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파리에서 생긴 일 (1)
미리 스폰서 측을 통해 공지받은 스케줄은 도착 직후부터 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현지 샵을 이용하기 어려워 다음 비행편을 타고 도착한 스태프분께 한 명 한 명 차례로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전 세계에서 취재진들이 몰려오는 행사에 그래도 나름 한류 대표 스타로 참석한 건데 어중간한 몰골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흐아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현지에 도착해서도 바로 잠깐이나마 쪽잠을 청했음에도 멤버들 모두 피로가 잔뜩 남아 있는지 졸린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입을 옷은 우리가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제공해 주셔서 다행이네.’
그야 브랜드 초청이니까 아무래도… 그쪽 브랜드 제품만 입어야 하니 제공해 주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다들 처음이라서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다 준비되셨어요?”
파리에 도착한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열일 중인 매니저는 이제 솔직히 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넵!”
“네~.”
하나 둘, 셋 넷…. 여덟.
급히 머릿수를 세어 인원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매니저가 오전 첫 스케줄인, 모닝 브랜드 쇼에 참석하기 전 주의할 사항에 대해 일러 주었다.
“저희 말고 초대된 국내 연예인으로는 홍지아 씨, 강비원 씨, 그리고 오빛나 씨 이렇게 세 분이세요. 아마 저희랑 같은 라인에 착석하실 거라서 만나 뵙게 되면 정중하게 인사 한 번씩만 부탁드릴게요.”
각각 앞에 한 명은 서바이벌 출신의 슈퍼 모델이었고 뒤의 두 명은 배우였다.
뒤는 몰라도 앞은 그래도 좀 공감대가 있지 않을까.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네!”
힘차게 입을 모아 대답하고 이번에도 익숙한 듯 차에서 내리기 전 다 같이 구호를 외쳤다.
“드림 유어 유니버스-!”
“엔카운터!”
이제는 다들 딴 데 보면서 손만 내밀기도 하고 너무 풀어진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해서 괜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이런 것도 나름 나쁘지 않네.’
조심스럽게 레드 카펫 앞에 내리자 차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그동안 무대 의상으로 브랜드 의상을 리폼하거나 협찬받은 옷을 입고 나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특정 명품 브랜드의 옷으로 휘감아 본 건 처음이었다.
‘아직까지는 옷이 나보다 비쌀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이미 몇 차례나 엔카운터라는 그룹의 흥행을 증명했음에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와, 사람 엄청 많다.”
영인이 감탄한 대로 레드 카펫 밖의 취재존은 물론 레드 카펫에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올해 유럽에서 열리는 행사 중에 손꼽히게 큰 규모라고 했으니까….’
해외 영화에서나 봤던 외국인들이 아무 곳에서나 불쑥 튀어나왔다.
“와 대박. 저기…!”
규민이 반사적으로 할리우드 배우를 발견하고 놀라서 이름을 외칠 뻔했다가 지금 비하인드 공개용으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미 늦은 거 아냐?”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규민의 시선을 따라가서는 앞에서 지나가고 있는, 할리우드 악동 여동생으로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를 화면에 담았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침착하게 포토존으로 향하기 위해 멤버들을 인솔했다.
“우리는 인원도 많으니까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움직이자.”
여기저기 일방적으로 아는 얼굴들을 찾겠다고 기웃거리다 민폐 게스트로 찍힐 수는 없으니까.
우리를 정말 알아보고 찍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드문드문 우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미는 취재진들에게도 한 번씩 포즈를 취해 주고 나니 긴 레드 카펫이 금세 끝이 났다.
“앞에 포토존 위로 한 분씩 올라가서 단체 사진 찍고 내려올게요!”
우리보다 두세 걸음 앞서서 걷던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포토존 위에 서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카메라가 대체 몇 대야….’
지금도 공식 스케줄 출퇴근할 때는 꽤 많은 수의 팬들과 취재진이 따라붙어서 카메라에 포위되는 것쯤이야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나의 오산이었다. 거의 층층이 하늘 높이 쌓여 있는 렌즈의 산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게 만들었다.
“자, 웃으세요!”
매니저가 포토존 밖에서 주의를 끌며 바둥바둥 신호를 줄 때에서야 겨우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당겨졌다.
‘이거… 다른 녀석들 걱정할 게 아니라 내가 문제일 수도…?’
불쑥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
“으아아, 끝났다~.”
잠시 후.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몸을 갑갑하게 죄고 있었던 슈트의 상의를 냅다 벗은 규민이 차마 벗은 옷을 내던지지는 못하고 얌전히 끌어안으며 엄살을 부렸다.
“그거 우리 1명분 출연료보다 비싼 옷일걸. 얌전히 옷걸이에 걸어 놔.”
내가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 규민이 새삼 놀랐는지 마치 옷을 모시는 것처럼 안아 들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헉, 완전 옷님이네, 옷님.”
“이거 내일 출국하기 전에 반납해야 하는 거죠?”
다들 부담스러워서라도 얼른 벗고 싶어 하는 눈치라 대표로 나서서 매니저에게 묻자 매니저가 웬일인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오늘 입은 제품들은 그대로 가져가도 된대요.”
음? 아까 새벽에 의상 받을 때만 해도 반납해야 하는 거니까 조심하라고 했었잖아. 말이 달라져 있기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제품 협찬으로 바뀌었어요?”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여러 가지를 묻자 매니저가 아주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저희 지금 대표님이랑 브랜드 디렉터 분이 계속 통화하고 계셔서요. 어쩌면 더 좋은 소식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와!”
그리고 그 순간. 조금 전 런웨이 쇼가 끝나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확실히 분위기가 좋아 보이긴 했는데.’
그간 왜 이렇게까지 갑자기 의뢰가 들어왔는지 궁금했던 것도 조금은 실마리가 풀렸다.
<와, 반가워요! 이렇게 실물을 보니까 더 멋지네요.>
쇼가 끝나고 나서야 어디 있는지 알게 된 브랜드 디렉터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아저씨 같은 중년 남성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을 꼽자면 엄청나게 마른 체형이라는 것 정도일까.
키도 꽤 커서 본인이 모델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로 파리에 오게 돼서 정말 기뻐요.>
우리의 외국어 능력자. 영인이 나서서 인사를 받자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져 다른 멤버들도 쭈뼛거리며 한마디씩 더했다.
<아, 안녕하세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그동안 외국어 공부를 제대로 한 게 나뿐이라서 다들 비행기 안에서 속성으로 준비한 것이 너무 티가 났다,
그 외에 딱히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영어가 유창한 건 은찬 정도였으나….
‘…….’
언어를 잘하면 뭐 해. 남들이 보면 좀 떴다고 싸가지 없게 구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서 지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100% 긴장한 거지.’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꽁꽁 굳어 버려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어른스럽게 상황을 정리하는 건 내 몫이었다.
<오늘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내내 머릿속으로 상상해 왔던 장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영인과 가볍게 손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던 디렉터가 내 쪽을 본 순간 눈을 환히 빛냈다.
<아! 인수 군 맞죠? 어쩜,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네요!>
그러고는 냅다 손이 아니라 내 팔뚝을 잡았다.
<……???>
<어디 보자… 사이즈 잘 챙겨서 전달하라고 했는데 어깨가 역시 좀 끼네요. 한 치수 더 큰 거로 드렸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니, 시간만 됐다면 기성품이 아니라 아예 전문 테일러를 붙여서….>
그러면서 중얼중얼 일반적인 상식 수준의 어휘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적인 얘기를 하며 여기저기 치수를 확인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어, 저, 잠깐만요?>
그간 여러 촬영을 하고 옷을 빨리 갈아입어야 하는 무대도 오르면서 남이 몸을 만지는 데는(?) 나름 익숙한 편이긴 했는데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흠…. 허리는 좀 더 줄여도 되겠다. 다리가 길어서 바지는 어떤 스타일을 입어도 괜찮겠는데?>
냅다 이곳저곳을 붙들린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저, 디렉터 님…?>
매니저도 놀라서 허둥거리던 그때, 만족할 만큼 치수를 다 쟀는지 디렉터가 고개를 들어 다른 멤버들도 쭉 훑었다.
<아, 맞아! 거기 빨간 머리 친구!>
디렉터의 다음 희생양으로 붙들린 건 다름 아닌 하연이었다.
‘네???’
너무 놀라서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로 냅다 대답해 버렸으나 디렉터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세상에, 이건 염색이죠? 어쩜. 신이 당신 머리카락을 이 색으로 태어나게 해야 했는데. 아, 차별적으로 들렸다면 미안해요. 그만큼 지금 모습이 너무 완벽하다는 뜻이었어요.>
하연이 한 건 한국어로 ‘네?’ 한마디뿐이었는데 디렉터는 가만히 놔두면 혼자 30분이 뭐야, 3시간은 떠들어 댈 기세였다.
<세상에, 세상에 어쩜. 잠깐만 들쳐 봐도 돼요? 요렇게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한번 보고 싶은데….>
여기가 공개적인 장소라는 것도 잊은 듯 하연이 입은 셔츠 아랫단까지 들치려 드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도 놀랐는지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언성을 높였다.
<빅터! 지금 게스트한테 무슨 짓이에요? 그것도 이렇게 보는 사람도 많은 곳에서!>
결국 그쪽의 사과로 일단락되었다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우리를 안 지 얼마 안 됐나?’
그러고 보니 최근에 뮤직비디오 프로모션 타겟을 국내에 한정하는 게 아니라 글로벌로 넓히겠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우리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직접 만나서 실물을 보고 싶었던 듯했다.
‘이거 어쩌면….’
하고 순간 기대했었는데.
“대, 대박, 그럼 저희 C 브랜드 모델 되는 거예요?”
지원이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묻자 영인이 설명했다.
“잘되면 글로벌, 못해도 국내 앰배서더 정도는 주지 않으려나? 인수 형이랑 하연 형은 대놓고 엄청 주물럭거리던데.”
“아 표현을 해도 좀.”
“사실이잖아요.”
못해도 브랜드 화보 촬영 정도는 기대하고 있던 내게 돌아온 건 그것보다 더 큰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