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쉬는 기분이 안 드네 (4)
“엄마야, 어머, 어머! 악…!”
딸랑, 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들린 풍경 소리에 놀란 비안이 찬장 위에 올려 둔 뭔가를 꺼내려다가 뒤로 넘어가면서 탕비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화들짝 놀라 탕비실 쪽으로 향하자 엉덩방아를 찧어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비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응, 아니, 아아…. 괜찮아…. 이거 멍들었겠네….”
한눈에 봐도 아주 정통으로 넘어진 것이, 엄청나게 아파 보였다.
“병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선배님이시지만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을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주는 것도 좀 그래서 머뭇거리자 비안이 정신을 차린 듯 스스로 벌떡 일어났다.
“그 정도는 아니야. 어휴,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도 자꾸 보기 흉한 모습만 보여 주네? 쭈그렁 이모님 같을 나이지만 나 일단은 아직 현역인데….”
현역이고 뭐고 너스레를 떠는 걸 보니 멀쩡한 듯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오느라 고생했어요. 응접실로 갈까요?”
비안의 안내를 받아 한 번 앉아 봤던 소파에 앉자 자기는 다시 탕비실로 들어가 쟁반 하나를 내왔다.
다 부서진 고급 다과와 제일 기본으로 비치해 두는 둥글레차의 조화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이상했지만 얻어먹으러 온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찻잔을 집어 들자 겨우 차분해진 비안이 내 맞은편에 앉아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 후배님이 무슨 일이 있어서 나랑 보자고 했을까요?”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눈빛에 힘이 실려 있는 것이 조금 전처럼 실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음…...”
우선 다른 이야기부터 하자. 나는 지난번 민형을 봤을 때 생각났던 것부터 물었다.
“민형이랑은 많이 친하신가 봐요? 저번에도 같이 계셨었고….”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비안이 짧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아! 그래 보여요? 내가 일방적으로 친한 척하는 것에 가까울 텐데. 민형이 어렸을 때 아이돌 해 보라고 추천한 게 나였거든요.”
그냥 단순히 마선경을 통해 밀키즈 멤버들과 알게 된 거로만 예상했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안과 제일 먼저 업계 선배이자 멘토로 만났고, 민형에게 이전까지 속해 있던 소속사와 마선경을 소개해 준 것이 비안이었다.
“C 본부에서 그 영재들 나와서 장기자랑 하는 프로그램 있던 거 기억나죠?”
“기억나요. 재능대발견이었던가 오후 늦게 나오던 거요.”
“응, 그거. 민형이가 거기 나왔었어요. 내가 게스트였고.”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많았다. 단순히 업계 선배로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연결해 준 사람치고는… 좀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나.
지난번 느닷없이 여기저기 놀러 끌려다녔을 때 보니 거의 뭐 친누나나 이모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던데.
나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로 하나 더 물었다.
“저 말이 나온 김에… 여쭙는 건데요. 민형이 원래 소속사에서 데뷔하기로 되어 있던 거 아닌가요? 겟데뷔에서 너무 갑자기 하차해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하이점프 이적을 고민 중이라고 해서 놀랐거든요.”
가까운 친구를 걱정하는 것처럼 시선을 내리깐 채 한숨을 몇 번씩 삼키며 묻지 비안이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닫았다.
뭐, 얼마나 대단한 사연이 있다고 고민하는 거지. 의구심이 커져 가던 그때 비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좀 사정이 복잡한데. 민형이한테 따로 직접 들은 건 없는 거죠?”
여기에 그냥 그렇다고만 대답하면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친구한테서 민형이가 하이점프 데뷔조 합류를 고민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제 친구 중에, 하이점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녀석이 있어서….”
내가 부러 비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꼬리를 흐리자 비안이 잔뜩 집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있어서요?”
“거기 안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제가 말렸어요. 솔직히 민형이랑… 겟데뷔 촬영 당시에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요.”
그러고는 멋쩍은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같이 팀으로 미션 준비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 녀석인지 아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그 순간, 비안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긍정적이나 부정적이냐를 따지자면 전자인 느낌으로.
“어쩜…! 그래서 민형이가 갑자기 안 간다고 했던 거구나! 어떡해. 너무 감동적이다. 나 진짜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그냥 민형이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안 간다고 했다가 천만다행이었던 건 줄로만 알았지.”
비안의 초롱초롱한 감격에 찬 눈빛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으나 내게는 득이 된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직접 들은 것 없는 남인 것보다, 실제로도 민형에게 도움이 됐고, 진심으로 놈을 걱정하는 친구인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을 테니까.
“난 또~ 둘이 마침 나이도 같겠다, 친구 사이로 가깝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자리 만들어 줬던 건데 내가 나설 필요도 없는 거였네?”
뒤에 덧붙인 쓸데없는 말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당장은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겨우 진정한 비안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민형이가 많이 걱정되는 건 알겠어요.”
그러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했다.
“근데 아무래도, 이게 좀 개인적이고 복잡한 얘기다 보니까, 민형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민형이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얘기면 그걸 내가 전하는 것도 좀 그렇고, 아니더라도 본인 입으로 직접 듣는 게 서로 뒤탈 없고 깔끔하잖아?”
결과적으로 말 못 해 준다는 얘기를 빙빙 돌려서 들은 셈이라 약간의 탈력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거기다 대고 아니라고 박박 우겨서 말해 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부탁하게 비안이 굉장히 기특한 뭔가를 보는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중에 시간 될 때 직접 물어봐요.”
그 후 아주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 비안이 다시 불쑥 입을 열었다.
“나랑 만나고 싶었던 용건은 그게 끝인가요? 아니면….”
미처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비안이 다시금 불쑥 치고 들어왔다.
“인수 씨도 뭔가 고민이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있다고 말해야 뭐든 본전을 건져서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친모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에는 너무 일렀다.
비안이 민형을 가상히 여겨 도와주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가상함이 내게도 적용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유 대표랑 했던 대화를 생각하면 나도 어쨌든 후배로서 딱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긴 하던데.’
아직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선배로 여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 최대한 이쪽의 밑천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가는 게 좋겠지.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고 대답했다.
“저희가 최근에 감사한 기회가 돼서 저희 팬 콘서트 하기 전에 다른 선배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할 기회가 있었, 잖아요…?”
슬쩍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며 손끝을 만지작거리자 비안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죠? 현찬 씨였나? 그 블랙온에….”
“네네, 콜라보 무대랑, 저희 개인 무대랑 해서 3일 동안 게스트로 출연했었는데 그때….”
나는 일부러 한 박자 느릿하게 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 불미스러운 일이요?”
생각도 못 한 말이었는지 비안의 눈빛이 일순 어지럽게 흔들렸다.
“네. 사고가 잦았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는 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현찬 선배님이 저희를 견제하시는 게 느껴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견제요? 하지만….”
비안이 반박하려 하자 나는 건방지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이 끝나기 전에 대답했다.
“그죠. 저희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저희 쪽으로 출연을 요청해 주신 건 선배님인데, 계속 일부러 실수를 유도하거나, 위치 표시 마크가 사라져 있거나, 스태프가 안내를 잘못해 주거나 그런 일이 너무 반복되니까 다들 의아해하더라고요.”
비안이 말을 끝까지 들어 보더니 여전히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로 물었다.
“뭔가 오해가 있던 건 아니고요? 콘서트 집행 팀이나 관리 팀에 문제가 있거나 경력자가 없으면 그럴 수 있긴 하거든요.”
만약의 가능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는 듯한 비안에게 나는 다시금 꽤기를 박았다.
“아뇨. 현찬 선배님 무대에서는 아무런 실수도 없었는데 저희한테만요. 3일 내내 치명적인 실수를 유발할 수 있었던 사고가 매일 최소 세 건 이상 있었다고 하면 믿어지시겠어요? 저희보다 무대가 훨씬 더 많은 현찬 선배님 무대는 차질 없이 리허설 그대로 진행됐는데?”
비안이 확실히 수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요. 하지만 정작 콘서트에 부른 사람은 현찬 씨일 테고…. 현찬 씨 태도에 뭐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여기서는 딱 절반만 알려 주자, 나는 슬쩍 중요한 단서를 흘렸다.
“가끔씩 굉장히 불안해 보이셨어요. 뭔가에 협박이라도 당하고 계시나 싶을 만큼….”
“저런….”
“그래서 선배님께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실까 싶어서…. 저희는 이제 다 신인이라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응접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찻잔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버린 후였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미심장하게 포문을 열었던 것에 비해 큰 소득은 없었다.
‘흠… 저도 한번 제대로 알아보기는 할게요.’
나는 현찬의 수상쩍은 행동이 우리 회사에 대한 원한인지 아니면 인기 그룹에 대한 견제인지 모르겠다고만 얘기했고, 비안은 비안대로 한번 알아봐 주겠다고만 했을 뿐 확실하게 말해 준 건 없었다.
콘서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잠시, 얼추 서로 할 말을 끝낸 우리는 살짝 어색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일단 이쯤에서 물러가야 하는 건가… 생각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현찬 이야기를 꺼내고 줄곧 뭔가 생각하는 듯했던 비안이 불쑥 제안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녁 먹고 갈래요? 조금 이따 매니저 오는데 같이 밥 먹고 가요. 내가 사 줄게요.”
갑자기요?
“괜찮으실까요? 매니저님이 불편하실 수도 있고….”
“괜찮아요. 정말 중요한 일정 있고 한 게 아니라면. 먹고 가요.”
비로소 뭐라도 이야기를 해 주려는 건지. 나는 얌전히 소파에 다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