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158화 (158/224)

#158. 돌아올 시간 (2)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연을 공개하는 것에 이어서 미니 코너로 진행된 게임이 문제였다.

<자 그러면 벌칙을 수행할 팀은 누가 될 것인가!>

게스트로는 우리만 출연한 게 아니었고, 한국 소속사와 합작으로 프로듀싱 했다는 일본 현지 여자 아이돌 멤버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아예 K-POP 특집으로 잡아 준 건 좋은데 아무래도 일단은 아이돌이다 보니, 이성 연예인과 붙어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뭐 다들 따로 주의 안 해도 조심할 거 같긴 한데….’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졌다. 둘둘 씩 짝지어서 수행한 기억력 게임에서 최종 벌칙 당첨자로 선정된 건 지원과 그 팀 메이트.

둘 다 순발력에 자신이 없긴 했지만 정말 벌칙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 지원 군, 유키 양! 어느 쪽이 벌칙을 수행하실 겁니까?>

그 벌칙이라는 게….

“와….”

“음….”

묘하게 좀 징그러운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전신 타이즈를 입고 온몸에 먹물을 묻힌 인간 벽 사이를 빠져나가기’와 ‘풍성한 깃털로 무장한 스태프 10명이 태우는 간지럼을 1분 동안 버티기’ 사이에서 택 1이었다.

‘둘 다 싫다….’

그리고 양쪽 모두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자를 택하면 갈아입을 여분의 의상도 없는데 옷이며 메이크업이며 엉망진창이 될 테고, 후자를 택하면….

‘솔직히 무슨 화면이 나올지 감도 안 잡혀서 무섭다.’

게다가 하필 지원한 현지 여자 아이돌 멤버와 팀이 되는 바람에 유쾌하게 서로 벌칙을 미루는 장면도 뽑아내기 쉽지 않았다.

손님에 가까운 우리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여기서 지원이 미루기라도 했다간….

‘희대의 쓰레기처럼 내보내겠지.’

지원이 어떻게든 차악을 골라서 수행해야 하는 상황. 살려 달라는 듯 글썽글썽거리는 눈과 마주친 순간 머리가 아파 왔다.

‘아니 이건 나라도….’

그냥 적당히 망가지는 정도면 내가 흑기사 해 보겠는데 이건 좀 지나치잖아.

이미 다른 출연자들은 꾸준히 수행해 왔던 걸 우리는 죽어도 못 한다고 거부해서 ‘역시 K-POP 아이돌들은 콧대가 높다.’느니 조롱당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

나는 잠시 제작진과 지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속으로 긴 한숨을 삼키고 손을 들었다.

<오? 무슨 일이시죠? 인수 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려심 넘쳐 보였던 MC가 이보다 더 악당처럼 보일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주르륵 앉아 있는 고정 패널들의 얼굴을 보니 아주 신이 난 게 뻔히 보였다.

‘어쩐지 별로 재미없는 얘기에도 잘만 웃어 주더라니 이때를 기다렸던 거였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면 빨리 끝내 버리자. 나는 눈을 딱 감고 통역사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제가 대신 수행할 수 있을까요?”

고정 패널 인원들이 일제히 ‘오오~’ 일본 특유의 느낌이 가득한 환호성을 질렀다.

대충 지금 내 얼굴 아래로 ‘리더의 책임감’ 뭐 그런 자막이 나가겠지. 카메라가 빤히 내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인수 군이요? 이야, 막내를 위한 리더의 용기, 다 같이 박수 한번 주시죠!>

그리고 곧장 퇴로부터 차단하겠다는 듯 어느새 등 뒤로 건장한 스태프들이 나를 에워쌌다.

‘그래 봤자 내가 더 크긴 한데….’

나를 둘러싼 장정들 위로 반 뼘쯤 올라온 머리가 웃겼는지 객석에서 한바탕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렇게라도 웃음이라도 드렸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천천히 처형장으로 향하자 MC가 다시금 내게 마이크를 건네며 물었다.

<어떤 벌칙으로 수행하실 겁니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잠시 후, 뒤이은 인터뷰까지 마치고 일본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낸 나는 파김치가 된 채로 이동용 차량에 몸을 쓰러트렸다.

“죽겠다….”

속내를 숨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반쯤 넋이 나간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자 지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형, 괘. 괜찮아?”

평소였다면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겠지만.

‘진짜 안 괜찮아서 뭐라 말이 안 나온다.’

이번만큼은 나도 빈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을 거 같아.”

이를 꽉 깨물고 눈을 감자 같이 올라탄 영인이 한술 더 떠서 지원을 놀렸다.

“헉, 형이 죽었다.”

“어…? 어…!? 어어…!?”

때마침(?) 난 이제 정말 듣고 있을 힘조차 없어서 반응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지원이 놀라서 나를 마구 흔들어 댔다.

“혀, 형…! 일어나 봐! 진짜 기절한 거 아니지…!?”

냅다 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눈을 감은 채 직감으로 영인의 귓불을 낚아채고는 남은 온 힘을 쥐어 짜내서 꼬집었다.

“또 이상한 소리 하지.”

“악! 그치만 반쯤은 죽은 거 맞잖아요.”

나는 더 대꾸하지 않고 유언을 남겼다.

“호텔 도착할 때까지 죽어 있을 테니까 깨우지 말고 조용히 해.”

마지막까지 뭐 하나 이렇게 쉽게 풀리는 게 없는지. 나는 온몸을 간지럽히던 솜털들을 떠올리며 오소소 돋은 소름들을 가라앉혔다.

조금 전 촬영할 당시 내가 선택한 벌칙은 간지럼 태우기 쪽이었다.

물론 간지럼도 반사적으로 자극을 피하려는 과정에서 몸이 뒤틀리고 못생긴 표정을 짓게 되기 때문에 곤란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옷도 버리고 얼굴도 버리는 것보단 낫지.’

오늘 입은 옷은 미리 한국에서부터 스타일리스트가 챙겨 준 의상이었으나 이너는 이전에 팬 사인회를 할 때 팬이 선물해 준 옷이었다. 심플하게 흰 면티에 로고 하나만 박혀 있는 옷이라서 망가지더라도 새로 하나 사면 아무도 못 알아볼 터였다.

‘그래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마음을 담아서 준 물건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뭐 당연히 간지럼 쪽으로 가야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간지럼을 선택한 나는 막상 처형대에 서고 나니 급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지원이 이 앞에 섰다가 너무 놀라서 울어 버리는 바람에 세트장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하자.

한 번 더 세뇌를 거친 끝에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잠깐 만취했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몸이랑 정신이 분리된 느낌…. 몸과 정신을 분리….’

무슨 헛소리인가 싶겠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처방이었다. 몸은 방바닥 위에 드러누워 있는데 머리만 빙글빙글 도는. 몸을 아무리 간지럼을 태워도 정신은 반응하지 않는 상태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 결과….

‘대박. 인수 형 기절했나?’

벌칙을 수행하는 내내 나는 잠든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오, 이게 무슨 일이죠! 인수 군 표정의 미동도 없습니다!>

정확히 60초 후. 마치 냉동 인간이 해동된 것처럼 부스스 눈을 떠서 자리를 정리하자 세트장 전체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런 식으로 알코올 중독 시절 경험을 활용하고 싶진 않았는데….’

벌칙을 수행하던 스태프 중 한 분은 나를 보며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따봉을 날리기까지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크게 문제 될 만한 장면 없이 촬영은 마무리되었고 남은 건 관광 일정뿐이었다.

“내일 우리 온천 간다고 했었나?”

전신욕을 할 건 아니고. 전통문화 체험 뭐 그런 거로 기모노도 입어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족욕도 할 예정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럼 이제 공식적인 활동은 다 끝난 거죠?”

하연이 확인차 매니저에게 묻자 매니저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내일 비하인드 찍는 건 영인 씨랑 규민 씨가 담당해 주실 거니까 틈틈이 촬영에만 협조해 주시면 돼요.”

이제 진짜 끝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잠을 청했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른 녀석들은 또 드럭 스토어 쇼핑이니 뭐니 하고 들떠서 호텔 밖으로 나갔다 온다는데 나만 일찍 잠들어서 그런가.

아직 아침 7시도 되지 않았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다른 녀석들은 다 곯아떨어졌네.’

나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서 미리 세수와 양치를 한 다음 침대 헤드에 베개를 비스듬히 세워 등을 기댔다.

전원 스위치를 끈 것처럼 잠들어 있던 사이 어디서 연락이라도 오지 않았나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SNS 알림들만 잔뜩이었다.

누구님이 뭘 공유했고 뭘 좋아요를 눌렀고 그런… 관성적으로 휙휙 알림을 정리하고는 이어서 메신저를 확인했다.

[권희정] 어제 일본 쇼 케이스 했다며? 대단하다 오후 9:43

[원비트 스튜디오 튜이 쌤] 인수~ 요즘 해외 활동 도느라 바쁘지? 오후 10:37

[도어룸 권창헌 PD님] 인수 씨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죠? 오후 10:58

연습생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지인들에게서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와 있는 것 말고는 따로 급한 연락은 없었다.

‘중요한 건 이쪽인데….’

나는 슬쩍 공민형과 임희록의 프로필을 확인하고는 쓴 입맛을 다셨다.

임희록은 실종을 확인한 이후 지금까지도 아무런 업데이트가 없었다.

찾았으면 프로필 사진을 다른 걸로 바꾸든가 했겠지. 마당발인 규민에게서도 여전히 들은 말이 없는 걸 보면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모양이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고.’

자기 팔자 자기가 꼬는 거고 남의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거도 아니지만.

한번 시기를 놓쳐 본 선배로서 계속 오지랖을 부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박박 약이라도 올리면 좀 자극을 받으려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쇼 케이스 날 팬분들을 배경으로 찍었던 단체 사진을 공민형에게 보냈다.

‘이걸로 차단할 녀석이었으면 진작 했겠지.’

뭐라도 반응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과는 읽지도 않고 씹기였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안 보는 걸 수도 있고….’

그러나 그날 내내 매니저와 멤버들을 따라다니며 머리를 비우고 관광을 즐기는 동안에도 읽음 확인 표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차단당한 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확인할 방법도, 굳이 지금 당장 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신경이 쓰여서 핸드폰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영인이 속도 모르고 내 등을 두드렸다.

“형 어제 고생 진짜 많이 했잖아요. 오늘은 재밌게 놀다 가야죠!”

그 말이 맞았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는데 기회가 될 때 나도 숨 좀 돌려야지.

그리고 곧장 영인이 웬 노점상에서 파는 길거리 기념품에 빠져서 뒷덜미를 잡아 말려야 했던 건 별것 아닌 일로 쳐 줄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좋냐?”

기어이 하나를 사서 손에 쥔 영인을 보며 묻자 영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차피 미신이잖아.”

대충 뭐 적혀 있는 대로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부적이라나. 퉁명스럽게 뭘 샀는지 묻자 돌아온 대답이 제법 기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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