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보다 중요한 건 (1)
문밖으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가자 바람이 찼다. 벌써 가을이니까 그럴 만도 한가. 으슬으슬하니 너무 오래 있다가는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는 온도였다.
‘내려가서 옷 좀 가져올까.’
잠깐 고민한 사이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늦었네.’
잠깐 참아 보지, 뭐. 어깨를 으쓱이며 난간에 살짝 기대서자 우물쭈물한 표정의 혜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와 함께 혜성의 손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혜성은 이번에도 기대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엇.”
혜성의 손에 들려 있는 후드 집업을 보고 반응하자 혜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안 들고 간 것 같아서. 나오기 전에 날씨 어플 보니까 꽤 쌀쌀하더라고.”
“감사합니다.”
“이거 가지고 뭘. 그렇게 깍듯하게 인사 안 해도 돼.”
얼결에 캔 하나와 옷을 맞바꾼 꼴이 되자 혜성이 잠시 고민하다가 캔을 받았다.
“아, 나 잘 못 마시는데…. 우리 내일 연습도 있고….”
그래 봤자 작은 거 한 캔이었다. 저거 마시고 바로 어디 나가는 것도 아니고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날 텐데, 정말 한 모금도 못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약해요? 그럼 저 혼자 마실게요.”
컨디션이 평소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어제 생일이었으면 좀 봐주지 않으려나.
답지 않게 불량아다운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혜성이 결심한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캔을 땄다.
“그, 엄청 못 마시진 않아! 그냥 맛만 볼게, 맛만.”
결국 마실 거면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을 축였다.
“형, 요즘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바람도 차겠다 오래 있어 봐야 별로 좋을 게 없어 곧장 직구를 던지자 캔 입구를 입술에 막 가져다 댄 혜성이 콜록 기침을 연발하며 바닥을 더럽혔다.
“켁, 콜록, 쿡, 우욱…!”
“아니, 그렇게 놀래키려던 건 아니었는데.”
황급히 손에 쥐고 있던 캔을 난간 위에 올려 두고 혜성이 마시던 캔을 받아 주자 혜성이 허둥거리며 주머니 속 물티슈로 엉망이 된 얼굴과 옷을 수습했다.
“그런 거 아냐! 정말 진짜 잠을 설쳐서 그래.”
그렇게 잡아떼겠다 이거지. 나는 내친김에 말을 꺼냈다.
“왜요? 그 방에 혹시 코 고는 놈 있어요? 방 바꿔 드려요?”
이쪽에서 지나친 친절을 베풀려고 하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거절하는 성격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아냐, 아냐, 아냐, 그냥 내 문제야! 애들이 막 시끄럽게 굴거나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니까 정말 신경 쓰지 마.”
“그러니까 그 형의 문제가 뭔데요. 요즘 무슨 고민 있으세요?”
더는 도망갈 곳도 없게 몰아붙이자 혜성이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눈을 굴렸다.
“으음…. 그냥 피로 누적이 아닐까 싶은데….”
좋은 말로 할 때는 얘기 안 하겠다 이거지. 팀에 의존하거나 폐 끼치는 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이렇게 너무 숨기려고 하는 것도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결국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살다 보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니까. 더구나 단체 생활을 하고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는 사이라면 말하고 싶지 않더라도 리스크를 공유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냥은 말 못 해 주시겠다는 거죠?”
나는 침착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문을 막아섰다.
“그럼 여기서 계속 있죠. 이제 날도 안 더운데 선선하고 좋네요.”
그러고는 시위라도 하듯 버티자 꼭 내가 코 묻은 호주머니를 터는 양아치라도 된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게 정적 속에 얼마나 더 버텼을까, 혜성이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더니 내가 난간 위에 올려 두었던 캔을 남김없이 비웠다.
“……?”
뭐지? 저거 다 마시고 나랑 진짜로 붙어 보겠다는 건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원샷에 당황하기도 잠시.
혜성이 굳을 결심을 한 표정으로 외쳤다.
“비, 비켜 줘!”
그러고는 나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해 손잡이를 움켜쥐고 당겼다.
‘이 뭐….’
당연히 턱도 없었다. 아무리 혜성이 무거운 가방으로 단련되어 있다곤 하나 일단 키 차이도 차이고, 나도 완력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
한 3분쯤 더 나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쓴 혜성은 곧 포기하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힘으로 저 못 이기실걸요.”
객관적으로 팀에서 날 확실히 이길만한 건 표영인, 박하연, 제현호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덩치가 있고 아이돌이 아니라 운동선수를 했어도 두각을 드러냈을 녀석들.
이규민 정도는 비등비등할 것 같은데. 어쨌든 그 넷을 제외한 나머지는 내가 확실하게 이길 수 있었다.
“…….”
결국 안간힘을 써도 나를 못 이긴다는 것을 체감한 혜성이 이번엔 다른 작전을 썼다.
“진짜 이러기야? 나 오늘 생일이었는데?”
이른바 동정심 유발 작전이었다.
“생일인 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에요. 저는 오히려 형 생일인 거 감안해서라도 무슨 고민을 갖고 계신 건지 꼭 듣고 가야겠어요. 저희 그냥 남 아니고 한 팀이잖아요.”
내가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또박또박 읊자 혜성이 한 번 더 무력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결과는 턱도 없었지만.
“형, 여기서 저랑 밤새우실 거예요?”
여차하면 숙소에서 잠들어 있는 멤버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매니저 찬스를 쓸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늦은 만큼 혜성의 성격에 그렇게는 못 할 터다. 잠든 사람보고 이런 일로 구해 주러 와 달라고 SOS 치는 것만큼 민폐가 또 있겠냐.
혜성도 그걸 아는지 그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흘끔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혜성이 패배 선언을 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 그냥 내가 한심해서 그래.”
“뭐가요?”
우리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딱히 주혜성이 사고 쳐서 큰일 날 뻔한 적 없지 않았나.
제일 큰 사건이 있었던 지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컨디션이 돌아왔는데 왜 아무 일도 없었던 혜성이 흔들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혜성을 빤히 내려다보자 혜성이 멋쩍게 대답했다.
“그냥… 내가 너무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서. 다른 멤버들은 각자 롤도 확고하고 팬층도 든든하고, 잘하는 것도 확실한데….”
그러고는 목이 메기라도 한지 꾹 숨을 눌러 쉬고는 덧붙였다.
“나 많이 한심하지?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팀 중에 누가 주혜성을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고.
겟데뷔 초반만 해도 눈이 남들 머리 꼭대기 한참 위에 달려 있었던 제현호도 그렇게는 생각한 적 없을 터였다.
물론 멤버들 중에서 가장 기준이 까다로운 은찬도.
“왜 아무도 형한테 뭐라고 한 적 없는데 혼자 땅굴을 파고 있어요. 솔직히 형 덕분에 저희 사고 칠 뻔한 거 수습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형이 저희를 캐리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위로차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대답하자 혜성이 당장이라도 쓰게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
설마 내가 모르는 팀 내 불화가 있었나? 순간 아차 하는 마음에 눈썹이 움찔거렸다.
“오늘 내 생일 축하 겸하는 라이브였잖아. 공지 올라가고 바로 댓글 달린 걸 봐 버렸거든.”
그제야 나는 뭐 때문에 혜성이 멘탈이 무너진 건지 알 것 같았다.
‘거기도 아마 관리 팀에서 시간 되는 대로 댓글 관리를 해 주시긴 했을 텐데.’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보니 24시간 밀착 필터링은 어려웠을 것이다.
“왜 하필 내 생일이 겹쳤냐고, 관심도 없는 멤버 메인으로 나오는 거 지루하다고 뭐라 하는 댓글을 보니까 머리가 잠깐 멍, 해지더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선뜻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팀 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멤버가 나라는 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기에.
그런 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말해 봤자 본인은 그럴 일 없으니 할 수 있는 뻔한 말처럼 들릴 게 분명했다.
“이번에, 우리 자컨 공개된 것도 그렇고. 나도 이런 거 분석하고 의식하고 그러는 거 의미 없다는 거 아는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거야. 내가 정말 다른 멤버들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탈락했어야 하는데 운 좋게 살아남아서 다른 멤버들한테 피해나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
사실 언제고 한번은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싶었던 지점이었다.
굳이 서바이벌로 데뷔한 사이가 아니어도, 같은 연습생 시절에는 비슷비슷한 대우, 혹은 더 유망주 대우를 받았는데 데뷔 이후 대중의 평가가 갈리면서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없는 팀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나.
거기서 시작된 멤버 간 불화로 결국 팀이 산산조각 나는 일도 적지 않고.
나는 올 게 왔다는 심정이었다.
‘왜냐면… 이번 자컨만 해도….’
유튜브처럼 무료로 공개된 영상이 아닌데도 회차별로 조회 수 및 순위 편차가 너무 컸다.
매 회차마다 그 주의 시청자 순위 20위를 꼬박꼬박 넘기긴 했는데, 멤버별로 각자 순위가 달랐다.
아무래도 내가 첫 회이기도 하고 제일 인기가 많다 보니 1위로 스타트를 끊어서 더 의식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다음 타자였던 하연이 6위, 현호가 10위, 나머지 멤버들이 고만고만하게 15위 전후를 기록했다.
규민이 웃긴 걸로 대히트를 쳐서, 그리고 영인이 광고를 겸해서 찍은 화보가 역대급으로 잘 나온 걸로 유명해서 2위를 두 번 찍은 것 말고 특이할 만한 이변은 없었다.
‘그 와중에 본인만 아슬아슬하게 20위를 찍었으니 신경 쓰일 만도 한가.’
하지만 그건 출연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순서의 문제도 컸다. 뒤로 갈수록 관심이 사그러드는 건 당연한 거니까.
혜성도 앞 순서를 배정받았다면 15위 이내에 들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자컨은… 촬영 협조해 주신 업체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주셨는지도 영향이 컸고요. 공개 순서도 영향이 있었다고 봐요. 뒤로 갈수록 이용자 수 떨어지는 건 사실이잖아요.”
객관적인 사실만 말해 준다고 나름 문장을 고른 건데, 혜성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냐. 그냥 내가, 그만큼 화제성이 떨어진 것뿐이니까…. 영인이만 봐도 순위 잘 나왔잖아.”
그러니까 그건 예외라고요. 말 한두 마디로 설득이 안 될 상태라는 건 잘 알았다. 그러니 하나하나 눈으로 보여 줘야 겨우 통할 듯싶었다.
나는 별수 없이 혜성을 가로막고 있던 자세를 풀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직접 보여 주고 납득시키는 수밖에.
“형, 이쪽으로 와 보세요.”
슬금슬금 다가온 헤성이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듯 눈알을 돌리는 것이 보여 곧장 제지했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것 좀 보세요.”
“으응….”
나는 대뜸 영인이 출연한 영상을 틀어 혜성 앞에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