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한 보 전진인가 했는데 (2)
‘단순한 보복이나 괴롭힘이라기엔 너무 나간 게 아닌가.’
희록에게 무슨 짓을 한 사람이 박 대표가 맞다는 전제하에 이렇게까지 할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랬으면 내가 아니라 당장 유 대표부터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박 대표와 나는 간접적인 원한 관계에 놓인 상황이니.
박 대표가 소속사에서 나간 연예인들을 괴롭힌 정황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일개 연습생, 그것도 회사에서 방출돼서 어디 들어갈 데도 없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협박한다고 박 대표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나?
‘박 대표가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뭔가가 있고, 임희록이 그걸 폭로할 수 있어서 처치를 한 거라든가….’
나는 차근차근 상황을 다시 짚어 보았다.
박 대표가 원하는 게 단순히 나를 괴롭히는 것뿐인가? 그렇다면 1회차의 나를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방해할 필요가 없었을 터다.
그렇게 안 해도 나는 이미 망한 인생이었으니까.
내가 언론이나 방송에 노출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대중의 시선 밖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혹시 이전에도 비슷한 짓을 했고, 내가 유명해지면 자신이 불리해지기 때문에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거라면?’
그리고 그 순간, 시스템창이 팟 빛나며 눈앞에 떠올랐다.
[현재 진행 수준]
[■■■■■■■■■■] (99%)
[수집된 단서]
[- 박 대표와 골든링 미디어]
[- 프리점프]
[- 공민형]
[- 밀키즈]
[- 수상한 스태프]
[- 자가 복제형 악플]
[- 임희록]
[- 실수 연발의 콘서트]
[- 현찬의 비밀]
[- 비안이 말하지 않는 것]
[- 수상한 거래]
[스페셜 미션의 1단계 추론을 제출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지금요? 여기서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으나 지금껏 생각한 것도 있으니 망설임 없이 [예] 버튼을 눌렀다.
뭐… 틀려도 불이익 있다는 얘기는 없었으니까.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눈앞에 떠오른 입력창에 지금껏 정리한 내용을 옮겨 적었다.
[박 대표에게 숨겨야 하는 비밀이 있고, 내가 그 비밀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 활동에 지장을 주고 있다.]
입력 버튼을 누르자 팟, 입력창이 사라졌다가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스페셜 미션 ▷뻐꾸기를 잡아라의 1단계 추론에 성공했습니다!]
“…!”
[모든 상태 지수가 (매우 높음) 상태로 상승하였습니다.]
[1단계 도달 보상 수령]
[- 호감도 미션 선택 수행권]
[- 코인 5개]
[- S급 아이템 확정 뽑기 3개]
[- 2단계 미션 개방]
꽤 괜찮아 보이는 보상보다도 2단계 미션 개방이 제일 신경 쓰였다. 그야 1단계가 있었으니 당연히 2단계도 있겠지만.
“2단계 미션으로 바로 넘어가는 건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순간 새로운 안내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2단계 수행 미션은 ‘서브 에피소드 미션 ▷ 비행 소년’ 수행 이후 시작됩니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뻐꾸기 지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내가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도 전에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 ▷ 비행 소년]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시키기 전에 뭔지 제대로 설명도 안 해 주는 건 여전했다.
‘뻐꾸기 지수가 상승 안 한다는 건 그 말도 안 되는 억까 글들도 안 올라온다는 뜻이니까… 무조건 해야지.’
망설임 없이 [예] 버튼을 누르자 그제야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1개월간 아래 해외 스케줄을 원활히 수행할 것]
[- 파리 패션 자선 행사 참석]
[- 일본 쇼케이스]
[- 신규 싱글 화보 및 커버, MV 촬영]
[- 호주 관광 홍보 대사 촬영]
[- LA K-pop 핫 스타 콘서트 스페셜 스테이지 공연]
[- 투데이히트 토크쇼 게스트 공연]
[잔여 제한 일자: D-31]
“……?”
다시금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걸 한 달 만에 다 한다고? 한 달 만에?
국내 활동을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는데 신앨범 준비를 하면서 이것까지 다 하는 게 가능한가?
각자 몸이 세 개씩은 되어야 하는 거 아냐?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으나 데뷔 직전 미친 듯한 예능 출연 러시를 생각하면 소속사가 잡아 오고도 남을 일정이었다.
‘아니… 어쨌든 이거 하는 동안에는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거니까 오히려 잘된 건가.’
약한 소리 할 시간 따위는 없어서 나는 후, 짧게 한숨을 삼키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차피 다 할 거니까 보상이라도 받고 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그중 몇 개는 정말 ‘와, 잘됐다.’ 정도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운 것들도 있었다.
‘영인이도 좋아하겠네. 자기 나라 홍보 대사까지 하게 됐으니.’
얼결에 향후 있을 굵직한 스케줄들을 스포일러 당한 셈이었으나 몇 개는 이미 알고 있던 거라서 크게 놀랍진 않았다.
‘그럼 이 중에 제일 빠른 게… 자선 행사인가…?’
이건 따로 언질받았던 게 없는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스케줄의 정체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잠깐만 집중해 주실래요? 공지할 게 하나 갑자기 생겨서요.”
지방의 캠페인 홍보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출발하기 전, 언제나와 같이 낡아 빠진 승합차 안에서 매니저가 주의를 끌었다.
“다음 주 금요일에 있는 자선 행사의 메인 스폰서 쪽에서 스페셜 게스트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는데요….”
‘이건가.’
해외 스케줄을 직전 주에 의뢰하다니 대체 어느 대책 없는 사람이 결정한 의뢰인지 궁금했다.
‘까여도 상관없다는 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브랜드이길래 유럽 최대 자선 행사라고 불리는 행사 메인 스폰서면서 이렇게 직전에 의뢰를 하는 거지?
나는 어쨌든 일이 들어온 건 좋지만 우리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불쾌함도 없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인 듯 마냥 기쁜 내색보다는 무례함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 스케줄을 이렇게 갑자기요?”
혜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매니저가 멤버들을 달래며 설명했다.
“음… 그게… 시간을 내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아요. 다들 첫 해외 스케줄인데 관광 일정도 없이 딱 일만 하고 바로 돌아와야 하는 거라서 아쉽긴 하겠지만….”
매니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다음 주인데 해외라고요?”
“…?”
그러자 매니저가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그렇게 갑자기 오라 가라예요?”
은찬이 이건 아닌 것 같다는 표정으로 항의하자 매니저의 얼굴이 굉장히 미묘해졌다. 좋은데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그 직후 매니저 입에서 나온 브랜드명을 들은 우리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다음 주에 시간을 내기로 마음먹어야 했다.
“C 브랜드요.”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규민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가야지.”
“아무래도….”
“가야겠네요.”
“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브랜드였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사랑하는 명품 브랜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왜 저희를 갑자기 불렀을까요?”
지원이 당황한 내색을 숨기지 못한 채 묻자 매니저가 대답했다.
“음… 저희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원래 저희 말고 출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한류 스타가 있었는데 갑자기 펑크가 나서 저희가 들어가게 된 건지, 아니면 그쪽 디렉터가 변덕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들어온 제의는 맞으니까요.”
덕분에 온 회사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멤버들 중 공식적으로 명품 브랜드의 뮤즈나 앰버서더로 활동하는 멤버는 없었다.
몇 번 잡지사와 콜라보해서 화보를 찍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초청을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하면… 브랜드 뮤즈 제안도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물론 당장은 김칫국 마시는 것 같긴 하지만.
이번에 가서 좋은 인상을 남기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터다. 일단 다들 비주얼이 괜찮으니까.
화제성도 좋고 아직 해외 활동은 한 번도 안 했는데도 벌써부터 유럽이든 아시아든 반응이 오고 있으니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도 돌고 하면 해외 시장도 꽉 잡을 수 있을 테고.
그쪽에서 바라는 게 장기적으로 활동할 브랜드 뮤즈라면 개인 계약을 할 것이고, 단기로 캠페인을 밀 생각이면 그룹 전체 계약으로 하겠지.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상황이었다.
‘그냥 미션으로만 봤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실제로 겪으니 별 주책맞은 생각을 다 하네.’
가수 활동과는 무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건 또 아니었던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 다음 주 스케줄이 어떻게 조정되는 건가요?”
한참을 브리핑을 들은 끝에 목요일 밤에 출발해서 금요일 스케줄 진행. 그리고 토요일 아침 비행기로 바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정해졌다.
상당한 강행군이었으나 불만을 품은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항상 돌심장 같았던 제현호도 기대가 되는 눈치였다.
“…….”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출발하기 거의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한 번씩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서는 괜히 케이스를 끼웠다 뺐다, 사진 부분을 펼쳤다가 다시 넣어 두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인 나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이 해외로 나가는 거 처음이야?”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제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렇게 설레 보였군. 그러나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릴 적,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을 따라서 해외여행에 다녀왔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식 스케줄로 나가서 활동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망생이나 연습생이 아니라 프로로서 나가는 건 처음이지.’
괜히 나까지 조금은 긴장되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다른 그룹들은 공항 갈 때 무슨 가방을 들고 가나, 뭘 입나 열심히 찾아보게 되었다.
‘대부분 협찬받은 브랜드로 입고 가는구나.’
우리는 아직 의류나 가방 쪽은 협찬이 들어온 게 없었다.
지금 한창 회사에서 계약 논의 중인 브랜드는 몇 개 있다고 알고 있는데 당장은 대부분 식품이나 은행, 카드와 같은 착용할 수 없는 제품들과의 협업을 진행해 왔었다.
‘그럼 일단 편하고 깔끔한 복장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마친 나는 마침내 출국 당일,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늦은 시간 공항에 도착했고.
“인수야--!!!!!”
생각지도 못한 인파에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