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없다니까요 (3)
“형, 어디 아파요? 아까부터 안색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그러고는 혹시 열이 있나 싶어 이마로 손을 가져가자 혜성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응? 아니, 나 멀쩡한데?”
그러나 표정을 보면 누가 봐도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러다 어디 쓰러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이긴 한데, 혹시 아픈 거라면 바로 병원이라도 들러서 수액이라도 한 대 맞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일도 팬 미팅 연습한다고 계속 고생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한 만큼 컨디션 관리 실패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나는 후, 짧게 한숨을 삼키고는 혜성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열 있나 한 번만 볼게요. 형 지금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원래 남이 아프거나 피곤한 상황에서 무리해서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아플 때는 티를 안 내려 하기 마련이었다.
자기가 남한테 이것저것 해 주는 게 많으니까 혹시라도 남도 자신에게 똑같이 해 주려고 할까 봐. 도움을 주는 건 괜찮아도 받는 건 불편해서.
‘굳이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될 텐데.’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되는 사고방식이었으나 각자 생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다.
“괜찮다니까….”
혜성이 한 번 더 거부했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피로 회복제 먹이고 푹 재우든, 병원을 들르든 해야…. 혜성의 만류를 거부한 채 손을 올리려던 그때.
“됐다고 하잖아! 안 아프다니까!”
혜성이 갑자기 꽥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혜성답지 않은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컨디션 나쁜 거 맞네.
“…….”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혜성을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게 라이브 방송을 찍고 있었던 미팅 룸에 싸늘하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혜성이 본인이 내지르고도 아차 싶었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사과했다.
“미, 미안해. 내가 오늘 잠을 잘 못 자서 예민한 것 같아.”
그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궜다.
“오늘 더 일정 없으면 얼른 들어가자. 그냥 한숨 푹 자면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반쯤 파국을 맞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멤버들이 빠르게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어떡하냐.’
‘아까 나올 때 숙소 꼴 어떻게 해 놓고 나왔지?’
‘…….’
오늘 라이브 방송을 위해 숙소에서 사옥으로 출발하기 직전.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혜성을 위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 주려고 숙소를 이미 파티 무드로 꾸며 놓은 채였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걸 찾아낸 파티용 미러볼 무드 등은 물론이요, 각종 생일 축하 장식에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짜잔~ 이게 뭐게요?’
영인이 가져온 반짝이 폭죽이었다. 줄을 당기면 안에서부터 화려한 꽃가루가 터져 나오며 마치 음방 무대에서 뿌리는 것 같은 화려한 연출을 선보일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치우는 거 자체는 사람 여럿이 달라붙으면 금방 치우기는 할 텐데….
우리가 여유 되는 녀석들끼리 십시일반으로 모아 산 선물을 이불 아래에 숨겨 놓고 이불을 걷는 순간 터지도록 설계해 두었는데.
‘지금 이 분위기에서 꽃가루 터지고 그거 치운다고 한참 또 부스럭부스럭 방해했다간 정말 파국이 되는 거 아닌가.’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지 머리에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어쩌지?’
‘누가 대표로 가서 그거 안 터지게 철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심지어 터졌을 때 반응이 귀여우면 나중에 자컨 공개할 때 짤막하게 보너스 클립으로 공개하겠다고 카메라를 설치해 두기까지 했다.
이건 무조건 수습해야 한다.
서로 눈치만 보던 그때 내가 나섰다.
“알겠어요. 형 진짜 많이 피곤하시구나. 저도 죄송해요. 싫다고 하셨는데 자꾸….”
“아… 아냐…. 나도 미안해.”
자연스럽게 내가 먼저 사과를 하자 아니나 다를까 혜성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이어서 사과를 했다.
분위기를 한껏 누그러뜨린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형, 정말 죄송한데, 저희 당장 내일부터 반영해야 하는 동선 수정 형 부분이 아직 남아서… 30분 정도만 잠깐 괜찮으실까요?”
조금 전까지는 얼른 가서 쉬라더니 이제 와서 동선을 체크하자고. 얼토당토않은 핑계였지만 기분이 한껏 가라앉은 혜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암담한 분위기 속에서 뭐라고 말을 또 지어내야 할지 머리를 핑핑 굴리는 동안 다른 멤버들이 눈치껏 사무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그래서 바꿔야 한다는 동선이 뭔데?”
나는 이미 공지한 지 오래라 다 숙지하고 있는 내용을 필사적으로 처음 듣는 내용인 것처럼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여기서 딴딴, 따다단, 하고 나올 때 원래 버전이 저랑 영인이가 교차하면서 걸어가는 거잖아요? 그거를 이렇게 형 앞에서 교차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혜성도 이런걸 허투루 들을 사람은 아니라 단번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이거 지난주에 얘기 다 끝난 거잖아. 멤버들 전체 다 있을 때 확정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걸 왜 다시 얘기하는 거야?”
평소라면 이것보다 훨씬 더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을 텐데, 조금의 쿠션도 없이 바로 묻는 걸 보니 확실히 평소랑 태도도, 컨디션도 달랐다.
“…저, 혹시 이거 말고 더 할 얘기 없는 거면 나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 다른 애들도 벌써 다 들어갔고…. 나 오늘 진짜 피곤해서.”
여기서 아니라고 더 억지로 말을 지어내는 것도 너무 수상해 보일 듯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히 붙잡아서 죄송해요, 형.”
어쩌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거냐. 나도 더 돌려 말할 것 없이 오늘 왜 유달리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작전 카메라를 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진짜 뭔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순간 다른 멤버들과 혜성이 일부러 날 놀래키려고 짜고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 굳이 날 속인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숙소로 향하는데 규민에게서 황급히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규민] 야 우리 큰일 남 오후 9:32
[이규민] 진짜 X됨 오후 9:33
[이규민] 최대한 시간 좀 끌어 봐 오후 9:33
여기서 뭘 어떻게 더?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시간을 끌어? 재빨리 규민에게 회신하자 엉뚱한 소리가 돌아왔다.
[나] 뭘 어떻게??? 오후 9:34
[나] 거의 다 와 가는데 오후 9:34
회사에서 숙소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조금 돌아간다고 쳐도 한계가 명백했다.
[이규민] 막내가 연희우유크림빵 먹고 싶어 한다고 해 오후 9:35
[이규민] 그거 좀 걸어가야 되는 편의점에서만 팔아 오후 9:35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 나 혼자 사 오면 되지 주혜성한테 같이 사 오자고 할 수 있겠냐?
나는 눈치를 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 형, 막내가 잠깐 편의점 들러서 뭐 좀 사 와 줄 수 있냐는데요.”
“응?”
“그게 여기서 좀 걸어가야 하는 지점이라서요. 컨디션 괜찮으세요?”
혜성의 표정을 살피며 묻자 아까 연습실 안에서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듯한 혜성이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데?”
“한 10분쯤요.”
“그럼 들렀다 가자.”
컨디션이 나쁜 거지 평소 남을 잘 챙겨 주는 성격은 어디 안 갔는지 흔쾌히 알겠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며 편의점 세 곳을 돌았다.
‘슬슬 진짜 빡친 것 같은데.’
아니면 우리가 뭔가 준비한 게 있다고 눈치를 챘거나.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규민에게서는 계속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달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ㄴㄴㄴㄴㄴ 더는 무리 오후 9:51
[나] 여기서 더 끌면 오후 9:52
[나] 혜성 형 폭발할 듯 오후 9:52
언제 혜성의 입에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혜성 형이니까 지금 여기까지 참은 거지.’
곧바로 규민에게서 사진 하나가 도착했으나 도저히 확인할 새도 없이 숙소에 도착하고 말았다.
“나 들어가면 씻고 바로 잘게.”
“아, 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나는 부디 먼저 도착한 멤버들이 말끔히 청소에 성공했기를 바라며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낡은 현관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비친 것은….
“하하… 아… 그, 그러니까, 이게….”
꽃가루가 사방팔방으로 터지다 못해 개판이 되어 있는 치우다 만 현장이었다.
시간을 그렇게 벌어다 줬는데 기어이 터트렸냐.
내가 경멸을 담아 규민을 노려보자 규민이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저희가 아까 형 먼저 출발하고 바로 간단하게 서프라이즈로 준비했었거든요. 근데 형이 오늘 컨디션이 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치워 놓으라고 먼저 보냈는데….”
어색하게 뒷목을 잡은 채 이실직고한 순간 혜성이 얼굴을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이상 분위기고 나발이고 어쩔 수 없었다. 재빨리 영인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영인이 지원을 냉장고 쪽으로 등 떠밀었다.
곧 촛불도 붙이지 않은 케이크를 든 지원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나왔다.
“생일 축하 합, 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지원이 어찌나 눈치를 보고 또 어찌나 긴장했는지 생일 축하 노래가 아니라 무슨 장송곡 같았다.
“사, 사랑하는, 우리 맏형….”
하나둘 눈치껏 가사를 따라부르며 어색하게 박수를 치는데 불을 안 붙였으니 생일자가 끌 촛불이 있을 리 없었다.
“아.”
“불 안 붙였잖아….”
“맞다.”
하연이 황급히 주방으로 가서 성냥을 찾아오더니 북, 불을 붙여 초로 옮겨붙였다.
“…노래 다시 부를까요?”
개판이 되긴 했으나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 혜성에게 의사를 묻자 혜성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이어진 훌쩍, 코 먹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다들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삼켜야 했다.
***
잠시 후, 결국 배달만 늦게 받게 된 채로 원래 계획했던 대로 생일 파티가 이어졌다.
정작 당사자는 터지는 모습을 보지도 못한 폭죽 잔해도 말끔하게 다 치웠고, 배도 든든히 채운 데다 지난번에는 엉망이 돼서 아무도 못 먹었던 케이크도 한 입씩 잘 나눠 먹었다.
아무튼 잘 해결되었으니 다행이긴 한데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는지는 못 알아냈잖아.’
나는 빌라 위에 옥상이 있던 것을 떠올리고는 슬쩍 혜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형 혹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오후 11:55
현호는 다행히 세상모르고 푹 잠들어 있었다. 나는 냉장고 안쪽 깊숙한 곳에 몰래 꿍쳐 두었던 캔을 두어 개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는 슬쩍 숙소를 먼저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