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154화 (154/224)

#154. 도쿄에서 생긴 일 (2)

호텔을 빠져나온 우리는 곧장 목적지로 직진했다. 딴 길로 새지 말라고 내가 잔소리를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한국과 멀지 않은 곳임에도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멤버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긴 덕도 있었다.

실내는 실내대로 너무 건조해서 썩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서둘러 걸음을 옮겨 도착한 장소에서 영인이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와 엄청 넓다.”

작지 않은 건물 세 층을 통으로 터서 운영 중인 드럭스토어는 아까 이동하면서 봤던 다른 지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이 정도면 다X소 5층짜리 터놓은 거랑 비슷하겠는데.”

각종 영양제나 화장품, 패치 등은 물론 생활용품에 인테리어 소품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식품 코너는 아예 무슨 마트처럼 한 층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었다.

“식품부터! 식품부터 봐요!”

영인이 신나서 카트를 밀고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위험하니까 뛰지 말고! 조심해!”

내가 영인 쪽으로 외치며 재빨리 따라붙자 다른 녀석들도 흘끔 그쪽을 바라보더니 내게 말했다.

“우리는 이쪽 보고 있을게. 이따 문자 해.”

와이파이용 수신기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규민을 포함해서 몇 명은 편하게 쓰겠다고 따로 로밍을 해 온 상태라서 연락이 안 될 위험은 없었다.

“그래. 이따 봐.”

30분만 둘러보고 다시 모이기로 단단히 일러 뒀으니까…. 뭐 별일이야 없겠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영인의 뒷덜미를 잡았다.

“혼자 막 뛰어가지 마. 같이 다녀야 안전하지.”

지금은 딱히 여행 성수기일 때도 아니라서 한산하기 그지없었지만. 공항 때처럼 사람이 몰리거나 우리를 알아보는 팬이 있으면 또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네이~.”

“뭔데 그 말투.”

영인이 홀홀 무슨 내시 같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고개를 숙였다.

“형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딱히?”

“오기 전에 브이로그 같은 거 안 봤어요?”

봤겠냐. 누구라고 특별히 일본어를 잘하는 멤버가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진행 멘트는 내가 외워서 할 예정이었다.

다른 녀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였으나 리더만큼 대사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니 여행 브이로그 같은 것도 볼 여유가 있었던 거겠지.

나는 그럴 여유도 없었거니와 현호도 딱히 그런 걸 찾아보는 편이 아니라서 어깨너머로 구경할 수도 없었다.

“못 봤지. 안 본 게 아니라.”

물론 시간이 있었어도 안 봤을 확률이 높았다. 그 시간에 공연장 위치나 특징 같은 거나 더 찾아보고 있었겠지.

영인이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슥슥 과자들을 카트 안에 잔뜩 담았다.

“적당히 골라. 집에 갈 때 무게 제한 걸리면 어떡해.”

“맞다, 면세점에서도 사야 하는데.”

이거야 원, 관광을 온 건지 아니면 일을 하러 온 건지 모르겠으나 신나서 들뜬 모습을 보니 나쁘지 않았다.

긴장해서 덜덜 떠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지. 영인이야 무대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잘할 건 믿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한 순간.

“……?”

어쩐지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에 음료수 있는 것 같은데?”

“아 그러네. 저쪽이다.”

“응, 저기로 가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호텔가니 한국어가 들려도 이상할 건 없지만. 뭔가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나는 잠깐 눈을 감고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오 이거 맛있어 보인다.”

“하나 살까? 냉장고에 들어가려나?”

“아슬아슬할 거 같은데.”

“안 들어가면 그냥 바로 다 마셔 버리지 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쯤 되는 젊은 남자애들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다시금 기시감이 든 순간 진열대 모퉁이에서 목소리의 주인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

“오.”

멀찍이 카트를 밀고 있었던 영인도 내 쪽을 쳐다보며 반가움에 눈을 크게 떴다.

“수민이 형?”

“어!?”

4차 미션 이후 탈락하면서 소식이 끊긴 연습생이었다.

“와! 여기서 다 보네. 대박.”

이름이 홍수민이었지. 촬영 당시 나한테 먼저 다가오기도 했고 한 팀으로 무대를 올리기도 해서 그런대로 잘 안다면 잘 아는 사이였다.

“우와, 진짜 대박이네요. 여기서 다 보고.”

옆에 있는 다른 동행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긴 한데 키도 크고 꽤 마른 체격이라서 아마도 수민과 친분이 있는 연습생인 듯했다. 수민이 데뷔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으니까.

“아 맞다. 내일 엔카운터 일본 쇼케였죠? 와 멋있다~.”

수민이 밝은 얼굴로 추켜세워 주자 영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저 완전 떨려요. 내일 실수하면 한 10년쯤 놀리셔도 돼요.”

“그러면서 안 할 거지?”

“안 하려고 노력은 할 건데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인수 형이 절 죽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내가 언제.”

차마 ‘너네는 무슨 일로 왔냐.’고 말이 먼저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은근히 신경 쓰이는 문제란 말이지.’

저쪽은 데뷔를 아직 못 했고 우리는 한 입장이니까. 무슨 말을 해도 ‘데뷔도 못 한 루저들아ㅎ 너네는 관광으로 놀러 왔겠지만ㅎ 우리는 일하러 온 거란다ㅎ.’ 이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지금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지금 시기란 서바이벌 방송은 진작 끝났고 파생 그룹들이 하나둘 데뷔를 하고 있어, 이러다 유행 끝물 잡아서 방송 버프 하나도 못 받는 게 아닌가 위기감이 닥치는 시기를 뜻했다.

‘최악의 경우 데뷔 자체가 엎어지는 일도 허다하니….’

그러면 나 때와 마찬가지로 이럴 줄 알았으면 딴 데 갔지. 다른 데 갔으면 진작 데뷔했을 텐데, 의 굴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여러모로 막연한 불안감이 폭주할 시기였던 고로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저 때는 사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낙엽만 봐도 자격지심이 발동할 때라서….’

내가 슬쩍 저쪽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눈치로 바라보자 수민이 먼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저희 뮤비 찍으러 왔어요. 내년 초에 데뷔해요!”

그러고는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이미 싱글 재킷용으로 쓸 화보는 촬영한 듯 단체 사진이 화면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오, 컨셉이 청량이에요?”

영인이 관심을 보이며 눈을 빛내자 수민이 기쁜 내색으로 대답했다.

“응, 틴에이저 보이 밴드 컨셉으로 나갈 거야.”

하지만 수민아 너는 10대가 아니잖아, 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했으나 만으로는 아직 10대일 테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다.

“잘됐다. 나중에 데뷔하면 앨범 하나만 보내 주라. 아, 활동 겹치면 대기실에서 보면 되려나.”

반가운 마음에 반쯤은 인사치레로 부탁하자 수민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하나 꼭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그러는 사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수민의 동행인이 슬쩍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아.”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이 지나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이렇게 길을 막고 있는 것도 역시 좀 그랬다.

“그래요, 옆으로 좀 빠져서 찍을까요?”

내가 슬쩍 통행로에서 비켜서며 제안하자 수민과 그 동행인인 친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 그럼 여기서 제가 찍을게요. 각자 한 분씩 찍으면 될 것 같은데.”

“네네.”

어떻게 해도 장소가 어딘지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예 그냥 배경이나마 예쁘게 나오도록 조명이 환히 뿜어져 나오는 진열대 앞에 섰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연달아 셔터음이 울리고 나니 동시에 후, 잠시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하하.”

“참, 지금 찍은 사진은 혹시 내년에 저희 데뷔하고 나서 공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는 아무래도 스포라서요.”

“아, 네네. 당연하죠.”

어쩐지. 데뷔일까지 확정 지어진 상태라 그렇게 표정이 밝았나 싶었다.

“네! 그럼 나중에 또 봬요. 그때는 꼭 음방 대기실에서!”

힘찬 인사와 함께 헤어지고 나니 순식간에 20분이 녹아 없어진 후였다.

“우리 그래서 뭐 사려고 했지.”

“아.”

“우리도 음료수 사요, 음료수.”

“그럴까.”

10분 만에 허겁지겁 쇼핑을 끝내고 규민네에게 연락을 하니 웬일인지 바로 답이 오지 않았다.

“……?”

뭐지 또 무슨 일 생겼나? 혹시 하는 생각에 계산대가 있는 1층에서 다시 2, 3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우리와 했던 과정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규민과 지원을 보고 한참 동안 웃었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한 번에 할걸 한 번에.”

결국 여섯 명이서 다시 단체 사진을 찍고 계산까지 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1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후였다.

“으어 곧 10시네.”

“뭐야 뭐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것저것 간식부터 음료수에 영양제, 각종 패치나 온열 안대까지 한 짐을 들고 와서 그런가 속이 조금은 출출했다.

“아 근데 우리끼리만 먹긴 좀 그렇지 않나….”

“으음….”

결국 옆방 녀석들도 불러서 구슬 사이다니, 젤리 사이다니 이것저것 먹고 나니 금세 자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수민이네는 내년 초에 데뷔할 거래.”

“걔네 소속사가 어디였지?”

“모르지. 그런 거 자세히 기억 안 해서.”

“너는 내 소속사가 어디인지는 아냐?”

규민이 서운하다는 말투로 묻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멤버랑 다른 그룹이랑 같냐?”

“안다 이거네? 뭔데?”

나는 규민을 향해 잠시 경멸의 눈빛을 보낸 다음 대답했다.

“써머데이.”

“그 뒤에는?”

쓸데없이 긴 이름인 회사명을 굳이 전부 들어야겠다니. 나는 일부러 놀릴 생각으로 틀린 대답을 말했다.

“액티비티?”

“땡!”

“아이디어스?”

“땡!”

틀릴 때마다 규민이 자꾸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아하하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실망이다.”

"뭐래, ‘크리에이티브’잖아.“

”아, 뭐야.“

흥, 나는 코웃음을 치며 제로 칼로리로 나온 음료수를 홀짝였다.

”하 씨, 형 은근히 감동받게 하네.“

그러고는 기어이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규민을 향해 다시금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아무튼 내일 6시에 일어나는 거 다들 잊지 말고. 1층 로비에서 6시 반에 보자.“

내일 쇼 케이스 하고 또 다음 날 아침에 아침 방송 라이브로 나가서 무대 한 번 하고 오후에 잡지 화보 겸 인터뷰 스케줄도 끝내면 이번에 정해진 일정은 마무리던가. 하루쯤 관광 일정이 더 있으니 한국에 돌아가는 건 사흘 후의 일이었다.

‘3일 동안 바짝 더 힘내자.’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드디어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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