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숨 돌릴 틈도 (3)
“어, 아냐, 들어갈게. 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라.”
그러고는 문을 안쪽으로 밀어 열고 걸음을 옮긴 찰나 영인이 불쑥 말했다.
“저희도 다 1인분은 하니까요. 조금은 의지해 주시면 좋겠어요.”
여기서 더? 나는 영인을 향해 돌아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푸핫, 표정 진짜, 아하하!”
그래, 의지는 잘 모르겠고 난 큰 웃음은 줬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눈을 감으니 곧 잠이 쏟아졌다.
어쩌면 은찬의 혹독한 디렉팅이 불면증에 효과가 아주 좋을지도…. 오랜만에 잡생각 없이 편히 잠이 들었다.
***
다음 날도 연이은 녹음 강행군에 결국 3일 차쯤부터는 눈에 띄게 보컬 컨디션이 떨어진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사이 4곡은 녹음을 끝내 두었으니 한시름 덜기는 했다만.
곧장 무대를 올릴 예정이 있는 타이틀곡과 후속 활동곡을 뽑아서 안무 팀에 넘기니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일정이 쏟아졌다.
그런 와중에도 형들을 제치고 컨디션을 가장 잘 유지하는 녀석이 있었으니….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바로 지원이었다.
첫날부터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디렉팅에 시달려서 파김치가 됐었는데 다음 날부터 젊음의 힘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나이보다는 의지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이번 수록곡에서 처음으로 랩에 도전해 무수한 지적에도 굴하지 않고 녹음을 마쳤을 때 다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을 정도였다.
다른 형들은 이틀 차부터 이렇게 힘든데 정규 앨범은 대체 어떻게 준비하느냐며 약한 소리를 할 때 눈을 빛내는 건 지원 한 명뿐이었다.
우리도 열정이라면 부족하지 않으니 정규 녹음이 벌써부터 싫거나 꺼려진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은찬 본인조차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갈라질 만큼 강행군을 이어 나가는 와중, 막내인 지원이 정규 얘기에 눈을 빛낼 수 있다는 게 경이로울 뿐이었다.
‘우리 막내 솔로 활동 해도 되겠네.’
반쯤은 농담으로 칭찬 삼아 꺼낸 이야기에 지원이 곧장 질색팔색했다.
‘무슨 소리야! 나, 나는 단체 활동이 더 좋아!’
아니, 뭐… 단체가 더 좋아도 1년 후에는 자동으로 흩어지게 될 텐데 뭘 벌써부터 그렇게 정색을.
다들 장난삼아 우리 막내 벌써부터 독립을 무서워해서 어떡하냐 귀엽게 넘어가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솔로로 데뷔해야 더 초대박이 날 텐데.’
설마 그룹 활동 때 이미지를 너무 많이 소모해서 막상 솔로로 데뷔했을 때 화력이 꺾여 버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또다시 찾아온 불길한 상상에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너무 과대 해석해서 생각하지 말자.’
이미 과거는 바뀌었고 현재 또한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만큼 미래가 변한 것에 대해 하나하나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까지만 생각하자.’
나는 이미 지원을 도와서 더 높은 순위에 안착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함께 데뷔할 수 있도록 협력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선택을 몇 번이고 곱씹어 가면서 알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건 미련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형들한테 여러모로 의지하고 있어서 솔로의 솔 자만 나와도 질색할지 몰라도, 슬슬 짬이 차면 또 달라지겠지.
‘거기까지 내가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고민을 내쫓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안무랑 팬 미팅인가.’
정식 명칭은 팬 콘서트인 공연은 토요일 딱 하루만 진행될 예정이었다.
‘양일 했다간 애들 다 쓰러지지.’
막콘 때는 목 관리 안 돼서 너도나도 헉헉거리고 있을걸. 훗날의 진짜 콘서트에 대비하기 위해 하는 예행연습이라 생각해도 좀 이른 시기이긴 했지만… 짧은 활동 기간을 생각했을 땐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반년 안에는 슬슬 월드 투어 얘기도 나올 거고.’
안 할 리가 없지. 전 세계적으로 판권을 팔아 댔으니 2차 수익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지구 곳곳 공연장이 매진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티켓을 팔아 댈 것이 분명했다.
‘일 년간은 휴식기 없다고 불평할 새도 없이 불태우기로 다들 결심했으니까.’
다들 며칠간의 힘겨운 녹음을 끝내고 늘어져 있을 새 없이 일어나 안무를 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없는 힘도 쥐어짜 내 가며 커버곡에, 수록곡에 팬 미팅과 컴백에 열을 올리던 그때.
슬슬 엔카운터의 새로운 모습에 목말라 있을 팬들을 위해 준비했던 자작 컨텐츠가 풀리는 날이 찾아왔다.
***
‘드디어….’
인덕은 50분이 되기도 전부터 핸드폰 시계를 노려보며 시간이 5시 59분에서 6시로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56초, 57초, 58초, 59초, 그리고 마침내 6시.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올라온 15분짜리 예고 영상에 인덕은 숨을 멈추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와, 드디어!’
그동안 자컨 하나 없는 그룹이라고 얼마나 멸시와 조롱을 당했던가. 이제 데뷔한 지 두 달도 안 된 그룹임에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지 반년이 넘었다 보니 다른 그룹들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어그로와 트집이 넘쳐났다.
‘아니, 데뷔한 지 이제 한 달 좀 지났는데 무슨 자컨 없다고 일도 안 하는 소속사니 어쩌니 하는 거야.’
물론 센스가 있고 그룹 하나 데뷔시키기 위해 수년을 준비해 온 소속사에서는 데뷔와 동시에 다큐멘터리 형식의 자컨을 공개하는 사례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소속사 내에서 자체적으로 그걸 기획하고 데뷔 일정을 잡은 케이스고.
엔카운터는 소속사도 다 뿔뿔이 흩어져서는 데뷔조 자체도 데뷔 한 달 전에 정해진 마당에 어떻게 데뷔와 동시에 자컨을 공개한단 말인지.
물리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건 생각도 안 하고 까글에 무지성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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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코드비 일하는 거 보니 앞으로 1년이 훤한 듯 (+46)
[본문]
가뜩이나 활동 기간 짧아서 애들 빛 보려면 일정 타이트하게 잡아야 할 텐데.
데뷔 준비하는 기간 동안 대체 뭘 한 거임? 애들 개인 예능 돌리면서 셀럽 놀이 시키기?
그럴 시간에 팬들 코어 모을 수 있는 자컨이나 준비하지 데뷔 싱글 활동 끝나니까 팬들 다 손가락 빨고 컴백만 기다리는 중ㅎ…
타 팬인데도 화제성 점점 줄어드는 거 내가 다 아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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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은 영혼 없는 눈으로 반박 댓글을 500자 정도 작성했다가 이딴 어그로 글에 먹이를 주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에 작성한 내용을 모두 지웠다.
그러고는 실제로 글이 내려갈 확률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게시글 신고까지 살뜰히 마쳤다.
[신고]
[▷사유: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봤을 때 내가 기분 나쁘면 차단감이다. 신고와 차단이 같이 연동되어 있어서 악성 게시글을 차단하려면 신고도 같이 해야 하는 시스템이 참 열받기 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슥 확인한 댓글은 이번엔 다행히도 상식적인 것들이 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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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면 활동 한 세 달 쉰 줄 알겠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개인 예능 돌리고 셀럽 놀이라는 게 대체 뭔 소리냐 애들 데뷔 준비하면서 오만 데 다 나온다고 그만 나오라고 욕하는 글 올라왔던 게 어제 같은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캡처 이미지) TV고 유튜브고 겟데뷔 애들밖에 안 나온다고 질린다는 글 아직 인기 글 5페이지만 넘어가도 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
[- 까고 싶으면 그럴싸한 이유나 좀 들고 오든가 억지로 뭐든 지어내서 까고 보는 거 개웃김]
[└ 이젠 대체 뭘 들고 올지 궁금하기까지 함]
[└ 글쓴이 본진이 어지간히 차트도 음방도 별 볼 일이 없나 봐ꉂꉂ(ᵔᗜᵔ*)ꉂꉂ(ᵔᗜᵔ*) 남의 본진에 입 털고 다니는 거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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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를 욕하려거든 오히려 데뷔 전부터 일정이 무슨 테트리스인 것처럼 굴린 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었으나 어쨌든 공개된 자컨이 없다는 이유로 안 들어도 될 헛소리가 죽죽 쌓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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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예능 나오는 거 보면 예능감이 없진 않은 것 같던데 아직까지 자컨 공개 안 하는 거면 소속사가 생각이 없거나 같이 있을 때 케미가 대체 얼마나 무맛 노잼이길래 공개를 못 하나 싶긴 하지ㅋㅋ 눈막귀막 한다고 사실이 달라지진 않음]
[└ 불화무새 또 왔네 ㅅㄱ]
[└ 불화무새가 아니고 안 친한 거 맞잖아ㅋㅋㅋㅋ]
[- 멤버들 스케줄 돌리는 열정이면 진작 찍고도 남았을 거 같은데 아직까지 공개 안 한 거 보면 뭐 문제 있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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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추천이 잔뜩 박혀 있어서 하단으로 내려야만 볼 수 있는 댓글이긴 하지만 의도가 뻔히 읽혀서 더 열이 뻗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스트레스를 주는 건 저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넘어가서 쓰지 않아도 될 에너지를 이상한 데 낭비하고 있는 적군 같은 한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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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마@estjplus_0035]
[오늘 학교에서 다들 자컨 자랑하는데 나만 보여 줄 거 없어서 서럽 ㅠㅠ 코드비에 진짜 해명 총공이라도 해 봐야 할까요??]
[더기더기@jebalnawara__]
[코드비 일 안 하고 뭐 하냐고 애들 자컨 언제 나오는데ㅡㅡ #일안하는_코드비_해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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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싹 다 모아서 타 팬덤으로 보내 버리고 싶다.’
이것만큼은 정말 간절한 진심이었다.
다행히 해시태그를 검색해 보니 몇 개 안 올라온 걸로 봐서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이상한 악성 글이나 보고 동조하는 소수의 바보들 같았다.
갠팬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서바이벌 그룹 특성상 견제와 음모가 난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럴 때 먹금 하는 인원이 많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들 다른 그룹 파던 짬이 있어서 쉽게 휩쓸리진 않는다 이거지.’
이 개인주의 팬덤의 몇 안 되는 장점에 감사하며 분노를 다스리던 중, 드디어 기다리던 자컨 공개 일정이 떴을 때 어찌나 감격이었던지.
인덕은 눈물을 삼키며 분량도 든든한 예고 영상을 재생시켰다.
[우주 인력 사무소]
꽤 깔끔한 로고와 함께 나온 첫 화면은 평범해 보이는 사무실이었다.
[안녕하세요, 국민 매니저 여러분! Your new universe! 엔카운터입니다!]
‘헉.’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갑자기 시작부터 등장해 버린 잘나도 너무 잘난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는 우주 인력 사무소 소장, 서인수고요, 오늘부터 전국 각지에 흩어져 계신 국민 매니저분들과 만나 뵙기 위해, 저희 멤버들이 한 명 한 명 곳곳으로 파견될 예정인데요!]
오프닝을 끊은 인수에 이어서 말주변이 좋은 멤버들 중심으로 멘트를 이어 나갔다.
[여러분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 쌓기 위해 다들 열심히 준비했으니까요, 앞으로 8주 동안 매일 한 회씩 공개되는 우주 인력 사무소!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저 멤버들이 나와서 앞으로의 일정을 소개하는 짧은 소개 영상에 불과했으나 중요한 건 어차피 내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