였다.
“둘 다요? 하나만 된 게 아니고요?”
다른 멤버들도 깜짝 놀라 묻자 매니저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저희가 메들리 시작한 이래로 처음이래요!”
“우와!”
“대박이다.”
대충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래도 프로젝트성 그룹이니까.
내년이면 사라질 그룹이니만큼 올해 화제성을 몰아줘서 사업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겠지.
만약 우리가 흥행 성적이 떨어진다면 밀어주기 너무 속 보인다느니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겠지만….
‘이 정도면 솔직히 실력으로 따낸 게 맞지.’
그도 그럴 것이 코코 차트 월간 스트리밍 순위를 보면 8월과 10월 모두 우리가 1위를 차지했으니까.
여기서 이례적인 부분은 지금까지는 월간 차트에서 같은 해에 여러 번 1위를 차지한 가수가 있어도 다양한 가수를 초대하기 위함인지 조금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가수를 세우곤 했는데, 우리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근데 뭐… 그건 상황이 좀 다르긴 한가.’
이전에 솔로 여자 가수가 6월과 7월을 연달아 1위를 차지했던 적이 있었을 때. 그때 7월을 다른 걸 그룹을 세웠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
비슷하게 드라마 OST가 히트를 쳐서 3개월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거는 한 곡으로 몇 달을 찍은 거니까 아무래도 케이스가 다르다고 봐야 하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규민이 툭툭 신발 끝으로 내 발을 쳤다.
“……?”
뭐 하냐는 표정으로 규민을 바라보자 규민이 씩 웃었다.
“너 또 이상한 경우의 수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욕 덜 먹을까 걱정하고 있었지.”
나는 곧장 발뺌했다.
“아니거든.”
“뭘 아니야. 표정이 딱 우중충해 보이는데.”
내가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규민이 제멋대로 어깨동무를 걸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우리는 모든 상황에 있어서 예외니까 뭘 해도 말은 나와. 내가 뭘 해도 싫어할 사람들한테.”
“매몰되지 말라고?”
내가 등 뒤로 둘러진 팔에서 벗어나며 말꼬리를 채가자 규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정답. 그냥 와 두 곡 선다 좋다, 거기까지만 생각하자고.”
“그러려고 했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몹시 의외였던 규민의 조언 뒤에 이어진 건 앞으로의 연습 일정에 대한 공지 사항이었다.
이제 다음 주면 싱글 활동은 끝나고, 각 행사별 ‘그룹’ 연말 무대는 또 별개의 일이라서 각각 행사별로 어떤 곡을 부를지 정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행사가 엄청 많네.”
은찬이 조용히 감탄한 대로, 많이도 너무 많았다. 물론 우리가 그걸 불평할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각 무대별로 약간의 제스처나 의상 정도만 변화를 주면 되는 음방 무대와 달리 연말 무대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연말’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무대마다 특색을 줘야 이거저거 볼 게 많아도 너무 많은 팬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솔직히 연말에 할 게 좀 많냐. 나 같아도 레전드로 유명한 무대만 찾아보지 다 챙겨 보진 않지.’
술자리에 회식에 친구들 모임에 가족들이랑도 보내야 할 거고.
그 많은 연말의 고자극 컨텐츠들과 경쟁하여 흥행에 성공하려면 보통 컨셉과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일단 하나는 정장 컨셉으로 하고, 크리스마스 느낌 나는 것도 좋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정리하고 있으려니 아무리 나라도 모든 걸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기는 힘들어서 나는 곧바로 사무실 한쪽에 있는 메모장을 뜯어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오, 서인수 신내림 받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정장? 괜찮은데요? 클래식 이즈 베스트잖아요.”
옆에서 한마디씩 거드는 말을 일단은 한 귀로 흘리고 리스트를 작성하고 나니 얼추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러면 지금 아예 각 멤버분들별로 하고 싶은 컨셉 있으면 한번 쭉 적어서 검토해 볼까요?”
무대가 한두 개가 아니니 전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로만 채울 수는 없었다.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가 메모장이 아닌 아예 이면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일단 각자 작성해 주시고 한 30분 후쯤에 다시 논의해 볼까요?”
“넵!”
“네!”
***
그리고 잠시 후. 길었던 미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모두 파김치가 된 채로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죽겠다~.”
“규민아 미안한데 죽지 말고 먼저 씻어 줄 수 있을까? 나 오늘은 좀 일찍 씻었으면 해서.”
“아, 넵.”
평소라면 인내심 있게 차례를 기다렸을 혜성도 오늘 욕실 쓰는 앞 순서인 규민을 재촉해 가며 빨리 들어가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할 만큼 지친 모양이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좀 칼칼한 것 같은데….”
평소 이런 회의 자리에서 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역할인 지원도 오늘은 모처럼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픈 듯했다.
“약 줄 테니까 먹고 자. 미리 먹어야 초장에 잡지.”
“응…!”
덕분에 지원이 생각하는 좋은 무대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어서 좋긴 했다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컨셉 하나씩은 사수하기로 결정되어서 힘이 쭉 빠지긴 했어도 의욕은 더욱 커졌다.
‘다른 녀석들도 각자 자기가 하자고 밀어붙인 컨셉이니 약한 소리 못하고 더 열심히 할 테고.’
각자 제안한 컨셉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하연과 은찬 콤비의 컨셉이었다.
‘곡 전체를 힙합 버전으로 편곡해 보고 싶은데.’
기본적으로 엔카운터의 곡들이 대체로 가장 최근의 싱글을 제외하면 팝과 힙합을 대중적으로 믹스해 놓은 느낌이었다.
강렬한 비트를 중심으로 베이스를 깔고 그 위에 멤버들의 탄탄한 보컬로 멜로디를 얹은 다음 랩 파트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 식이었다.
어쨌든 랩 담당 멤버보다 보컬 담당 멤버가 더 많고, 팝 장르로서 보컬 파트 비중이 더 큰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지점이 지금껏 작업하면서 좀 아쉬움으로 남았던 듯했다.
‘그럼 가사도 바꾸는 건가요?’
제현호가 그건 조금 곤란하지 않으냐는 듯 묻자 은찬이 딱 잘라 대답했다.
‘가사는 바뀌지 않겠지만 멜로디가 줄어들어서 톤은 바뀔 거야. 바뀌는 파트가 있으면 말해 줄 거고 싫은 사람은 미리 얘기해.’
그 정도는 괜찮다는 듯 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뭔데?’
내가 왜 나를 보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영인이 놀리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형이 우리 보스니까요?’
‘내가?’
금시초문이었다. 나를 수상 소감 대신 발표하게 하는 셔틀이자 조별 과제 조장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나.
‘리더니까?’
‘내가 반대할 이유가 있나.’
‘오오.’
내가 제안한 컨셉부터가 랩 라인에게는 그리 내키지 않을 컨셉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고 나도 랩이 아주 자신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고 슬쩍 은찬의 표정을 확인하니 확연히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주 미묘한 차이긴 했지만.
‘근데 왜 네가 더 좋아하냐.’
그 옆에 있는 하연이 더 기대에 찬 얼굴이어서 웃겼을 뿐이었다.
그 외에 결정된 컨셉은 규민은 아까 말했던 대로 정장을 고수했고, 제현호는 기존 컨셉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스포츠 컨셉이되 특이한 지점이 있었다.
‘세트장에 차량이 있으면 안 되나요?’
‘차량?’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와 하연만 찍었던 화보에서 차량을 배경으로 한 컨셉이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라이브 무대에서는 어렵고 사전 녹화 후 방송만 당일에 내보내는 형식이면 가능할 수는 있어요.’
이전에 C 브랜드와 작업하면서 차량 대여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의 연락처는 이미 받아 둔 상태였다.
물론 그 대여비가 예산이 엄청나긴 했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수입을 생각하면 이 정도 지원은 해 줄 만하지 않나 싶은 금액이었다.
‘차를 좋아하나?’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회의가 거의 끝나 갈 즈음 현호에게 물어보았다.
‘너 면허 없지?’
이러다가 정산 입금받으면 바로 차부터 뽑는 거 아닌가.
이런 분야에서 사고 칠 녀석이 아닌 건 알지만 혹시나 해서 묻자 생각도 못 한 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