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하나하나씩 (2)
그러나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무시할 생각인가?
컨디션 조절도 할 겸 잠깐 사옥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라도 다녀올까 하던 찰나 메시지가 도착했다.
[블랙온 현찬 선배님] 제가 주사가 조금 있어서 그때 인수 씨한테 좀 도움을 받았다고만 들었는데 오후 1:42
[블랙온 현찬 선배님] 먼저 연락 못 해서 미안하네요. 오후 1:43
[블랙온 현찬 선배님] (이모티콘) 오후 1:43
귀여운 강아지가 엉엉 울며 손바닥을 비비는 그림이었으나 뒤에 담긴 속내가 훤히 보였다.
‘X됐다, 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나는 태연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아니에요ㅎㅎ 오후 1:44
[나] 저는 그냥 매니저분한테 취하신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게 전부라서요 오후 1:44
그리고 겨우 안심하고 마음을 내려놓았을 현찬에게 비수를 꽂았다.
[나] 그런데 그날 선배님 말씀 중에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오후 1:45
이쪽도 취해서 제대로 기억 못 할 거라는 희망을 싸그리 불태워 주자 또 읽음 확인이 뜬 이후로 한참 대답이 없었다.
‘왜 이렇게 반응이 굼떠?’
콘서트도 끝났고 당장 바쁜 일정도 없다는 건 지난 술자리에서 매니저한테 모두 확인한 참이었다.
아무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건이겠지.
확실히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기다리고 있으려니 규민이 기웃거렸다.
“뭐 해?”
나는 흘끔 규민을 올려다보다가 대답했다. 다른 녀석들은 먼저 사옥으로 갔거나 방 안에서 자는 건지 쉬는 건지 모르겠지만 쥐 죽은 듯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락 기다리는 중.”
“누구 연락?”
나는 슥 핸드폰 화면을 켜서 규민에게 보여 주었다.
“엥? 현찬 선배님이랑 왜?”
뭐, 이 정도는 얘기해 줘도 되겠지. 내 개인적인 일도 아니고 콘서트 내내 현찬의 수상쩍은 태도 때문에 불안해했던 건 멤버들 모두의 일이었으니까.
“콘서트 때 계속 좀 찝찝했었잖아. 아무리 진행 중에는 스태프도 가수도 정신없다고는 해도, 우리랑 관련된 곳에서만 자꾸 실수가 나온 건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그래서 따로 캐묻기라도 했어?”
규민이 얼굴에 ‘웬일이래.’ 하고 큼지막하게 써 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쪽이 먼저 술술 불던데.”
“언제!?”
내내 약간 남 일 얘기하듯 시큰둥했던 규민의 눈이 반짝였다.
“그날 회식하고 나서 화장실 들렀을 때. 혼자 엄청 취해서 칸막이 안에서 졸고 있더라고. 여기서 주무시면 입 돌아간다고 깨우려는데 자꾸 헛소리를 해서.”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데 실수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짜증 난다, 뭐 이런 얘기.”
“오오….”
어쩐지 흥미로워 보이는 얼굴에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슬쩍 규민에게서 멀어졌다.
“어째 재밌어 보인다?”
내가 핸드폰도 손바닥으로 감싼 채 슬금슬금 옆으로 피하면서 의도치 않게 내준 빈자리에 규민이 냉큼 걸터앉았다.
“재밌지, 그럼. X되는 게 내가 아닌데. 핸드폰 좀 줘 봐.”
그러고는 당당하게 손바닥을 내밀기에 곧장 거절했다.
“왜? 또 무슨 짓 하게.”
그러자 규민이 자기를 못 믿냐는 둥 도리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한 짓 안 해. 일단 줘 봐. 딱 보니까 지금 기억 다 하고 있으면서 기억 안 나는 척 간 보고 있는 상태겠네. 내가 딱 발뺌 못 하게 해 줄게.”
“뭘 어쩌려고…!?”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일단 핸드폰부터 등 뒤로 숨겼으나 규민이 낚아채 가는 것이 더 빨랐다.
“가만있어 봐. 바로 전화 오게 해 줄 테니까.”
“뭐?”
내 핸드폰을 빼앗아 간 규민이 제일 먼저 확인한 건 녹음 어플이었다. 대체 뭔 짓을 하나 봤더니 즉석에서 파일을 하나 만들더니 곧장 자기 핸드폰도 화면을 켜서 전화 기록을 뒤졌다.
그러고는 그날 나한테 언제 오느냐고 전화했던 시간과 대조해서는 녹음 파일의 제목을 수정했다.
[VoiceRecord201XXXXX_231135]
자동으로 찍히는 타임스탬프 양식에 맞춰 시간만 바꿔 놓은 파일이었다.
“너 대체 뭘 어쩌려고….”
뭘 어떻게 한 것인지 녹음된 시간까지도 슥슥 5분짜리로 늘리더니 그대로 화면을 캡처하고는 현찬과의 메시지창에 그대로 전송했다.
“야!”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전송에 너무 놀라서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뺏었다.
“너 미쳤어? 이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녹음을 나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다. 나중에 확실하게 약점으로 잡고 캐물으려면 녹음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는 게 훨씬 유리할 테니까.
다만 술에 잔뜩 취해서 인사불성인 사람을, 이쪽은 멀쩡한 맨정신인 채로 녹음부터 하는 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신경 써서 자리를 마련해 준 선배가 빈틈을 보이자마자 약점부터 잡았다는 캐릭터가 잡힐까 걱정되는 것도 있었고.
‘차라리 서로 맨정신이기라도 했으면 슬쩍 녹음했을 텐데.’
괜히 책잡힐 일, 그리고 혹시라도 멤버들 전체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두었던 걸 이렇게…. 규민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놈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뭐 어때. 진짜 녹음한 것도 아니고.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 아냐? 이 정도로 강하게 안 나가면 그쪽이 술술 ‘아, 사실 그게 어쩌다 그런 거냐면요~’ 하고 불겠어?”
규민의 마냥 틀리지만은 않은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설득하는 게 내 재량인 것인데. 최대한 협박 없이 재량껏 하려던 걸 왜 끼어들어서는.
내가 따지고 싶은 것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효과는 확실했다.
“어. 전화 온다.”
규민이 말한 대로 핸드폰 화면에 기다렸던 발신인이 찍혀 있었다.
[블랙온 현찬 선배님]
[010-XXXX-XXXX]
“받아 봐.”
규민이 ‘그것 봐라.’ 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이제 너도 그만 빠지고 네 할 일이나 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얌전히 물러설 표정이 아니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나는 규민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문이 닫히기도 전에 따라 들어온 녀석이 현호의 침대 위에 앉았다.
‘저거 제현호가 알면 싫어할 텐데.’
제현호는 답지 않게(?) 은근히 깔끔 떠는 스타일이라 본인도 외출복 차림으로는 함부로 침구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나가기 전이기도 하고 덮는 이불 위에 앉은 거니까 괜찮겠지.’
나는 규민이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한숨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단정한 인사로 전화를 받자 상대 쪽은 전혀 진정이 안 되는 상황인지 목소리에 떨림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 사진 보낸 거 뭐예요?
다짜고짜 그 얘기부터 한단 말이지. 옆에서 규민이 팝콘이라도 가져올 기세로 눈을 반짝이기에 나는 우선 쉿, 하고 입단속부터 하고 대답했다.
“그날 선배님이 말씀하신 거요. 저만 알고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쪽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를 떠보기 위해 슬쩍 애매하게 말을 하자 현찬이 곧바로 미끼를 물었다.
- 일단 만나서 얘기하죠, 만나서….
내가 뭘 믿고? 물론 현찬쯤 되는 대선배님이라면 자기 사회적인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상한 짓은 안 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 사람은 오히려 여차하면 은퇴하면 그만인 자리라서 더 불안해.’
실제로 같은 팀 내에 은퇴급의 사고를 친 멤버도 있으니까.
게다가 누군가의 사주 또는 협박을 받고 우리를 콘서트까지 불러내서 여러 차례 위기를 제공했던 거라면,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단신으로 호랑이굴에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제가 당장은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요. 장소는 어디서 뵐까요?”
일단 어디로 불러내려는 건지 얘기나 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묻자 현찬이 잠시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 ○○동에 제가 작게 가지고 있는 카페가 있어요. 동네가 한적하긴 한데 외진 곳은 아니에요. 그쪽으로 오세요.
혹여 자기 집이나 사옥으로 오라고 하면 냅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본인 소유의 가게라니 마냥 안전하단 느낌은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곧 메시지로 받은 카페 주소를 확인하자, 번화가와 인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혼자 가기는 좀 찝찝한데.’
그쪽에서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으니 밑져야 본전인 말을 꺼내 보았다.
“저희 멤버도 그때 일로 여쭙고 싶은 게 있다는데요. 혹시 한 명 더 같이 가도 될까요?”
현찬의 대답은 내키지 않아 보였으나 일단 YES였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자 규민이 멀리서 불구경하듯 눈썹을 까딱였다.
“나도 가는 거야?”
“그럼 너도 가야지. 녹음 들려 달라고 하면 어쩔 건데. 네가 수습해.”
물론 규민이 정말 본인이 수습하겠다고 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겠지만 혼자 이 위험을 부담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글쎄, 상황 봐서 들을 얘기 다 들으면 지웠다고 하면 되지.”
“그걸 믿겠냐?”
“뭐, 안 되면 다른 식으로 상황을 모면해 봐야지.”
묘하게 태평해 보이는 모습이 꽤 열받았다.
“너는 진짜….”
열 올려 봐야 나만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규민이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자리를 털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머리만 일찍 빠진다. 그쪽도 허술한 점투성이더만.”
저걸 아군이라고 생각해야 해, 말아야 해? 나는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시 후 모자를 꾹꾹 눌러쓴 채 도착한 카페는 카페 거리의 중심부에 있었다.
가게는 미리 마감을 해 둔 듯 창문에는 전부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그래도 안에서 소란스럽게 소동이 일어나면 주변에 신고해 줄 사람은 있겠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여차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퇴로부터 확인하고 있으려니 택시에서 내린 규민이 덜컥 출입문의 손잡이를 당겼다.
“야, 좀…!”
“어차피 들어가야 하잖아.”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냅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에만 불을 켜 둔 채 가게 메인 홀에 있는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못 알아볼 뻔했네.’
면도도 제대로 안 하고 어수선한 차림이라 멀리서 봤으면 본인인 줄 못 알아볼 수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규민이 먼저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자 현찬이 냅다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원하는 게 뭐야?”
이래서야 우리가 정말 뭐 협박이라도 하러 온 것 같잖아. 그쪽한테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체 노친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우리를 기껏 돈까지 써 가면서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는지는 알아내야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우호적으로 만들어 볼까 싶어 말꼬리를 흐린 그때.
“뭘 해 주실 수 있는데요?”
규민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냅다 불을 질렀다.