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돌아올 시간 (3)
“가족들 건강이요.”
“갑자기 웬 효도?”
“아뇨아뇨, 호주에 있는 가족 말고 주변인들도 가족으로 치는 거라고 해서요.”
“우리?”
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어차피 성공과 부는 우리들이 열심히 해서 얻어야 하는 거니까 의미가 없고. 건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잖아요.”
나는 더 말해 보라는 듯 영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미신으로 기원하는 거라면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거 말고, 노력해도 안 되는 걸 비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오….”
영인의 논리에 설득당한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원이 슬쩍 무리의 뒤로 빠지려는 것을 재빨리 붙잡았다.
“하나로 충분하니까 두 개 안 사도 돼. 두 개 산다고 부적이 두 배 강력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원이 정곡을 찔린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내가 살까 말까 망설인 거 어떻게 알았어?”
망설인 게 아니고 거의 사려고 하지 않았나. 보니까 걸음이 아주 그쪽으로 향해 있더만.
“딱 보면 알지.”
속일 줄 모르는 게 이럴 때는 장점이라고 해야 하나. 지원이 계속 신경 쓰이는지 노점 쪽을 흘끔거리던 찰나. 규민이 크로스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좀 들고 있어 봐.”
그러고는 안에서 길 가면서 받은 듯한 광고용 메모지를 하나 꺼내서 슥슥 글씨를 갈겨썼다.
[건강]
그다음 글씨를 적은 메모장을 찢어 반으로 두 번 접었다.
“빨리 감사합니다, 해.”
“……?”
쪽지를 냅다 건네받은 지원은 물론 다른 멤버들도 지금 뭐라는 건가 눈을 의심하자 규민이 당당하게 재촉했다.
“빨리!”
“감사합니다…?”
지원이 얼결에 감사 인사를 하자 규민이 지원에 손에 쪽지를 쥐여 주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게 했다.
“잘했어. 그다음엔 나 저거 사 줘.”
규민이 가리킨 저거는 길가에서 파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이었다.
“…네?”
“얼른!”
얼결에 지원은 규민의 손에 끌려가 200엔을 대신 내주고 말았다. 규민이 한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베어 물었다.
“아 맛있다. 이걸로 복채 받았으니까 영험한 부적 써 준 거라고 생각해.”
“?????”
“200엔이면 솔직히 자원 봉사다 자원 봉사.”
영인이 산 부적이 500엔짜리였으니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인 건 맞지만? 저쪽은 최소한 본인이 골랐고 너는 강매잖아.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그 당당함에 다들 얼렁뚱땅 휘말리고 말았다.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돼. 잘되면 부적을 잘 산 네 덕이고, 안되면 내가 돌팔이 부적 써 줘서 그런 거니까 편하게 생각하라고.”
“응…!”
꼴에 영인과 마찬가지로 이유는 또 청산유수여서 마냥 밉지가 않았다.
각자 저마다 기념품을 하나씩 사서 호텔로 돌아오니 드디어 모든 스케줄이 끝이 났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해야 할 일이 잔뜩이긴 하지만 그건 또 재충전을 하고 나서의 일이고.
저마다 뿌듯함을 하나씩 안고 오른 귀국길은….
“서인수!!!!”
“규민아!!!”
“박하연~!”
출국길보다 더한 아수라장이었다. 이번엔 미리 시큐리티분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도 몰린 인파가 너무 많아서 현장은 도저히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발 조심해 주세요!”
“다치지 않게 조심 부탁드립니다!”
결국 이번에도 우리가 팬분들을 향해 양해의 말씀을 잔뜩 드리고 나서야 인파를 뚫고 대기 중인 픽업 차량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 차는 대체 언제 바뀌는 거지.’
우리 지금까지 꽤 벌었을 텐데. 일단 이번 달부터 나는 본격적인 정산을 받기 시작했다.
애초에 공제할 트레이닝비, 선투자금이 없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나뿐만 아니라 지원이처럼 기존 투자금이 얼마 안 됐던 멤버들은 조금씩이라도 정산금을 받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받았다는 건 회사도 벌써부터 흑자가 났다는 건데 차 좀 어떻게 안 되나.’
곧 있으면 덜덜거리며 떨어질 것 같은 범퍼를 죽은 눈으로 바라보자 매니저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바꾸자고 건의는 올렸는데… 그게… 아직 결재가 안 나서요…. 한 번 더 얘기해 볼게요.”
우리만 찝찝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지켜보는 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 엔카운터 이동 차량 왜 저러냐 연식 10년 넘은 듯]
[- 애들 생각보다 돈 못 버나? CF나 활동, 앨범 스코어 보면 현세대 0군 아닌가 무슨 누더기 차를 끌고 다니네]
[- (사진) 얘들아 충격적인 거 봐 봐. 저거 데뷔 직후에는 뒤에 범퍼 청테이프로 붙이고 다녔다ㅠ 지금 저게 수리 한 번 한 거임]
[ㄴ 도로에서 보면 무조건 피해 가게 생겼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안에서 누가 나올지 예상이 안 돼서 ㅈㄴ 무서운데 연예인 이동 차량이라니ㅋㅋㅋㅋㅋㅋㅋ]
요약하자면 대체로 돈 많이 벌었을 텐데 대체 뭐에다 쓰냐는 내용이었다.
‘그러게요.’
흐린 눈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앞으로의 일정을 공유받기 위해 사무실로 향한 우리는 회사가 돈을 벌어서 어디에 썼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우선 밋밋 그 자체였던 사무실 전경이 훨씬 깔끔해졌다. 전에는 투박하기 그지없어서 무슨 비하인드 촬영에라도 내보내려 하면 이게 무슨 30년 된 학교 교무실인지 연예 기획사 사무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나름대로 디스플레이도 신경 쓰고 응접실이나 회의실도 따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정돈되어서 봐 줄 만한 공간이 되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한 일이긴 한데….’
전에 사무실도 일하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대외적인 영업을 하는 직종인 이상 어느 정도는 신경 쓸 필요가 있는 부분이었다.
“이야, 진짜 깔끔해졌네.”
사무실 입주 직후 아무렇게 널려 있었던 코드나 기물들도 깔끔하게 창고 안으로 수납. 훤칠해진 풍경에 영인이 해맑게 비수를 꽂았다.
“근데 저희 차는 언제 바꿔요?”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 주던 대표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삐질 진땀이 솟아올랐다.
“그것도 물론 알아보고 있지요. 아마 조만간 새로 바뀔 겁니다.”
“오오….”
“조만간이면 언제요? 저희 지금 차 너무 구리다고 계속 벌룬에도 메시지 오는데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미 했으면서…. 나는 영인이 벌룬 메시지로 했던 발언이 화제가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 ̄ ̄ ̄ ̄
[Young] 괜찮아요 아직 사고는 안 났어요
[Young]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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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사진을 패러디해서 올려서는 커뮤니티는 물론 SNS까지 구석구석 퍼졌다.
청테이프로 급하게 두른 자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찍어 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규민이었다.
그 후 매니저가 서둘러 범퍼 부분만 수리하고 온 게 지난달이었다.
“아마 이번 달 안으로… 그보다 해외 일정은 좀 할 만한가요? 아무래도 쉴 수 있는 날이 너무 적다 보니….”
“이번 달 안이면 2주 안에 되는 건가요? 이번 달 이제 2주밖에 안 남았는데.”
“그거는 언제라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저 너무 신나서 얼른 벌룬에 자랑하고 싶어서요. 계획 정도는 있다고 벌룬에 자랑해도 되죠!?”
필사적으로 확답을 회피하는 대표와 웃으면서 해맑은 얼굴로 정곡을 찌르는 영인의 대결은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
“윤 실장!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요. 우리 전에 봐 둔 거 보여 줘 봐. 주말에 가서 계약하고 오면 될 것 같으니까.”
결국 차종은 뭔지. 연식은 얼마나 됐는지 한참을 뜯어보고 나서야 대표와 윤 실장은 해방될 수 있었다.
‘이것도 뭐…. 중고차네.’
물론 차 자체는 아직 뽑은 지 3년이 안 된 비교적 최신형 차량이었다. 10년 이상 묵은 고물차에 비하면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당장 타고 다닐 차가 필요한 건데 신차만 고집하다가는 언제 출고가 될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테니까.
아쉽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고. 미리 알고 있었던 일정 외에 급히 끼어든 스케줄이 있어서 그쪽에 우선 집중해야 했다.
“잘하고 와~ 올 때 재킷 하나만 좀 달라고 해 봐.”
“헛소리하지.”
“…….”
“잘해.”
규민을 비롯해 다른 멤버들의 응원을 받으며 출발한 현장은 슈퍼카들이 즐비한 촬영용 스튜디오였다.
“와….”
겉은 평범한 창고처럼 생겨서 별 기대 없이 안으로 들어선 나와 하연은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신세계에 놀라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늘 여기서 촬영 진행하실 거고요. 안쪽에 따로 탈의실 준비되어 있으니 저쪽에서 의상 받아서 착용해 주시면 되세요. 나오시면 저희가 의상 정리하고 액세서리 같이 매치해 드릴 거예요.”
평소 8명이 우르르 몰려가서 무슨 학교에서 체육복 갈아입는 것처럼 허겁지겁 환복했던 것과 달리 여유가 넘쳤다.
“아, 네 감사합니다.”
스태프분들의 안내를 받아 각각 지정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입어야 할 의상들이 하나하나 순서대로 입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
그동안의 환경과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이 감격스러웠다.
“다 입고 나오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이렇게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지. 퍼뜩 긴장감을 되찾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첫 번째 차량이 세트장 위에 멋들어지게 안착해 있었다.
“와….”
뮤직비디오 촬영 때도 비슷한 세트장을 연출한 적 있었으나 그때와는 자본의 규모가 달랐다.
‘그때는 사실상 스포츠카처럼 생긴 아무 깡통 차나 가져와서 보닛 여는 것만 찍었는데.’
이번에는 당당하게 빛나고 있는 엠블럼을 보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거 한번 잘못 긁으면 큰일이겠네요.”
하연도 크게 다르지 않은지 무심코 내뱉고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어쩌면 제 몸값보다 비쌀 수도….”
엔카운터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시점이었는데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 그러면 하연 씨는 이쪽으로 해서 엉덩이 대고, 발은 이쪽에 이렇게 두고 자세 잡아 주시고요, 인수 씨는 아, 그렇지, 그렇지. 그쪽에 그렇게….”
더 이상 카메라 앞에서 쭈뼛거리는 쌩신인들도 아니다 보니 촬영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저희 디렉터님이 자기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어찌나 난리시던지. 파리 본사에서 말리느라 진짜 아수라장이었대요.”
브랜드 관계자분이 해 주신 말씀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촬영이 끝나 갈 때쯤 디렉터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내가 꼭 가야 했는데) 미안해요. 그래도 소품부터 컨셉까지 하나하나 직접 준비한 거니까….>
브랜드 관계자분이 열심히 통역을 해 주시는데 말이 빨라서 절반 정도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쨌든 만족한 것 같으니 다행이네.’
곧바로 메인 컷과 b컷 선정을 위해 모니터링을 시작한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잘 나온 사진들을 보고 동시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