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142화 (142/224)

#142. 분명 휴가일 텐데 (2)

‘일단 비안을 만나 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대화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면 비안은 유 대표에게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유 대표에게 관련된 일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바로바로 공유할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애증이 섞인 뉘앙스라고나 할까.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고 오랜 인연이라 서로 잘 아는 만큼 앙금도 남아 있는….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둘만 알 일이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 대표 때문에 데뷔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고 하는 걸 보니 원망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쨌든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맞으니까.’

촬영 중에 시시때때로 와서 긍정적인 참견을 했던 것도 그렇고. 나를 유 대표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 바운더리 안에 넣어 주기라도 한 걸까.

내 예측이 맞든 틀리든 겟데뷔 출신 ‘서인수’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그럼 뭐라고 연락을 해야….’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메모장을 켜 비안에게 전송할 메시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비안 선배님. 엔카운터 서인수입니다. 그간 겟데뷔 촬영 중 여러모로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편하신 때에 사무실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보낼지 말지 30분쯤 고민한 끝에 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후 회신이 왔다.

[안녕 인수 씨^^ 겟데뷔 끝나고 통 얼굴 볼 일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마워요~ 활동 바쁠 텐데 무리하는 거 아니죠? 내가 뭐 많이 해 준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해지네~]

외모만 보면 20대 후반이라도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동안이신데.

문자 메시지의 말투는 영락없는 웃어른이었다.

나는 재빨리 답신을 보냈다.

[한 번은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ㅎㅎ. 이제야 휴가를 받아서 연락드리네요. 혹시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으로 편하신 시간 있으실까요?]

몇 번 더 메시지를 주고받은 끝에 사흘 후 오후 2시에 지금 비안이 몸담고 있는 소속사 사무실로 찾아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괜히 어중간하게 편한 장소에서 보자고 했다가 말도 안 되는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예 남들 다 지나다니는 장소에서 인증 샷이라도 찍어서 SNS에 올리기까지 하면 더욱 부정한 일은 없었다는 증거가 되어 줄 테고.

‘내가 뭐 이적을 경계할 만한 상황도 아니니….’

기존에 계약한 소속사가 있었다면 저거 비안네 회사로 갈아타려고 슬슬 밑밥 까는 거 아니냐 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임시 소속사 말고 본소속사가 없는 만큼 어느 회사 사람이랑 만나든 문제 될 만한 건 없었다.

‘본격적으로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내가 어디로 갈지 주목하겠지.’

당장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그럼 이제 해야 할 건….’

키워드와 관련된 단서를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며 어디를 또 캐 볼 수 있을지 생각하는데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

집에 지금 나랑 현호밖에 없을 텐데. 문을 열자 바로 그 현호가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오늘 저녁은 뭐 먹을 거예요?”

아. 그렇지, 참. 멤버들 대부분이 일주일 내내 숙소를 비울 예정이기에 휴가가 시작되기 전날 냉장고를 싹 한번 청소할 겸 비운 상태였다.

“아.”

그러고 보니 진짜 숙소에 먹을 거라곤 라면밖에 없네. 일주일 내내 라면만 먹고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장을 좀 봐 오든 배달을 시키든 해야 했다.

‘휴가 직전에 매일매일 시켜 먹기만 하는 바람에 이제 웬만한 건 물렸는데.’

마땅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떠오르는 것도 없던 찰나 갑자기 웬 미션 창 하나가 나타났다.

[서브 리퀘스트 미션 ▷ 먹방 초심자]

[예상 수령 보상]

[▷코인 1개]

[▷뻐꾸기 단계 0.5단계 하락 조정]

요즘 좀 잠잠하다 했다. 쉬는 김에 이것저것 좀 맛있는 거 좀 먹어 보라고 등 떠미는 건가.

체중 관리가 숙명이나 다름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마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심경이 복잡했다.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니까 수락하자.’

흔쾌히 ‘예’ 버튼을 누른 나는 곧, 미션을 의뢰한 사람이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나한테 먹이고 싶다는 게 아니었어?’

먹방 초심자, 라는 제목에서 ‘초심자’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며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등장인물 ‘제현호’에게 아래 품목을 먹게 할 것]

[- 예쁜 이모네 즉떡 밀떡볶이]

[- the fiesta 유기농 밀크 아이스크림]

[- MJ부띠끄 페이스트리]

[- ……]

[- ……]

[- ……]

[- 뒷심 돼지구이 3종 세트]

[- 올리브트리 계절 과일 생크림 케이크]

[잔여 제한 시간: 143:59:59]

‘이게 뭐냐.’

구체적으로 가게까지 지정되어 있어서는 거기가 대체 어딘데? 눈이 빙글 돌았다.

“잠깐만. 조금 이따 같이 먹으러 나갈래? 숙소에 두고 휴가 동안 먹을 것도 좀 장 봐 오고.”

현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사이 나는 재빨리 포털창에 가게 이름을 몇 개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숙소 근처에서 영업을 하는 가게들이었다.

‘그럼 코스를…… 떡볶이집에서 밥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은 다음 빵집을 들르면 되나….’

리스트가 10개 이상이나 되어서 이걸 대체 언제 먹이라는 거냐 놀라기도 잠시 6일이나 되는 넉넉한 제한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일단 하루에 세 끼는 먹으니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문제는 현호가 음식 도장 깨기를 하는 내내 내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이것도 먹어 봐, 저것도 먹어 봐 챙겨 줘야 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

무슨 이 나이에 유치원 선생님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다 큰 놈 먹이는 것까지 챙겨야 하냐.

어이가 없었으나 그래, 애 맛있는 거 잔뜩 먹이는 거로 뻐꾸기 단계도 하향시켜 주고 코인도 준다는데 못 할 게 뭐가 있나,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가게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으로 즉떡 어때?”

설마 거절하겠어? 그동안 뭘 해도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의 일이라면 고개를 끄덕여 왔던 녀석이었기에 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지정하고 현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즉떡이요? 음… 그냥 따로 먹을까요?”

“응?”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형 뭐 드시는지 보고 맛있을 것 같으면 같이 시키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저 즉떡 별로 안 좋아해서요. 맛있게 드세요. 저는 따로 라면 끓여 먹을게요.”

그리곤 총총 주방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나는 벙찐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안 먹겠다고 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설마 다른 것도 다 안 먹는 것들인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겨우겨우 빵과 아이스크림만을 성공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앞으로 남은 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오늘 하루 어떻게든 최대한 먹여 보겠다고 애를 쓰다가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을 떠올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아? 나 혼자 먹을 거만 사 오기 좀 그런데. 네 것까지 같이 사 올까?’

어떻게 해야 최대한 부담 주지 않고 먹일 수 있을까. 이런저런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이게 패턴이 반복되니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내가 만날 가족이 없어서 숙소에 남은 애 불쌍해서 챙겨 주는 것 같잖아.’

솔직히 현호의 처지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현호를 더 동정하거나 특별 대접할 생각은 없었다. 개인사는 개인사고, 일은 일이지. 개인적으로 잘됐으면 좋겠다고 응원할 이유는 되겠지만 팀 내에서 누군가를 편애해도 될 만한 사유는 아니었다.

‘단순히 사연이 기구하고 불쌍한 거로만 따지자면 다른 녀석들도 못지않을 거고.’

모두가 다 처지를 알게 된 지원은 차치하고 은찬도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은근히 집안 사정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하연이네 집에서 며칠 있을 거라고 했었나.’

가족이랑 의절을 한 건 또 아닌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캐물을 만한 일은 또 아니라서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현호가 괜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쭙잖게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만큼 최악의 오해도 없었다. 현호가 지금 팀 내에서 나를 비교적 잘 따르고 있긴 하지만 그건 겟데뷔 초반에 흔들렸던 걸 설득해 줘서 그런거고.

우리가 딱히 막 형님 동생 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

‘뭔데 이렇게 참견하냐고 기분 나빠해도 할 말 없는 상황 아닌가 이거.’

그리고 정말 나의 걱정대로, 12개나 되는 리스트의 겨우 네 개쯤 성공시킨 시점에서 녀석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

겨우 이틀째밖에 안 된 시점에서 벌써 여섯 번째 메뉴 거절을 당한 나는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에 힐끔 시선을 피했다.

“형도 아시죠. 어제부터 좀 이상한 거. 저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예의상 형이라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 주고 있긴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짜증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냉정하게 말해서 감사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감사 인사가 아니라 사실상 경고 같은 말투였다. 주제넘은 동정심으로 남의 신경 건드리는 짓 좀 그만하라는.

“아니, 뭐…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혼자 먹는 것보다는 둘이 같이 먹는 게 낫잖아. 다 맛집으로 유명한 곳들인데….”

그러자 현호가 꽤나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형이 언제부터 그렇게 식단에 도움 안 되는 걸 좋아하셨다고요? 다 제가 못 먹어 봤을 거 같으니까 먹어 보라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내 의도는 그게 전혀 아니었는데. 리퀘스트를 넣은 독자의 의도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다른 애들 있을 때는 시켜 먹기 좀 그렇잖아. 숙소도 조용한 김에….”

“아뇨, 괜찮아요. 제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명백한 거절 신호였다.

‘이제 어떡하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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