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파리에서 생긴 일 (2)
“와, 정말요? 그것까지는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잠시 후 눈만 잠깐 붙이고 바로 출발할 숙소에 모인 우리는 매니저가 핸드폰을 붙잡고 활짝 웃는 것을 보며 우리들끼리 속닥거렸다.
“헐. 진짜 뮤즈 그런 거 된 거 아냐?”
“벌써부터 김칫국 마시지 마. 그냥 시즌 모델로 쓰겠다는 걸 수도 있어.”
“그럴 거면 걍 일 년짜리 국내 앰배서더 시키겠지.”
“아니면 콜라보 라인 판매라든가요.”
“아 그것도 좋다.”
각자 생각할 수 있는 오만 경우의 수를 말하며 두근두근하는 사이 겨우 통화를 마친 매니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희 우선 좋은 소식이 하나 있거든요. 그런데 다른 하나는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조금 더 협의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그 좋은 소식이라는 게 뭔데요. 다들 눈을 빛내며 매니저를 바라보자 매니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 아이참.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우선 첫 번째는 다음 앨범의 컨셉츄얼 디렉팅을 C 브랜드에서 담당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의상은 물론 세트의 기획과 연출까지도. 그때 입은 의상은 시즌 콜라보 라인으로 한정 판매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건 거의 확실하게 의논이 된 거라서 추후 계약서만 작성하면 되는 문제였고 더욱 구미가 당기는 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그다음 건이었다.
”인수 씨랑 하연 씨를 다음 시즌부터 로컬 뮤즈로 기용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예상한 것들 중 하나였다. 글로벌이 아니라 로컬이라는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당연히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글로벌과 로컬에 대해 설명하려면 우선 C 브랜드의 홍보 모델 체계에 대해 알아야 했다.
C 브랜드의 홍보 모델은 총 다섯 종류. 각 캠페인이나 화보별로 기용하는 일반 모델, 시즌별로 기용하는 시즌 모델, 각 국가나 지역별 홍보 간판으로 내세우는 로컬 뮤즈, 전 세계적인 홍보에 기용하는 글로벌 뮤즈,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딱 한 명만 기용한 사례가 있는 하우스 뮤즈였다.
참고로 여기서 단 한 명뿐인, 브랜드를 대표하는 뮤즈는 C 브랜드 창업자의 아내였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볼 때 가장 높은 단계의 모델은 글로벌 뮤즈라고 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다섯 명뿐이랬나.’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알아볼 만한.
‘우리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니까.’
훗날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금만 보면 그렇다는 거였다.
‘한 명 딱 집어서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전체를 다 뮤즈로 기용하기에는 우리 인원수가 너무 많은 건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뮤즈로 기용할 의향이 있는 건 나와 하연뿐이라는 말에 규민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저희는요? 저희는 뭐 문의 들어온 거 없어요?”
그러자 매니저가 아하하,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네, 아쉽지만… 그래도 저희 전반적으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가서 조만간 좋은 소식 들릴 것 같아요.”
“떼잉. 한국 들어가면 너희가 밥 한번 사, 응?”
규민이 장난스럽게 어깨동무를 걸기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되면 말해 되면. 그러고 연락 안 오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괜한 염려와 달리, 다시 연락이 온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오늘 드디어 왔어요! 인수 씨랑 하연 씨 정식 뮤즈 기용 제안서요!”
그쪽에서 보낸 서류를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단순히 줄글로만 된 된 계약서가 아니라 아예 우리로 그림은 물론 어떤 이미지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자료까지 만들어서 첨부된 제안서였다.
‘하연이 빨간 머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본데….’
나도 메인 컨셉화에서는 지금 머리 그대로 흑발이었지만 일부 작은 그림에서는 탈색한 머리나 애쉬 계열로 그려진 그림도 있었다.
반면 하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내내 일관적으로 빨간 머리였다. 계약서 내용에도 나와는 달리 다른 코멘트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계약 기간 중 본인의 머리 색과 적발 외 다른 염색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좀… 많이 까다롭지 않나?”
하연의 머릿결이 버텨 줄까-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머리 색 자체가 인물 고유의 이미지를 상징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으니 마냥 억지스러운 요구는 또 아니었다.
“저는 큰 상관 없어요. 의미를 담아서 한 건 아니긴 한데 다들 좋아해 주시니까….”
당사자인 하연이 별생각 없다니 다행이었다.
로컬 뮤즈 화보 촬영 자체는 당장에 급한 스케줄이 아니라 그쪽이랑 협의 되는대로 알려 주겠다고 했고.
‘그럼 이제 제일 빠른 스케줄이….’
[- 일본 쇼 케이스]
악. 남은 스케줄 중 가장 부담이 큰 건이었다.
‘그래도 해야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니까.’
국내 데뷔라는 첫 번째 허들을 넘긴 아이돌들이 맞게 되는 두 번째 허들이라고나 할까.
시기의 문제지 상업적인 가능성만 있다면 진출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시장이었다.
일단 인구수가 많다 보니 시장 규모가 있기도 하고 기존 한류 선배님들이 길을 잘 닦아 놔서 판로가 어느 정도 잡혀 있는 곳이었다.
다른 그룹들도 국내 활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바로 일본부터 진출하려 하니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본어… 그렇게 자신은 없는데.’
기본적인 회화는 할 줄 알았지만 말이 빨라지거나 내용이 복잡해지면 눈이 핑핑 돌았다.
“우리 중에 일본어 자신 있는 사람?”
그러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나 일본 애니 좀 많이 봤다 하는 사람?”
그러자 여전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진짜 아무도 없어? 제2 외국어라도 일본어 선택한 사람?”
선택지라고 해 봐야 일본어 아니면 중국어잖아. 나는 중국어를 고른 쪽이었다. 내 의지로 고른 것은 아니고 일본어 쪽에 실력자들이 너무 많다고 해서 얌전히 실력자가 적은 쪽으로 빠진 것뿐이었다.
여전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기에 나는 결국 최후의 콜을 했다.
“내가 한 오타쿠 한다 하는 사람?”
그러자 그제야 주섬주섬 은찬이 손을 들었다.
“……?”
우리의 인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힙합 보이가 오타쿠였다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은찬을 바라보았다.
흠흠, 은찬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애니는… 아니지만, 리듬 게임을 좀 해서….”
“리듬 게임이요?”
다들 처음 들어 보는 소리였다.
“리듬 게임이랑 오타쿠가 뭔 상관이에요?”
규민이 무심코 묻자 은찬이 무지몽매한 저질을 규탄하듯 싸늘히 바라보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한국 오락실에서 사용 중인 대부분의 리듬 게임 기계가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일부는 한글화 패치를 하기도 하지만 리듬 게임 자체가 속도감과 터치감, 그리고 채보를 중심으로 UI가 단순하다 보니 따로 한글화를 하지 않고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서 원활하게 게임을 즐기려면 결국 어느 정도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아야….”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난 후에야 자기가 너무 많은 것을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네, 형이 리듬 게임에 진심이시라는 건 알겠어요. 어쨌든 일본어 조금은 하실 줄 안다는 뜻이죠?”
그러자 은찬이 겨우 진정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오늘 공연 다 같이 즐겨 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해 보세요.”
은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오늘의 공연 다 같이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은찬이 한 말을 동시에 번역기 어플에 넣어 돌려 보니, 뭔가 조금 뉘앙스가 다르긴 했지만 결국 같은 내용이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괜찮지.’
그런데 좀… 억양이 살짝 10대 소녀 같지 않나? 평소의 은찬이랑 분위기가 부쩍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전문 분야가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결국 출발하기 전 다 같이 쇼 케이스장에서 할 만한 회화를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우리 아예 극단적으로 일본어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게 어때.”
그리고 출국 직전에는 숙소에서 한정으로 일본어만 사용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멤버에게 벌칙을 주기로 했다.
“야 이거 되게 기분이…. 이상하지 않아? 뭔가…. 이게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영인이 냅다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인수 니상~! 콘나 하나시 시챠우나라 딱콩하기루 약속쿠 시탓데네?”
“뭐라는 거야. 한국어를 하려면 하고 일본어를 하려면 일본어를 해.”
결국 하루 만에 전 멤버들이 ‘도죠’ 하나로 모든 것을 퉁 치는 0개 국어 사용자가 되어 버려 이 학습법은 순식간에 폐기되었다.
“와 근데 도죠 하나로 진짜 웬만한 게 다 해결되는데?”
각국의 언어는 각자 다르더라도 눈치와 손짓 발짓이라는 공용어가 존재하는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쇼 케이스 무대 올라가서 도죠만 할 순 없잖아.”
“일단 대본은 달달 외웠으니까 나머지는 가서 최선을 다해 봐야지.”
그래도 보통 그룹에 한 명쯤은 애니 마스터가 있어서 그 멤버가 일본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던데.
우리는 다 같이 너무도 애국자였다. 다들 만화책만 조금 보거나. 더빙판만 봤거나. 아니면 웹툰만 챙겨 보는 녀석들뿐이었다.
“형은 억양 그거 조금만 고쳐 보세요. 형이랑 좀 너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은찬 본인도 일본어 강사님의 지적을 받고 깨달은 것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여권 챙겼지? 내일 출발이니까 미리미리 짐 다 챙겨 두고.”
이번에는 비행기 표 예매를 미리 끝마쳐 놔서 지난번처럼 비행 시간 내내 도촬과 수군거림을 감당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사소한 문제라면….
“하연아 너 여권 어디다 둔 거야?”
지난 프랑스 방문 이후 가져갔던 짐을 아무 데나 쑤셔 박은 하연이 당일에서야 여권이 어디 있는지 찾기 시작해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끝내 하연의 짐은 물론 은찬의 책상까지 전체를 뒤져도 나오지 않아서 대체 어디로 갔냐, 이대로 하연만 참석을 못 하는 건가 다들 절망에 빠졌으나….
‘그나마 쉽게 해결돼서 다행이지.’
범인(?)은 허무하게도 내부에 있었다.
“아. 맞다 그거. 하연이가 자꾸 여기저기 두고 다니길래 비행기 타고 나서 내가 가지고 있겠다고 하고 받았는데?”
바로 주혜성이었다. 주혜성의 여권 파우치 안에 두 개가 나란히 포개진 채로 수납되어 있었다.
“아 진짜 십년감수했네.”
이번에도 잘할… 수 있으려나?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나 위축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잘해야만 했고 잘하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