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도쿄에서 생긴 일 (3)
쇼 케이스가 오후 늦게나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침에는 비교적 여유가 넘쳤다.
“편의점 갔다 오자 편의점.”
“편의점에서 뭐 사지?”
“멜론 빵이나 푸딩 그런 거 유명하다던데.”
“으악, 이름만 들어도 달아요.”
어제 사 온 간식거리들 대부분이 달거나 짜거나 한국인 기준으로는 다 간이 너무 셌던 것들이라 디저트는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듯했다.
“그럼 에그 샌드위치?”
“그런 좀 괜찮겠다.”
곧 가위바위보 끝에 패한 지원과 하연이 나란히 편의점행에 당첨되었다.
“딴 길로 새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와.”
내가 혹시나 하는 걱정에 당부하기 무섭게 규민과 영인이 헛소리를 덧붙였다.
“모르는 사람이 뭐 준다 그러면 따라가지 말고.”
“연예인 해 볼 생각 없냐고 하면 이미 슈퍼스타라고 해.”
“호스트 해 볼 생각 없냐고 하면 얼마 주는 거냐고 물어보고.”
나는 곧장 규민을 노려보았다.
“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궁금하잖아. 내 친구 중에 연습생인데 관광차 일본 왔다가 진짜 스카우트 받은 애 있었어.”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경멸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걔한테 물어보든가 왜 우리 막내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냐.”
“당연히 거절했으니까. 얼마 주는지 못 들었대.”
“이상한 소리 귀담아듣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말 거는 거 같으면 호텔로 도망 와.”
또 온통 아무 말뿐인 와중에 지원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것도 뭔가 이상한 것 같기는 하다만.
다행히 두 녀석 모두 딴 길로 새지 않고 얌전히 편의점만 다녀왔다.
“다녀왔어…!”
손은 또 뭐가 그렇게 큰지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야 우리 이거 다 못 먹어…!”
내가 놀라서 외치자 규민과 영인이 곧장 반박했다.
“뭔 소리야 이거 우리 둘이서도 다 먹겠다.”
“아 당연하죠.”
“뭐?”
아침부터 그 정도로 많이 들어간다고? 각종 샌드위치에 프로틴 음료에 별걸 다 사 왔다. 한숨을 쉬기도 전에 다른 녀석들도 조용히 한두 개씩 집어 들었다.
“거봐요, 형만 안 먹는 거지.”
아니, 지금이 다른 때도 아니고 해외 활동 돌고 있는 타이밍인데.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지만 나는 얌전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도 해치워야 할 스케줄이 산더미니까… 좀 먹게 놔두는 것도 좋겠지.’
중간에 체력이 달려서 퍼지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그래 먹어라 먹어.”
“넹~.”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고 호텔에서 나온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예상 그대로의 강행군이었다.
“헉… 사람 진짜 많아…!”
“일본 인구수가 한국에 비해 두 배 이상 더 되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건 아닌….”
“저기 저 건물 뒤까지 보이는데?”
“…많네.”
오늘 계획된 쇼 케이스는 팬들의 선착순 일부와 초청된 취재진들만 입장할 수 있는 행사였다.
그동안 일본에서 공식 활동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기 때문에 기획할 당시만 해도 한 50명 오면 많이 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50명… 가지고 되겠냐.’
그래도 50명은 너무 적은 거 아니냐와 50명이면 충분하다가 첨예하게 대립한 끝에 혹시 모르니까 일단 넉넉하게 150명 받는 거로 결정되었다.
인원이 영 안 찬다 싶으면 조기 마감을 해서 처음부터 100명이었던 것처럼 공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쇼 케이스 일정 공개 당일.
스케줄이 공개되자마자 미친 듯이 밀려 들어오는 일본어 문의에 회사 전체가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 살고 있는 팬입니다. 이번 쇼 케이스를 꼭 관람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전에 예약할 수 있을까요.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 <쇼 케이스 수용 인원을 늘려 주시기를 건의합니다. 일본에는 아직 엔카운터의 공식 팬클럽이 없지만 겟 데뷔부터 시작해서 아주 많은 팬들이 있습니다. 지금 공지된 인원으로는 결코 수용할 수 없습니다. 결정을 변경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급히 또 장소를 바꾸고 인원을 늘린 게 250명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장소를 소극장으로 옮겨서 천 명 정도 넉넉히 수용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으나….
‘저희가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하려면 대행사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제 와서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이제 와서 새롭게 장소를 물색하는 것도, 대행사를 구해서 예매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도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이래서 체계도 업력도 없는 회사는….’
물론 욕먹을 짓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경험치가 쌓여서 이런 일에 있어서는 척척 진행해 나갔던 구 소속사를 생각하니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어쨌든 선착순 입장이라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는 거죠?’
내가 확인차 물었을 때 매니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현지 예매 시스템을 저희가 당장 이용하기는 좀 힘들다 보니까….’
그럼 250명을 제외한 나머지 팬들은 기껏 기대하고 와서 내내 대기만 하다가 집에 간다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나도 알지만. 마음이 쓰였다.
‘저 하나만 건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결국 나는 사서 일을 만들고 말았다. 입장 제한은 250명 그대로 유지하지만 현장에 온 팬들에게는 전원 포토 카드와 포스터를 지급하기로 공지를 추가한 것이다.
‘인수 씨, 팬들 아끼는 마음은 알겠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대표가 멋도 모르고 하는 말에 나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쇼 케이스장은 도쿄에 위치한 전시관이지만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국에서 몰려올 테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아니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수준으로 먼 길을 온 팬분들이 턱없이 적은 수의 제한에 걸려 맨손으로 돌아가는 일은 막고 싶었다.
‘그래도 당일 한정판인 굿즈라도 얻어 간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테니까….’
수량이 너무 많이 남으면 국내 행사에서라도 소진하면 되니까, 정도의 생각으로 정말 넉넉한 수량을 가져왔으나 지금 전시회장을 둘러싼 줄을 보니 모자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희 몇 세트 가져왔었죠?”
“아마… 이 천 세트요?”
“…….”
지금 줄이 대체 몇 바퀴를 돌고 있는 거지. 건물을 감싼 한 줄에 300명 정도 되는 것 같으니까….
“큰일 났네.”
“……”
예상외로 몰린 인파를 걱정할 새도 없이 곧장 리허설이 시작돼서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빨리 안쪽으로 이동해 주세요!”
“아, 네네!”
괜히 우리가 허둥지둥거리고 시간을 끌면 다른 분들이 더 곤란해진다. 일단은 머릿속에서 다른 걱정들은 지우고 무대 생각만 하자.
한숨과 함께 시작된 리허설은 다행히 순조로웠다. 정말 다행히도.
“휴, 잘 끝냈다!”
“와, 나 지금 일본어 시험 보면 만점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자신감 근거는 있는 거야?”
멤버별 인터뷰부터 시작해서 비하인드 영상 공개에 통역사를 낀 질답 시간까지. 숨 고를 틈도 없이 외운 대본대로 말하고 또 말하다가 겨우 무대에 올랐을 때가 제일 여유가 넘쳤다.
‘가사 틀리면 안 되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미 한국어로 너무 많이 불러 봤던 곡이라서 연습 중에 관성적으로 한국어 대사를 떠올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 영미권 데뷔도 하면 영어 노래도 내고 그래야 하는 건가.’
이미 전례가 없지 않은 일이었다. 케이 팝 그룹이지만 해외에서 너무 흥행해 버려서 이후 한국어 노래는 수록곡이 대부분이고 영어 노래만 내기도 하니까….
현지 시장을 공략하려거든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때가 되면 이제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 아무거나 무심코 입에 붙는 대로 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그런 날이 올지 안 올지는 아직 미지수였으니 반쯤은 김칫국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리허설이 마무리된 이후, 포토 카드 배부부터 쇼 케이스 본행사까지 순식간에 큰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한국이랑 뭔가 느낌이 달라서 신기해요. 뭐랄까 각 잡고 관람에 집중하는 느낌?"
"아 뭔지 알 것 같다."
각자 간단한 후기를 늘어놓는 것을 한쪽 귀로 들으며 서둘러 현장을 떠날 채비를 했다.
‘끝났다….’
이제 오늘은 호텔로 들어가서 쉬기만 하면 된다! 안도한 그때 외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대기하시면 안 됩니다!>
<이쪽으로 퇴근 안 해요!>
<여기서 대기하셔도 엔카운터 못 봅니다!>
여기도 한국이랑 사정이 비슷한지. 전시장 안으로 입장하지 못했던 팬들이 주차장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많나?”
혜성이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려다보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인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헉….”
“많다….”
아까 결국 포스터도 포토 카드도 중간이 동이 났다고 했었나. 오래 기다리고도 빈손으로 돌아간 팬분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편치 않았다.
“이쪽으로 이동하실게요. 저쪽에 차량 대기시켜 뒀어요!”
매니저가 최대한 혼잡하지 않게 빠져나가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팬분들이 대기 중인 주차장 반대편을 가리켰다.
“……”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규민과 눈이 마주쳤다. 슥, 규민이 곁눈질로 조용히 창문 밖을 가리켰다. 신경 쓰이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럼 맘에 걸리지 안 걸리겠냐? 내가 꽤나 심술 맞은 표정으로 규민을 마주 보자 규민이 그다음에는 영인을 바라보았다.
“……?”
영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규민을 보다가 규민이 다시금 바깥쪽을 슥, 턱짓으로 가리키자 덩달아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규민이 장난스럽게 씩 웃어 보였다.
“가끔은 좀 회사에서 싫어할 만한 일도 하고 싶지 않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위험하고 돈은 안 되는 거.”
“야.”
그리고 곧바로 눈치챘다는 듯 영인이 쿵짝이 잘도 맞아떨어졌다.
“아, 완전요. 저 그건 진짜 전문인데.”
우리가 바로 뒤따라오지 않고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자 매니저가 다시 우리 쪽으로 와서 외쳤다.
“얼른 나가야 해요. 여기 곧 정리할 거라….”
그러자 규민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으며 매니저를 붙잡았다.
“형, 저희 지금까지 진짜 잘했잖아요,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사고도 안 치고, 진짜 소처럼 일만 한 거 같은데.”
규민이 대체 왜 저런 소리를 하나 매니저는 물론, 은찬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채 규민을 바라보았다.
규민이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폭탄을 떨궜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희 이번에 딱 한 번만….”
처음 규민의 입에서 빠져나온 문장을 들었을 때. 매니저는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근데 저희 지금 제일 중요한 게 어쨌든 긍정적인 홍보잖아요. 기껏 보러 왔는데 줄 세우기만 시키고 수용 인원은 적어서 난리고 이런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돌아가면 좀 그럴 것 같은데….”
하여간 말은 언제나 그렇듯 청산유수였다. 그리고 결과는… 어쨌든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