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무엇을 하고 싶은지 (1)
인연의 오랜 설득으로 인형 공구를 하게 된 인덕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절차와 방식을 줄줄 꿰고 있었다.
‘다음 달 초에 샘플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그럼 그때 맞춰서 공구 신청받으면 될까요?’
어림도 없는 소리. 인덕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예상하는 것보다 한 달은 더 밀린다고 생각하시는 게 나아요. 이때 지금 연휴 껴 있잖아요. 공장도 이즈음 해서 다 휴가라서 연락 안 받을 거거든요.’
차근차근 업체 선정부터 공구용 계정 관리까지, 결국엔 하나하나 인덕의 손이 안 들어간 게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인연도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홍보와 도안까지 많은 일을 해 주고 있긴 하지만 경력자인 인덕의 품이 많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희 이제 1차 샘플 나왔으니까 공구 신청받아도 될 것 같은데….’
그리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입금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
인덕은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여기저기 온갖 공구부터 모금까지 진행해 온 덕분에 인덕의 계좌는 여기저기 무슨 공공재처럼 퍼져 있었다.
개인이 중고 거래용으로 사용하는 정도는 크게 지장이 없겠지만.
이렇게 대형 팬덤의 적지 않은 수의 공구를 진행하는 계좌로 사용했다가는….
‘100% 알아보는 사람 있겠지.’
사실 공방 뛰고 쇼케이스에 콘서트에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얼굴 팔린 지 오래니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음알음 ‘승재 팠던 그 네임드가 엔카운터 오프 행사에 보인다더라.’ 얘기가 도는 것과 계좌로 변명도 할 수 없게 박제되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얼굴이나 인상착의가 비슷한 것뿐이라고 발뺌이라도 할 수 있지. 계좌는 너무 확실한 개인 정보잖아.’
그렇다고 공구용으로 새로 계좌를 만들자니 대포 통장 문제로 이용 제한을 푸는 것도 일이라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었다.
‘참, 입금 계좌는 인연 님이 관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혹시나 하고 한 질문에 인연은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으나 얼결에 계좌를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 주다 과거의 이력을 줄줄 불어 버리고 말았다.
‘대박! 저 그때 공론화 글 본 거 같아요. 우와, 그때 저 중학생이었는데…!’
얼결에 인연과의 연식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면서 다시금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인덕의 집에 아직도 구 본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 버린 것이다.
‘그거 진짜 언제 한번 싹 집 청소하면서 버려야 하는데. 어디서 계속 튀어나와요.’
‘엇, 제 친구 중에 아직 그 그룹 파는 애 있는데, 한번 필요한지 물어볼까요?’
아직도 그 판에 사람이 남아 있다니. 하지만 유산들이 몇 개나마 좋은 주인을 찾아갈 수 있다면 인덕으로서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인덕은 흔쾌히 자신의 유산을 나눔 하겠다 선언했으나… 하루 종일 할 게 없는 날백수도 아니고, 일정 잡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갑자기 또 일이 잘돼서 출장 일정에 일거리도 대폭 늘어난 상태였기에 난이도가 더욱 높았다.
그래서 최대한 서로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만날 수 있는 날을 잡는다는 게….
‘쇼케 당연히 오실 거죠?’
말을 꺼낸 인덕에게 안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가실 거죠?’가 아닌 ‘오실 거죠?’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 모두 자리가 없으면 지붕 위에 올라 숨어서라도 들어갈 기세였다. 다행히 하루 종일 밀리초의 가호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매달린 끝에 둘 다 예매에 성공.
인덕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가방 안에 카메라 대신 구본진의 앨범과 굿즈를 밀매라도 하듯 숨겼다.
“와, 저 집 뒤지면서 진짜 뭐가 계속 나와서 나중에는 무서웠다니까요.”
좋아한 시절이 길었던 만큼 집에 알게 모르게 꿍쳐 두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최애도 아닌 멤버의 굿즈가 이렇게 있을 정도니 승재의 굿즈는 오죽 많이 모았을까.
인덕은 산처럼 쌓였던 화형의 제단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좋아했던 걸 말 못 하게 만드는 놈들은 옥상에서 밀어 버려야 해요.”
그런 인덕을 위로한답시고 인연이 결연한 표정으로 외친 한마디가 인덕의 심장을 더욱 세게 후벼팠다.
“괜찮아요. 저는 그냥 그놈이 제값대로 형량 받고 평생 감옥에서 썩는 게 옥상에서 미는 것보다 좋아요.”
그놈 때문에 날린 시간이 몇 년인데 범죄자까지 되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이번만큼은 그런 논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수를 잡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뭐… 실제 사람 속은 열 길 물속을 알아도 모를 일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인터뷰나 취했을 때의 모습이나 각종 예능 등에서 보이는 면모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게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모습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놈들이 뒤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인수는 최소한 무엇이 화면에 나와도 되는지, 그리고 팬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파악할 줄 알았다.
‘역시 조용한 효자가 최고야.’
다른 멤버들처럼 왁자지껄하게 웃겨 주거나 화려한 언변으로 나서지는 않더라도.
묵묵하게 육각형 센터이자 리더 겸 메인 보컬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벌룬만 봐도 그래. 안전 제일주의가 최고야.’
물론 버블로 가슴 두근거리는 연애 감정을 채워 주기는커녕 거리감이 느껴지는 데다, 하루 종일 일거수일투족을 브이로그처럼 공유해 주는 타입과도 결이 달라 화제성이나 인기에 비해 벌룬으로 주목받는 편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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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수] 오늘 연습 갈 때 입은 착장이에요. 오후 5:35
[서인수] (사진) 오후 5:35
[서인수] (사진) 오후 5:35
[서인수] 모자는 영인이가 빌려줬어요. 오후 5:36
[서인수] 제 취향은 아니라서 사진 찍고 바로 돌려줬습니다. 오후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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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수] 혹시 짧게 듣고 싶은 곡 있으세요? 오후 11:51
[서인수] 라방 켜기엔 좀 늦은 시간 같아서… 오후 11:52
[서인수] (음성) 오후 11:59
[서인수] (음성) 오전 12:12
[서인수] (음성) 오전 12:20
[서인수] 연습생 시절에 불러 봤던 거 위주로ㅎㅎ. 오전 12:21
[서인수] 얼른 연습실에서 나와야 해서 녹음을 몇 개 못 했네요. 오전 12:22
[서인수] 다음에 또 기회 되면 신청곡 받을게요. 오전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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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룬으로 알림창을 도배해 준다거나, 마치 친구랑 대화하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해 주는 멤버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메시지 하나를 보낼 때마다 마침표를 찍는 그 꼼꼼함까지도 묘하게 서인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는 것 같아 좋았다.
비록 인덕이 보낸 메시지창은 일방적이고 처참한 외침들로 가득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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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인수야 오늘 아침은 뭐 먹었어? 오전 11:02
[나] 인수야 오늘 날씨 춥대 스케줄 갈 때 든든히 입어 오전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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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별 열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후 11:58
[나]☆★☆★☆★이별열차☆★☆★☆★☆★ 오후 11:59
[나] 오마이갓리틀꾀꼬리이즈히얼ㅠㅠㅠㅠㅠㅠㅠ 오후 11:59
[나]@@@@@@이별 열차 삽니다 선제@@@@@@ 오전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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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이 잠시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행복으로 정화하는 사이 인덕이 추가로 건네준 덤들을 정리한 인연이 불쑥 물었다.
“이제 다음 달에 팬콘 날 되면 새 굿즈로 빈자리를 채우시겠네요?”
그제야 인덕은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맞다, 팬콘. 그 중요한 게 있었지.
“멤버들 진짜 힘들겠어요…. 이번에 미니 앨범 발매하고 활동하는 것만 해도 바쁠 텐데….”
그렇다고 팬콘 일정을 미루기에는 계약된 활동 기간이 짧아서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덕도 알았다.
‘모쪼록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건강 해치는 일만 없길.’
인수야 뭐 알아서 워낙에 잘하는 편이니 걱정할 게 없다지만.
가끔은 역시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내가 지금 연예인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나나 공구 일정이랑 출장 안 겹치게 잘해야 하긴 하는데.’
인덕이 인수를 좋아하는 데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스스로를 가는 것보다는 당연히 서인수라는 사람이 오래오래 즐겁게 활동하는 것이 좋았다.
‘나도 많이 변하긴 했다.’
한창 승재를 좋아했던 시절만 해도 뒤에 가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벽해야 한다! 널 응원하는 날 부끄럽게 만들지 마라! 무대만큼은 누구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게 네 존재 가치를 실력으로 증명해라! 뭐 이런 말도 농담이랍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는데.
승재로 인해 워낙 크게 뒤통수를 맞은 탓일까. 아이돌 서인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 서인수가 문득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 서인수는 핸드폰 화면만 노려보며 시계의 시침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 됐다. 11시!”
영인의 외침에 나는 화들짝 놀라 보고 있던 화면을 새로 고침 했다.
제발! 제발!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스크롤을 내리자 마침내 실시간 차트의 1위가 익숙한 커버로 바뀌어 있었다.
“하, 드디어….”
내가 무심코 입 밖으로 결과를 말해 버리자 옆에 툭, 누군가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헉, 은찬이 형 쓰러졌다!”
그동안 내내 무표정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으면서 내심 계속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지 은찬이 긴장이 풀린 듯 차창에 머리를 박았다.
쇼케이스가 끝난 직후. 공연을 하는 내내 그래서 음원 순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마조마했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쉽게도 트리플 킬이 아니었다.
‘앗….’
물론 신인 남자 아이돌의 성적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좋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데뷔 싱글 때보다 순위가 조금 낮았다.
‘그래도 10위 안에 들긴 했는데….’
그리고 제일 먼저 타격을 입은 건 정은찬이었다.
‘그럴 만하지. 본인이 대형 사고를 쳤으니.’
데뷔 때 워낙 큰 주목을 받아서 우리가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기록을 세웠던 것도 있겠으나 유출의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해.’
순위를 확인한 은찬이 조용히 멤버들에게 사과했다. 싸늘한 정적이 흐르기도 잠시 혜성이 빠르게 분위기를 수습했다.
‘근데 왜 사과하는 거야? 우리 성적 대박인 거 아냐? 진입 한 자릿수인데?’
다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귓가에 뻔히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