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숨 돌릴 틈도 (1)
“……?”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평소라면 불이 훤히 켜져 있을 거실이 웬일인지 어두웠다.
뭐지? 아까 거실에서 엄청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다른 집 소리를 잘못 들었나 혼란이 온 순간 영인이 김빠진 표정으로 거실 불을 켰다.
“에이, 형들이었어요?”
“뭔데?”
의아한 표정으로 거실을 둘러보니 웬 풍선과 장식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경>복귀<축>]
대체 뭔가 했더니만 큰 방에서 다른 녀석들이 김빠진 표정으로 케이크를 손에 든 채 나왔다.
“아.”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지원이 기숙사로 복귀하는 걸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지원이 오늘 온대?”
내일 오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의아한 얼굴로 묻자 영인이 그것도 몰랐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까 매니저 형이랑 통화됐대요. 할아버님이 괜찮으니까 얼른 가 보라고 너무 완강히 말씀하셔서 오늘 저녁에는 올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그랬어?”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과연 같은 내용의 공지가 단톡방에 올라와 있었다.
“우리가 더 일찍 와서 다행이네.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에서 우리만 나중에 덜렁 들어오는 것도 웃겼겠다.”
하루 이틀 집을 비운 것치고는 음식 세팅이 과한 것이… 어째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앞으로 또 질릴 때까지 굴러야 할 텐데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굳이 더 잔소리하지 않고 다른 녀석들을 도와 장식을 마저 정리했다.
잠시 후, 드디어 주인공인 지원이 도착했고 예상했던 대로 막내의 대성통곡이 이어졌다.
“죄송, 죄송해요…. 기껏, 준비, 해 주셨는데… 저, 민폐만 끼치고, 훌쩍….”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한 환영회였으나 어째 의도와는 반대로 굴러가는 상황에 난감하던 차, 규민이 냅다 손으로 생크림을 찍어 지원의 얼굴에 발랐다.
“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
달래 주려는 건 알겠는데 아직 포크도 안 댄 케이크에 맨손이라니. 나는 경멸을 담은 표정으로 야유했다.
“뭐 하는 거야, 더럽게.”
“더럽다니! 방금 손 30초 이상 빡빡 씻고 왔거든?”
그리고 그 순간 어째 조용하다 싶었던 영인이 슥, 케이크를 노렸다.
“앗.”
저거도 100% 남의 얼굴에 묻히려고 할 거다. 나는 재빨리 혜성이 들고 있던 케이크를 가로채려 했다.
그러나 이럴 때만 쓸데없이 합이 좋은 규민이 나보다 더 빠르게 케이크 판을 낚아채 갔다.
“야!”
케이크를 식품이 아니라 놀이 도구로 쓰는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규민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그때.
“악.”
“헉.”
순간 균형을 잃은 규민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려 했다.
‘안 돼…!’
순간 저 케이크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청소는 누가 하며, 음식은 오죽 아까우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규민의 소매를 급하게 다시 잡아당겼다.
“야, 잠깐만잠깐만잠깐만!”
그리고 규민이 한껏 비명에 가까워진 속사포 랩을 내뱉은 순간, 철퍽,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불길한 방향에서 울려 퍼졌다.
“…….”
“…….”
모두가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였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들 얼이 빠진 채로 얼음이 된 와중 오직 하연만이 놀라 소리쳤다.
“형, 괜찮아요!? 그, 아니, 아….”
얼굴에 케이크를 정통으로 맞은 은찬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공포 그 자체였다.
“아니, 나는…. 형, 저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규민이 말을 더듬거리며 도망칠 준비를 하던 그때 나는 재빨리 자수부터 했다.
“설마 그쪽으로 던질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얼른 물티슈 가져올게요!”
슬쩍 부엌으로 빠져나가려던 그때 혜성이 재빨리 옆에 놔둔 가방에서 물티슈 팩을 꺼내 건네주었다.
“…….”
주변이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은찬은 생크림에 처박힌 얼굴을 얌전히 치켜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더 무섭다고…!’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된 케이크를 떼어 내니 생크림만 범벅으로 남아 어디가 눈코입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 저희가 닦아 드릴까요, 아니면 직접….”
대역죄인의 마음으로 물어본 그때.
“…….”
은찬이 눈을 번쩍 뜨며 새하얀 크림 사이로 눈꼬리가 긴 눈알이 두 개 덜렁 나타났다.
“헉.”
모두가 놀라 순간 숨을 들이마신 그때 은찬이 흥- 코를 불어 생크림 덩어리에 뿅뿅 구멍이 두 개 뚫렸다.
그즈음 되니 다들 참았던 웃음을 더는 틀어막지 못했다.
“흡, 크흡….”
“쿨럭, 켈룩, 흡….”
뒤이어 입 구멍까지 나타나며 은찬이 입을 열었다.
“…웃어?”
그 말 한마디가 꼭 웃으라는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다들 결국 오열하는 수준으로 웃고 말았다.
***
잠시 후, 거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느닷없이 샤워에 샴푸까지 다시 하고 나온 은찬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끈적거려.”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
애써 규민이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자 은찬이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규민이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지원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마냥 좋은 듯 푼수처럼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일은 잘 해결된 거야?”
잔뜩 먹고 난 후의 정리까지도 마치고 소파에 앉은 혜성이 지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묻자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하면 2주까지 안 채워도 퇴원하실 수도 있으시대. 당장은 계속 부축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입원해 계시는 게 좋겠지만….”
할아버님도 위급한 상황은 아니고 제일 급한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됐으니 당장은 크게 걱정할 건 없다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대표님이 그렇게 나서 주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하네.”
“응…. 정말 다행이야….”
너 나 할 것 없이 젊은 나이라도 건강은 조심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시간이 늦어 다들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내내 말은 없었지만 같이 지원을 걱정해 주었던 현호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형, 잠깐만 괜찮아?”
불 꺼진 거실에서 지원이 나를 붙잡았다.
“어? 어어.”
또 무슨 할 얘기가 있나. 나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죄책감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현호를 먼저 방으로 들여보내고 지원을 돌아보자 지원이 당장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전부터 계속 얘기하고 싶었던 건데, 형한테 계속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미안해…. 이번 일도 정말… 형 없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겟데뷔 촬영 때부터 줄곧 내게 도움을 받기만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팀인데 결국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 너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실제로도 반은 맞는 말이었다.
유지원의 빠른 복귀가 엔카운터 활동에 꼭 필요한 것도 맞고.
심지어 겟데뷔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심 이전 생의 ‘초대박 탑스타 유지원’을 기대하며 접근하기는 했으니까.
‘몇 번 부딪혀 보고 ‘아, 얘는… 당장은 덕분에 덕 볼 일 없겠다.’ 싶긴 했지만.’
1회차의 미래에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된 건지 나도 궁금할 정도였다.
‘아니면 오히려 옆에 도와줄 사람이 없어야 성장을 하는 타입인가.’
이번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 때문에 할아버지 일이 초래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간을 생각하면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우물쭈물하며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지원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안 도와줬어도 잘했을 거야.”
그러자 지원이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내가 나를 제일 잘 아는걸….”
아니라고. 내가 안다고. 답답함에 속이 부글부글 끌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설득하려고 밀어붙여 봤자 설명할 방법이 없네.’
답답하지만 일단 자존감을 다독여 주는 선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너 이제 열여덟밖에 안 됐잖아. 어려서 해 본 적 없는 일에 헤매는 건 당연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일 녹음 잘하는 것만 생각해, 응?”
“…응!”
무슨 열여덟이 아니라 여덟 살을 달래 주는 것처럼 토닥여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잠잠했던 상태창이 축하 메시지를 띄웠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호감도) 클리어!]
[▷굳세어라 지원아]
[보상 수령]
[▷코인 1개]
[▷등장인물 ‘유지원’ 보유 스킬 수동 활성화 개방]
그리고 연달아 새 달성 메시지가 나타났다.
[서브 리퀘스트 미션 클리어!]
[▷적재적소]
[보상 수령]
[▷코인 1개]
[▷뻐꾸기 단계 1단계 하락 조정]
3단계까지 올라가기 직전이었던 수치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떨어졌다.
안도하기도 잠시 뻐꾸기가 실시간으로 올려 대고 있는 악성 댓글과 루머들의 수준을 보니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 다 비즈니스인 거 티 남ㅋㅋㅋㅋ 게스트 토크 할 때도 서로 어색하게 붙어 앉아 있기만 해서 멀뚱멀뚱 이상해 보였음]
[- 솔직히 다 순위 가지고 경쟁하던 프로그램에서 데뷔했는데 뒤에서 뭔 짓인들 안 했을까…. 해체하면 바로 개인 루트 타고 다신 교류 안 할 거 같음.]
[- 서인수 센터 서겠다고 이규민이랑 기 싸움 레전드ㄷㄷ]
음원 성적 사재기설이 잘 먹히지 않는지 이제는 불화설을 열심히 조장하고 있었다.
‘진짜 애들 쓴다.’
논란이 될 게 없는 멤버들을 상대로 논란을 창조해 내고 있다 보니 당연히 억지스럽다는 반발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선은 흥미롭기 짝이 없는 내용이기에, 팬이 아닌 일반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동조까지는 아니어도 조회 수는 조용히 늘어나고 있었다.
1.5단계가 이 정도면 나중에 4단계 이상으로 올라갔을 때는 정말 여론까지도 돌아서기 시작한다는 뜻인가.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럼 이제 마저 확인할 게….’
보상을 모두 수령하자 곧바로 등장인물을 확인하는 탭으로 넘어갔다. 그래, 스킬 활성화인가 그게 가능하다고 했지.
[등장인물]
[엔카운터 멤버]
[▷유지원(A)]
지원의 상태를 클릭해서 서브 항목을 확인하자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스킬이 붙어 있었다.
[▷유지원(A)] (Clear)
[- 보유 스킬: 세이렌(S)]
[- 발동 시간: 15분]
[- 스킬 효과가 발휘되는 동안 벌어지는 부정적인 상황을 관람자가 자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건 진짜 괜찮은데? 지원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본인이랑도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겟데뷔 때도 음색이랑 얼굴로 홀려서 뚝딱거리는 게 제대로 안 보인다고 하는 의견도 많았고.’
아쉽게도 적용 대상은 시스템 사용자인 나와 지원 본인뿐이긴 했으나 아직 완성형 아이돌이 아닌 지원에게는 아주 유용한 스킬이었다.
‘이거면 확실히 안심이야.’
그러나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다고, 스킬 사용에는 당연하게도 대가가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